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리발라드 Oct 13. 2022

10. 히틀러는 왜 파리를 파괴하지 않았을까

1940년 6월 23일 이른 아침, 히틀러의 파리 방문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이었던 2차 세계대전은 그 피해 역시 상상을 초월했다. 당시 전 세계 인구의 약 3%에 달하는 660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전쟁을 일으킨 독일은 물론 오스트리아, 폴란드의 많은 도시가 무참히 파괴되어 사람들의 삶은 폐허가 되었다. 프랑스 파리 또한 이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센강을 연결하는 다리와 개선문, 에펠탑, 노트르담 성당과 같은 주요 건물이 폭파 예정이었고 1944년 8월 23일 오전 샹젤리제 거리에 위치한 그랑팔레에서 첫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파리는 순식간에 일촉즉발 긴장감에 휩싸였다.

 그런데 하늘이 도운 것일까. 이후 다른 곳에서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혹자는 극악무도한 히틀러지만 파리가 너무 아름다워 차마 폭파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과연 전쟁의 파편으로 사라질 파리를 구한 것은 무엇일까.


 1944년 6월 6일 대망의 디데이, 15만 연합군이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안가 상륙에 성공하며 프랑스를 점령하고 있던 독일군을 빠르게 밀어내기 시작한다. 곧이어 6월 14일, 영국으로 망명하여 자유 프랑스군을 이끌었던 샤를 드골 장군 또한 노르망디에 도착하여 국내 저항군(레지스탕스)과 함께 파리 해방을 본격적으로 진행한다. 그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프랑스 주도로 해방을 이루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연합군에게는 독일군을 추격하는 것이 더 급선무였다. 더불어 이미 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었기에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파리를 우회하여 이동할 계획이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지도(좌)와 이후 연합군의 이동 경로(우)

하지만 파리 시민들에게 이 기다림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두려움과 불안함, 배고픔에 지친 그들은 프랑스혁명 기념일 7월 14일,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하며 국가 라마르세이예를 함께 불렀다.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파리를 가득 채웠다. 4년간 독일의 치하에 빼앗겼던 자유를 향한 외침이었다. 그렇게 한마음을 확인한 사람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저항 운동을 전개한다. 파리 지하철과 헌병대를 시작으로 경찰, 우체국이 차례로 파업을 진행하였으며 파리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설치하였다. 독일도 이를 대비하려 했지만 후퇴하며 남겨진 6,000여 명 독일군으로는 충분치 않아 진행이 지지부진하였다. (파리 외곽에 11,000명 주둔)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는 저항군의 모습

 드디어 8월 19일 오전, 열악했지만 파리 시민들은 레지스탕스에 합류하여 파리 구청, 주요 전략 시설물(우편 집중국, 공장 등)을 점령하며 파리 해방의 시작을 알렸다. 오후가 되자 전투는 파리 전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펼쳐졌다. 레지스탕스와 독일군의 대치가 점점 더 고조되자 스웨덴 대사 Raoul Nordling이 중재에 나선다. 그는 평소 독일군과도 가깝지만 2,000여 명의 프랑스 정치 수감자를 풀어주는데 도움을 준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저항군은 독일군이 파리를 완전히 떠날 때까지 무기를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고 다음 날 아침, 그들은 파리 시청사를 수복한다.


 8월 20일, 드골 장군은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우어를 만나 파리 해방 지원을 요청한다. 독일로 향하던 아이젠하우어 사령관은 상황을 전달받고 이전과 달리 현재 파리 레지스탕스를 지휘하고 있는 탕기 대령에 대하여 염려하기 시작했다. 파리를 공산주의자 손에 맡겨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르클레어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2사단 기갑 부대와 브레들리 장군이 이끄는 미군 4사단을 파리로 출정시킨다.

독일 콜티츠 사령관(좌)와 스웨덴 대사 Raoul Nordling(우)

 한편 파리 주둔 독일 사령관 콜티츠는 새벽에 전화 한 통을 받는다. 히틀러였다. 총통으로부터 파리 폭파 명령을 받은 콜티츠 사령관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에펠탑, 노트르담, 수많은 문화유산과 박물관도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아마 그의 마음 한 켠에는 이미 전쟁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적군이 빠르게 파리로 접근해오고 있지만 이에 맞설 군대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령을 거역하면 독일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 그의 가족이 위험에 빠질 터였다. 그는 평소 알고 지냈던 스웨덴 대사 Raoul Nordling에게 sos를 청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자신을 보호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파리 폭파 계획을 철회한다.

 그런데 이 와중에 문제가 생긴다. 콜티츠 사령관 관리 밖에 있는 독일 사단이 파리 동쪽으로 계속 이동하며 저항군과 대치하였는데 그때 독일 병사 한 명이 사망하자 샹젤리제에 위치한 그랑팔레에 2개의 폭탄을 발포한 것이다. 폭발음과 진동은 파리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들은 바로 저항군에게 포위되어 곧 항복하였고 콜티츠 사령관의 요청에 따라 전쟁 포로로 송치되었다. 소방관의 진압으로 연기가 걷힌 그랑팔레는 화려했던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대표 건축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내부가 완전히 파괴되어 앙상한 뼈대만 남아 있었다.

 

레지스탕스의 모습

8월 24일, 르클레어 장군의 부대가 마을 사람들 환영을 받으며 파리 근교 남서쪽에 도착한다. 미군보다 먼저 파리 시청사에 도착하여 자력으로 해방을 이루기 위해 빠르게 파리 입성을 진행한다. 하지만 연합군과 저항군의 합세를 저지하기 위한 콜티츠 군대가 예상보다 만만치 않았다. 그는 여기서 시간이 지체될수록 저항군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비 내리는 저녁까지 전투는 계속되었고 마침내 프랑스 연합군은 독일 군대를 뚫고 파리 시청사에 있던 저항군과 합류하게 된다.


 8월 25일 아침, 파리 남쪽과 서쪽에서 르클레어 장군을 중심으로 독일군 포위에 들어갔다. 독일군은 열세에 몰리고 있었지만 결코 전투의 치열함은 덜하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곧 콜티츠 사령관과 참모진의 중심 사령부가 있는 파리 모리스 호텔에 당도하여 그들의 항복을 받아낸다. 1940년 6월 22일부터 시작되었던 길고 긴 독일 침략이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진행된 샤를 드골 장군의 개선문 행진에는 2백만 명의 파리 시민들이 샹젤리제 거리로 나와 스스로의 힘으로 되찾은 자유를 축하하며 환호했다. 결국 파리 해방은 누구 한 명의 선택이 아닌 파리 시민들의 저항, 레지스탕스의 전략 그리고 독일군 콜티츠 장군의 선택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샹젤리제를 행진하는 샤를 드골 장군
"파리는 상처받았습니다. 파리는 파괴되었습니다. 파리는 고문받았습니다. 
그러나 파리는 해방되었습니다."

<샤를 드골의 파리 해방 연설 중>

 파리 점령의 시작과 파리 해방 에 있는 개선문은 자신을 로마 황제와 동일시하였던 나폴레옹이 오스테르리츠 전투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로 기둥 4면에는 각각 나폴레옹의 영광과 업적에 관한 사건들이 조각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나폴레옹은 추방되어 완성된 개선문을 보지 못하였는데 이후 1836년 프랑스의 마지막 왕, 루이 필립 때 완공되어 혁명 동안 루이 필립이 이룬 공적과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물이 되었다.

낮과 밤의 매력이 다른 개선문

 지금도 개선문 아래에는 세계대전 동안 목숨을 잃은 무명용사들을 추모하기 위한 촛불이 365일 빛을 밝히고 있으며 나폴레옹의 처음 의도와는 달리 지금은 프랑스혁명 기념일, 여러 데모 시작의 주요 장소이다. 

 특히 그 위에서 바라보는 파리가 굉장히 인상적인데 개선문을 중심으로 펼쳐진 방사형 도로는 오스만 남작의 파리 프로젝트로 깔끔하게 정리된 도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뮤지엄 패스 소지자는 무료입장이 가능하며 샹젤리제를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꼭 개선문에서의 멋진 파리 뷰를 즐기시길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