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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해줄 테니의 함정

AI 시대, 디자이너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by 김석민

ChatGPT로 아이디어를 브레인스토밍하고, Midjourney로 레퍼런스 이미지를 생성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AI 도구들이 디자인 워크플로우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면서, 작업의 시작점 자체가 달라졌다.

이런 변화는 분명한 효율성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디자인 프로세스에서 중요한 변화도 일어나고 있다.

AI가 제안하는 시안들은 깔끔하다. 기술적으로도 완성도가 높고, 보편적으로 무난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여전히 질문한다.

"이 중에서 무엇이 브랜드와 가장 어울릴까?" "왜 이 톤을 선택해야 하지?" "이 디자인이 사용자에게 어떤 경험을 남길까?" "우리가 정말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하지만 질문의 성격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했다면, 이제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결정의 순간은 점점 짧아졌고, 선택에 대한 근거보다는 직관적 판단이 우선시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이디어와 시안은 더 이상 희소하지 않다. 오히려 과잉 상태다. 수많은 옵션들이 생성되고, 그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 주된 작업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디자이너들은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AI의 한계는 기술이 아니라 맥락이다


AI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맥락을 만들지는 못한다. 맥락은 사람과 브랜드, 시간과 관계,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만 태어난다.

AI가 추천하는 색상은 전환율이 높을지 몰라도, 그 색이 브랜드의 10년 후를 말해줄 수는 없다. AI가 생성한 카피는 세련될 수 있지만, 그 문장이 이 브랜드가 세상에 던지고 싶은 '진짜 목소리'와 닿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AI는 '왜 이것이 아니면 안 되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는 점이다. 좋은 디자인과 옳은 디자인 사이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다.

AI는 패턴을 학습하지만, 예외를 창조하지 못한다. 혁신적인 디자인은 종종 기존 패턴을 의도적으로 깨뜨릴 때 탄생한다. 애플의 초기 투명한 iMac, 무지의 단순함, 브루탈리즘의 투박한 아름다움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규칙 깨기'는 데이터로는 예측할 수 없는 인간만의 직관과 용기에서 나온다.


'결정하지 않는 디자이너'의 위험


AI가 해줄 테니, 우리는 더 이상 선택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러나 디자인은 결국 책임의 예술이다. 무엇을 만들지, 왜 그렇게 만들지, 그 결과가 어떤 영향을 줄지를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결정 없는 디자이너는 결국, 결과의 주인도 될 수 없다. 클라이언트가 물을 때, 사용자가 의문을 제기할 때, 동료가 근거를 요구할 때, "AI가 그렇게 했어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성장 문제를 넘어서는 이슈다. 디자인이라는 분야 자체의 정체성과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판단력의 약화다. 매일 수십 개의 선택을 해야 하는 디자이너가 AI에 의존하면서,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 자체가 퇴화하고 있다.

결정을 회피하는 습관은 점진적으로 창의력을 잠식한다. 창의성의 핵심은 무수한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한 근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AI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디자이너의 본질


그렇다면 AI 시대, 디자이너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먼저 인정하자. AI는 이미 우리 곁에서 많은 일을 대신하고 있고, 그 영역은 계속 확장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생각'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의 5단계를 되짚어보면, AI가 강점을 보이는 영역과 한계가 명확해진다. 공감(Empathize) 단계에서 사용자를 이해하고, 정의(Define) 단계에서 핵심 문제를 파악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직관과 경험이 필요하다. AI는 아이디어 발상(Ideate)과 프로토타입(Prototype) 제작에서 효율성을 제공하지만, 테스트(Test) 결과를 해석하고 다음 방향을 설정하는 것은 인간의 판단이 결정한다.

진정한 디자이너는 'AI 프롬프터'가 아니라 'AI 에디터'가 되어야 한다. 좋은 에디터는 원고의 잠재력을 읽고, 무엇을 살리고 무엇을 쳐낼지 안다. AI가 제시한 100개의 옵션 중에서 단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그 선택의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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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디자이너는 '문화 번역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브랜드 아이덴티티 피라미드(Brand Identity Pyramid)를 생각해보자. AI는 표면적인 비주얼 레이어(Visual Layer)는 잘 만들어내지만, 그 아래 있는 감정적 혜택(Emotional Benefits)이나 브랜드 본질(Brand Essence)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한국 밀레니얼의 감성, 지역 소상공인의 정서, 특정 브랜드만의 DNA - 이런 것들을 읽고 디자인에 반영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 디자이너만의 영역이다.


AI와 협업하는 디자이너의 실무 역량


첫 구상과 AI 결과물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방법론


AI 이미지 생성에서 가장 흔한 문제는 머릿속 아이디어와 결과물 사이의 차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체계적 접근법이 필요하다.

1단계: 구체적 언어화 (Verbalization) "모던한 느낌"이 아니라 "미니멀한 타이포그래피와 깔끔한 제품 사진 조명"과 같이 구체적 레퍼런스를 제시한다.

2단계: 반복적 정제 (Iterative Refinement) 첫 결과물을 베이스로 "형태를 더 간결하게", "구도를 중앙 집중형으로", "색상 대비를 높여서" 같은 시각적 요소를 다듬고, 해상도를 높이는 업스케일링 작업을 통해 완성도를 높인다.

3단계: 브랜드 컨텍스트 주입 (Brand Context Injection) 타겟 사용자의 구체적인 사용 상황과 맥락을 프롬프트에 포함시켜 목적에 맞는 결과물을 유도한다.


자연스러운 이미지 생성을 위한 기술적 이해


AI 이미지 생성의 핵심은 '자연스러움'이다. 이를 위해서는 AI의 작동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렌더링 품질 제어: "--quality 2, --stylize 100" 같은 파라미터로 사실성과 예술성의 균형을 조정한다.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용이라면 stylize 값을 낮춰 과도한 스타일라이징을 방지한다.

시드(Seed) 활용: 동일한 시드값으로 다양한 프롬프트를 테스트하여 일관된 톤앤매너를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시안을 확보할 수 있다.

레이어링 기법: 배경, 인물, 오브젝트를 단계적으로 생성한 후 합성하는 방식으로 더 정교한 컨트롤이 가능하다.


이미지 생성 AI 마스터를 위한 필수 역량


기술적 역량(Technical Skills)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는 언어 구사력

파라미터 튜닝: 품질, 스타일, 비율 조정에 대한 이해

후반 작업: AI 결과물을 포토샵에서 브랜드에 맞게 정제하는 능력


전략적 역량(Strategic Skills)

브랜드 가이드라인 해석: AI 결과물이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일치하는지 판단

타겟 분석: 생성된 이미지가 목표 사용자에게 적절한 메시지를 전달하는지 검증

트렌드 큐레이션: AI가 제안하는 스타일 중 브랜드에 적합한 것을 선별하는 안목


커뮤니케이션 역량(Communication Skills)

클라이언트 교육: AI 결과물의 한계와 가능성을 명확히 설명

프로세스 투명화: AI를 활용한 작업 과정을 체계적으로 문서화

기대치 관리: AI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사전에 커뮤니케이션


새로운 시대, 새로운 디자이너의 정의


편리함에 속아 질문을 잃는 순간, 디자이너는 더 이상 설계자가 아니다. AI가 만들어주는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도 '왜 이것이어야만 하는가'를 끝까지 물어보는 사람.

그 질문을 잃지 않는 사람만이, AI 시대에도 디자인의 주인으로 남을 수 있다.

사용자 경험의 더블 다이아몬드(Double Diamond) 모델을 보면, AI의 역할과 한계가 더욱 명확해진다.

첫 번째 다이아몬드의 '발견(Discover)'과 '정의(Define)' 단계에서는 인간의 통찰력이 핵심이다. 사용자 리서치, 문제 정의, 기회 영역 파악 등은 맥락과 감정을 이해해야 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다이아몬드의 '개발(Develop)'과 '전달(Deliver)' 단계에서 AI가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최종 결정과 검증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특히 A/B 테스트나 사용성 테스트 결과를 해석하고, 다음 이터레이션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은 데이터 너머의 인사이트를 읽어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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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협업 시대의 효율적 워크플로우


단계별 AI 활용 전략


리서치 단계: AI는 트렌드 분석과 경쟁사 벤치마킹에 활용하되, 실제 사용자 인터뷰와 현장 관찰은 인간이 담당한다. ChatGPT로 인터뷰 질문지를 작성하고, Claude로 리서치 데이터를 정리할 수 있지만, 사용자의 미묘한 감정 변화나 행동 패턴은 직접 관찰해야 한다.

아이디어 발상 단계: Midjourney로 무드보드를 생성하고, ChatGPT로 네이밍 후보를 확보한 후, 브랜드 전략에 맞는 방향을 선별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AI 결과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 컨텍스트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이다.

프로토타이핑 단계: Figma AI로 기본 레이아웃을 생성하고, 사용자 시나리오에 맞게 인터랙션을 설계한다. AI가 제안하는 컴포넌트들을 브랜드 가이드라인에 맞게 커스터마이징하는 것이 핵심이다.


역설적이게도, AI가 발전할수록 디자이너의 전략적 사고가 더욱 중요해진다.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Maslow's Hierarchy of Needs)를 예로 들면, AI는 기능적 욕구(Functional Needs)는 잘 해결하지만, 자아실현 욕구(Self-actualization)나 소속감에 대한 욕구까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미래의 디자이너는 '경험 설계자(Experience Architect)'가 될 것이다. 단순히 인터페이스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 여정(User Journey) 전반에 걸쳐 일관된 브랜드 경험을 설계하는 것이다. 이는 서비스 디자인 방법론처럼, 터치포인트 간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감정의 흐름을 설계하는 고도의 전략적 작업이다.


품질 관리를 위한 체크리스트


AI 협업 프로젝트에서 품질을 보장하기 위한 필수 확인 사항들이다.

브랜드 일관성: AI 결과물이 기존 브랜드 가이드라인과 충돌하지 않는가?

타겟 적합성: 의도한 타겟 사용자에게 적절한 메시지를 전달하는가?

기술적 실현 가능성: 실제 구현 시 기술적 제약사항은 없는가?

차별화 요소: 경쟁사와 구별되는 고유한 특징이 있는가?

확장성: 다양한 매체와 상황에서 일관되게 적용 가능한가?


AI와 함께 일하되, AI에게 잠식당하지 않는 것. 그 경계를 지키는 것이 우리 시대 디자이너들의 새로운 과제다. 그리고 그 경계선은 생각보다 명확하다: 기술은 효율을, 인간은 방향을 담당하는 것이다.


진짜 디자인은 선택에서 시작된다


AI는 선택지를 제시한다. 하지만 '왜 이것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답은 인간의 몫이다. 그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다.

우리는 결과물이 아닌, 선택의 논리를 설계하는 사람이다.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것은 "AI가 대신할 수 없는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사람을 이해하고, 맥락을 읽고, 질문을 던지고, 감정을 설계 가능한 언어로 번역하는 것. 아이디어는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그 아이디어가 '왜 이것이어야만 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그 설명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이 시대, 디자이너로 존재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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