제주 이 맛이야

18. 떠날 준비, 안녕! 세미오름과 우진제비오름

by 조유상

2월 10일과 2월 25일 다녀오다.


제주를 떠난다 생각하면서도 짐은 하나도 싸지 않고 있다.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건만.

그저 제주의 자연 한 곳 한 곳을 복습하듯 다니기도 하고 그간 만났던 정겨운 이웃이자 지인들과 작별을 앞둔 안녕 만남을 하고 있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그리워하는가... ’ 안치환의 그 노래가 저절로 스며든다. 그래, 어떠한 인연을 부여잡고 옷자락을 얼마나 스쳤기에 그 많은 사람 중에 만나 함께 울고 웃고 공감하고 걷고 밥 먹고 차를 마시게 되었을까. 이것은 억겁의 인연을 거친 결과 아닐까. 따뜻했던 순간들을 차곡차곡 곱게 접어두고 있다. 사람도 그렇고 내가 밟고 걸어 디디고 햇살과 비바람을 만났던 숲과 바다들도 몽땅 낱개로 그리움이란 챕터에 기록될 것이다. 가끔은 꿈틀대며 나를 깨울 테지.


그토록 수없이 걸었던 집 가까이 있던 세미오름을 한 바퀴 돌고 조금 더 차를 타고 간 뒤 우진제비오름을 올랐다. 세미오름은 잘록한 허리를 하고 구름을 들어 올리며 여전히 다소곳이 엎드려 있었다. 반가움에 두 손을 맞잡고 공손한 인사로 발을 떼었다. 익숙한 오르내림과 낯익은 산자락, 상산나무가 연갈색 귀여운 열매를 동서남북으로 달고 있고 활엽수들은 빈 하늘을 보이며 서 있다. 송악은 활엽수 이파리가 남아 있지 않은 늦가을부터 부지런히 나무에 털뿌리를 박고 저벅저벅 기어올라 나무를 ‘고사시킬 테다’하는 의기양양함으로 초록의 빈자리를 메우며 곳곳에 푸르르다. 우듬지 나뭇가지들의 가는 떨림과 잔가지들의 흔들림은 내 마음 가지를 닮아 있는가. 삼나무들의 울창하고 빽빽한 기상은 겨울을 견디고 봄을 찬란히 맞이할 태세를 갖췄다. 내게도 겨울을 홀로 견딘 기상이 아로새겨졌으려나? 숲은 여전히 젊음과 스러짐으로 교차되고 머물러 있으되 새로 태어나는 중이다.


이름은 어여쁘나 시작하는 입구부터 막아서는 가파른 언덕, 우진제비오름을 숨 가쁘게 기어이 오르며 가까워지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혹시, 개구리? 역시 맞았군. 우수 경칩에 대동강 물이 풀린다 하였는데 우수가 2월 19일이었고 경칩은 3월 5일이다. 경칩이 가까웠고 기후위기로 날이 많이 따뜻해진 탓인지 우진제비오름에 있는 두 군데 원형의 우진샘에는 이미 활발한 개구리들 움직임이 보였다. 지난번 10일 날 걸음했을 때는 제법 두툼한 얼음장에 덮여 있더니 보름 만에 그새 녹아 흐르고 있다. 검은색, 갈색 개구리들이 다리를 쭉쭉 뻗으며 수면 위아래로 방울방울 숨을 한 번씩 내뱉으며 오르내리고 있었다. 와글와글 살아 숨 쉬는구나. 삶은 여전히 반복되어 둠벙 속 생명은 윤회처럼 거듭되고 있다. 머잖아 짝을 이루고 수많은 올챙이들로 둠벙이 좁다하며 바글댈 테지. 도넛처럼 생긴 도롱뇽 알도 생겨나리라. 얼마나 많은 뱀은 또 그들을 기다리며 스르륵 겨울잠 깨어 개구리에 입맛 다실 것인가.


생명이 우글 바글대는 둠벙에 홀려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개구리는 내 발자국과 그림자에 살짝 놀라고 나는 가만히 그들의 빠꿈거림에 환호했다. 한동안 생명을 예찬하다 샘을 뒤로하고 언덕을 다시 오른다.


복수초를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얼마나 보고 싶던 복수초 군락지였던가. 작년 3월 24일 우진제비오름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니 그 전날쯤 갔을 법하다. 친구가 살고 있는 집 근처라 몇 번 올랐던 곳인데 그 시절에 복수초와 노루귀, 산자고 군락지까지 한 목에 만났던 충격이 너무나 산뜻했던 곳. 조천에 사는 이 하나가 복수초 보러 갈 거라는 말에 퍼뜩 기억을 떠올렸다. 2월 10일. 복수초가 보이려나, 과연? 긴가민가하며 혼자 오른 우진제비 오름에는 복수초가 한 톨도 피어나지 않았었다. 피어나기는커녕 털옷 입은 얼굴조차 흔적 없었다. 너무 서두른 설렘이었으려나. 간신히 기다렸다 지난 25일 그곳을 다시 찾았다. 역시 두근거리는 마음 안고 가파른 시작점을 쉬엄쉬엄 올랐다. 이슬비가 간간이 내리는 날이었다. 그 사이에 뽈쏙뽈쏙 얼굴을 들고 있는 복수초 한두 녀석이 봉오리를 열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아아... 연인을 저 앞에서부터 발견해 설레는 마음이 이러려나? 활짝 핀 녀석은 없었지만 물오르는 나무들 숨결을 공기 중에 만지듯 느낄 수 있었다.


입을 열지 않고 빗방울을 투명하게 매단 채 낮은 키로 까치발 하고 있는 복수초를 하나둘 만나며 걸음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느린 걸음, 느린 시선으로 천천히 머물며 바라보는 복수초는 올해도 살아 있음을 알린다. 일 년을 기다렸으니 꽃으로 삶을 다시 향유하는 그대들이 빛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우리의 매일이어라' 온몸으로 말하며 그렇게 봄은 노랑으로 화창히 시작하는 중이다. 벌과 나비를 부르며 쨍한 빛으로 피어날 그대들이여, 겨울을 이겨내느라 두툼히 입은 솜털 옷 사이로 봄이 보시시 열리고 있구나.



내가 복수초 사진을 가족방에 올려준 날, 남편도 우리 집 뜰 한 편에 활짝 피어난 복수초 얼굴 둘 사진을 올려줬다. 게다가 그 며칠 전 우리 블로거 이웃인 홍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분도 활짝 피어난 복수초 사진을 올렸으니, 어인 일인가? 제주에서 시작된 봄이 아니라 추운 곳에서도 피어나는 꽃이라 그런가, 훨씬 추운 곳에서 시작된 봄이 거꾸로 내려오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우진제비오름에서 복수초는 다음 주 초가 되면 샛노란 언덕을 점점이 노랑으로 물들이리라. 남편이 나를 만나러 오면 다시 한번 같이 복수초를 만나러 와봐야겠다. 여러 날 꽃잎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햇살을 머금고 내뿜고 하는 그대들을 만나러 오리니, 혼자 손을 흔들며 지금은 안녕! 하고 돌아섰다.


머지않았구나, 활짝 피어오를 나날이. 그 화창할 봄이 울컥 다가오는 까닭은 두고 떠나야 하는 봄 때문일까.

이상한 봄이고 수상한 봄이 보실보실 피어나고 있다.



#우진제비오름 #세미오름 #복수초군락지 #봄이 다가오는 풍경 #봄은 노랑이다


우진제비오름 고바위길


2월 10일 우진샘



향기 간직한 상산나무, 잎지고 열매 돋보이는 늦가을~초봄


염주괴불주머니 어린 싹


비에 젖은 세미오름

아마도 아끼는 이들을 위한 바람이 쌓인 바람탑


이 팻말에서 앞으로 내려가면 바로 우진샘 둠벙


이끼낀 돌계단을 올라서면 복수초 군락지가 펼쳐진다. 3월 초부터 말까지 노랑 언덕이리라.




복수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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