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centage

운명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타는 거다

by 윤우

우리는 이 유명한 착시 그림을 알고 있다.

왼쪽의 주황색 원은 작아 보이고, 오른쪽 주황색 원은 커 보인다. 사실 두 원은 크기가 같다.


우리는 현상을 판단하는 것을 넘어서, 근본적으로 현한그 상태 또는 순간을 본다. 우리는 이 지구에서 태어난 순간, 우린 현했다. 한편 우리는 우리를 직접 보지 못한다. 현한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감을 느낀다는 것. 또는 다른 사람의 존재를 느낀다는 것.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동시에 내면의 나와 눈을 마주한다는 것. 정확히 한 지점에서 우리가 현한 상태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현한 상태, 우리가 자각했다고 믿는 형체는 오직 하나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이 세계에는 수많은 ‘눈’과 ‘정신’이 있으며, 이에 무한한 스펙트럼을 가지게 된다. 스펙트럼 하나를 골라 그것이 정답이라고 믿을 수는 있으나, 확정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수학시간에 배웠던 걸 떠올려보자. 처음엔 숫자를 배웠다. 자연수다. “123…”. 그다음엔 유한소수를 배웠다. “0.1, 0.2, 0.3…”. 정수, 유리수, 무한소수를 배웠다면, 궁금증이 생긴다. 무한소수가 대체 무엇인가? “0.122222222222222222222222222222222222222…. “.


우리는 이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왔던 존재이자 세상에 적응하려는 동물이기에, 수학을 창조해 냈다. 원시인들에게는 형평성이 중요했고, 유지되지 않는다면 내부집단학살이 일어나기에, 유전의 존속을 위해 수확한 사과의 수를 정확히 나누어야 했다. 그래서 사과의 형체를 ‘하나, 둘‘이라는 구별하기 쉬운 숫자 체계를 완성시켜 나갔고, 그에 이어 형평성이라는 하나의 믿음에 태어난 수많은 수학이 재구성되었다. 수학은 숫자로 시작해 숫자로 끝난다. 수학문제를 생각해 봐도, 문제는 숫자들로 시작된다. 푸는 도중의 수많은 방정식과 법칙은 도구일 뿐, 답은 하나의 숫자로 귀결된다. 그러나 여기서 수학문제의 맹점이 발생한다. 분명 이차방정식의 x값은 15이고, 삼각형의 변 AB의 길이는 23이다. 사실일까? 우리는 편의성을 위해 ‘하나, 둘‘이라는 숫자 체제를 도입한 것이지, 숫자를 파고 파다 보면 결국 ‘정의할 수 없다’, 무한소수로 귀결된다. “무슨 소리인가, 계산상으로 정확히 푼 문제의 답인데”라고 반박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무한소수로 이해하기 어렵다면, 확률로 예를 들어보자. ’주사위를 2번 돌렸을 때 둘 모두 숫자가 6이 나올 확률은?‘이란 문제를 보면 당연히 답은 1/36이다. 백분율로는 2.7%. 두 번 던지는 행동을 100번 시행하면 약 3번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 평균이다. 그 3번 나온다는 것조차 예측할 수 없다. 1000번, 10000번 시행해도 값이 근사치에 또는 정확도가 높아지기만 할 뿐, ‘항상 그렇다’라고 말할 수 없다. 1/36이 사실 무한소수라는 점을 알고 있는가. 우리가 평소에서든 위대한 수학 방정식을 구할 때든 확률은 쓰인다. 하지만 확률은 정확하지 않다. 정확한 것은 없다.


우리는 정확하게 계산된 것을 보면서도,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 사과 하나가 하나로 보이는 것은 정확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2/3 정도 깎인 사과가 두 개 있다. 하나인가 두 개인가? 우린 대부분 ‘2/3 정도 깎인 사과 두 개’라고 하지, ‘사과가 2/3으로 정확히 깎인 두 개의 사과 하나 하고도 1/3‘이라고 하지 않는다. 즉 세상의 기준 역시 사람의 눈과 정신으로 만들어졌고, 그 기준은 스펙트럼을 가지기에, 사과라는 것과 숫자의 정의부터가 모호하다. 당신은 1cm가 어느 정도인지 알 것이고, 자를 가져다 대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 1cm라는 게 뭔가? 단위이다. 방금은 숫자가 모호하고 기준에는 스펙트럼이 있다고 했다. 국제도량형총회에 따르면 국제적으로 규약한 1cm의 길이는 1/100미터, 1미터는 진공에서의 빛이 1초간 진행한 거리 1/299,792,458. 빛의 속도는 불변하다고 증명해 왔고 그것이 근본적으로 형평성과 보편성을 유지하는, 단위는 사실상 인간이 간단히 정한 규칙이다.


빛의 속도가 과연 불변일까. 빛은 입자도 파동도 아니지만 동시에 둘 다 맞다. 관측 가능한 상황인가 아닌가에 둘이 갈린다. 즉, 인간은 ‘보다’라는 행동으로 ‘정의할 수 없는’ 스펙트럼을 하나로 집중시킨 것이다. 빛은 불변의 속성을 가지는 것은 맞다. 동시에 우리는 틀렸다. 확률처럼 말이다. 우리가 보는 것이 하나지, 이 형체가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불확실하다. 하나라고 모두가인정하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라고 보는 것. 형평성과 보편성, 실리성을 위해, 이것이 하나라고 보는 것이다. 하나로 집중시키기에 그것이 하나의 빛나는 작은 원으로 보일 뿐, 햇빛을 모은 볼록렌즈 돋보기를 치우면 그저 햇빛이 스펙트럼적으로(전체적으로) 쬐이는 하얀 A4종이만 보인다. 하나로 집중시켰기에 태양열이 집중되었고, 종이에 불이 탄다.


그러나 물리 역학에 있어서의 ‘정의할 수 없다’는 어려운 학문이다. 인간이 하나로 정하면서 살아온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학문을 잠시 인정하면서도 옛 학문과 양립시키려는 것은 어렵다. 인간의 스펙트럼에 있어서는 ‘눈’도 있지만 ‘정신’이 있다.


‘정신’의 스펙트럼은 더 방대하다고 할 수 있다. ‘보다’로써 느끼는 형체와 ‘정신‘으로써 느끼는 형체는 또 다르다. ‘보다’로써 느끼는 형체는 3차원 내로 국한되지만, ‘정신’으로써 느끼는 형체는 ‘시간’의 축이 추가된 4차원 스펙트럼이기 때문이다.


‘정신‘도 물론 ’정의할 수 없다‘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한마디로 생각이다. 생각은 시공간의 제약이 없다. 과거에 내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현재에(현재라는 정의도 모호하다) 무슨 일이 있었다고 기억할 예정인지,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지에 대한 예상予想. 모든 것은 생각, 즉 정신의 여행으로 한 인간의 삶은 바다로 정해짐에 따라 파도를 탄다. 인간의 정신은 수평선 너머로 보이지 않는 광활한 바다에 혼자 카약을 타고 파도를 자유롭게 항해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정해진 것은 없다. 파도를 타서 바다를 항해하는 목적이란 것이 없다. 육지를 만나면 잠시 쉬거나 배우고, 다시 바다를 항해한다. 악천후에 카약이 망가지고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보면 정신에 ‘나’는 큰 파도에 휩쓸려 심해에 가라앉거나 오히려 바다에 직접 빠지려고도 한다.


그것이 타살과 자살이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거나 생명체 또는 인간으로 보기 힘든 상태로 만든 행위를 아울러 살인이라고 칭하지만, 살인의 형태는 다양하다. 그러므로 살인은 비단 육체적인 살인으로 정의될 수 없다. 인간은 ’정신‘에서 현한 ‘나’를 살인한다. 그러나 ‘정신’은 자유도가 너무나도 높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바다 그 자체이기에, 현실의 형체는 ’보다‘라는 집약적 기준을 통해 인간의 기준을 간접적이게나마 형성해 나갈 수 있지만, ’정신‘은 그럴 수 없다. 차원부터 다른 형체이기에, 3차원인 인간이 다룰 수 있을 리가 없다. 다른 말로 바다를 잠재우는 것은 신이 할만한 일이다. 웃긴 말로 칼로 물 베기.


‘정신’은 숫자가 아니며 수학이 아니다. 가끔 어른들의 말씀을 듣다 보면 ”감정을 조절해라 “라는 말이 들릴 때가 있다. 물론 감정을 조절하라는 말이 틀렸다고 보긴 힘들다.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유지시키기 위해 공감과 배려라는 감정의 형태가 생겨났다. 관련된 행위가 일명 ‘감정의 조절’이다. 그러나 감정 또는 ‘정신’은 바다이기에, 칼로 물을 벨 수 없듯이 감정은 다이얼을 돌리듯 조절되지 않는다. 당장 하얀 북극곰을 생각하지 마라. 곰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하얀 북극곰 생각이 안 나기가 힘들다. ‘정신’은 기억이자 감정, 생각이다. 이것은 현실에서가 아닌 시간의 축이 추가된 4차원 스펙트럼, 즉 내면의 나에게 현한 형체로 또 다른 입자이자 파장이다. ‘보다’라는 3차원적 사고로는 ‘정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정신’은 바다이므로, 그대로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가?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다면 집중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가? ‘정신’의 특이한 점은 자유도이다. 자유도가 높다는 것은 제한이 없다는 것, 무한이다. 특히 무한의 세계에서 시간의 축이 추가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보다’라는 3차원 스펙트럼에 인간의 눈으로는 시간의 축이 없거나 볼 수 없기에 우리는 시간여행이 불가능하다고 믿지만, ‘정신’의 4차원스펙트럼에서는 우린 이미 시간을 넘나들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안 좋은 과거, 불행한 현재, 암울한 미래가 스펙트럼 안에 존재한다. 이것이 물론 하나의 ’숫자나 확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펙트럼이기에 하나에 집중할 필요가 없다.


‘정신’에서 우린 과거, 현재, 미래를 자유롭게 여행하는 시간여행자이다. 정의하려는 게 아닌 선택이다. 스펙트럼 중 하나의 시간선에 집중하려는 것은 마치 ‘보다’에 인간들이 하는 보편성을 위한 집중과 같다. 그러나 ‘정신’은 보편성을 따질 필요가 없다. 애초에 우린 광활한 바다에 혼자 남겨져 목적 없이 자유롭게 항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천후가 왔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다. 시간의 축을 이용하면 악천후가 없는 바다 자체를 다시 고를 수도 있다(!). 게임처럼 말이다. 정신의 세계는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자유롭다.


과거에 내가 했던 잘못이 현재의 정신 속 나를 괴롭힌다면 그 과거의 파도가 없는 스펙트럼의 바다로 재선택하라.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었고 없고 없을 것이며 정해진 것은 오직 나의 선택이다. ‘보다’의 현한 형체는 당연히 바꾸기 힘들다. ‘저 사람이 날 좋아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은 단지 생각일 뿐이지 실제로 ‘보다’에 현할 것이라고는 단정 지을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정신’이라는 4차원은 저차원인 ‘보다’의 3차원을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영향을 준다. 시간이라는 축은 정말 정의하기 힘드므로, 언제 어떻게 3차원의 스펙트럼에 영향을 준다고는 필자조차도 설명하기 힘들다. 고차원이 저차원을 장악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설명의 최선이겠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몸이 왜소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자. ‘정말 왜소해서 멸치라고 놀림받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몸의 자세가 위축되고 사고의 처리에 편향성이 생기기 쉽다. 그러나 ‘왜소하더라도 난 다른 곳에 매력이 있거나 왜소한 것 자체가 나의 매력이 된다’라는 일명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는 ‘정신’이자 ‘바다’를 선택했다면, 상황이 바뀌어 갈지도 모른다. 이 ‘모른다’, 그러니까 시간의 축을 ‘모른다’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사실 정해져 있는 것이 스펙트럼 전부일수도 있다. 아니면 정해진 것 위에 또다시 선택을 해서 정하고 정한 것 위에 선택을. 인간은 시간의 축이라는 정의를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우리에겐 ‘정신’이 있다. ‘보다’의 현실에서 힘든 것을 무작정 참으라는 말이 아니다. 이러면 ‘정의할 수 없다’라는 전제를 부정한다. 보단, 나의 ‘정신’에 선택의 자유를 부여하라. 한국 사회에서는 선택의 자유가 좁다. 규칙이 많다는 말이 아니라, 생각의 시야가 좁다. 사회적으로 정해진 시선, 신념, 사상, 생각, 정치, 관념 등의 ‘정신’에게 달려진 족쇄의 수가 필요이상으로 많다. 풀려고 하면 정 많은 민족 아니랄까, 족쇄를 하나 더 걸어준다. ‘정신’의 선택권은 태어난, 현한 당신에게 쥐어져 있었다. 언제든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길을 재선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