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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Jul 19. 2024

철학자의 길

둘째 날. 몹시 무덥고 습하지만 비가 오지 않아 다행스럽다. 오늘의 일정은, 하며 큰아이가 연예인의 매니저처럼 브리핑을 한다. 어젯밤 엄마가 꿈나라로 직행한 다음 딸내미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일정을 짰던가 보다. 듣는다고 아나? 절에 간 색시처럼 인솔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다녀야지. 인솔자를 졸졸 따라가 교토 가는 전철을 탔다. 교토는 시골내음이 물씬 나는 곳이라는데 과연 어떨까, 내심 기대가 크다. 초록 들판은 우리나라 시골이나 별반 다름이 없지만, 주택가가 나오면 조금 다른 점이 보인다. 단정한 양옥 주택들은 차양이 좁고 유독 외관이 깔끔하다. 누구나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집들을 골라 일부러 전시해 놓은 느낌. 외장재도 튼튼해 보이고 기와를 인 지붕이 멋스럽다. 질투인지 부러움인지, 그들의 야트막한 지붕들이 나를 사로잡아버린다.


카페 아마존 시치조 본점에서 에서 브런치를 주문하고, 각자의 브런치가 모두 나오도록 지켜만 보며 아이가 원하는 컷을 건질 때까지 우리는 기다려! 상태다. 먹어도 돼 - 큐 사인이 떨어질 때까지 주인의 눈만 바라보는 강아지처럼 얌전히 기다리다 아이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식을 한다. 아이가 가끔씩 피크닉 하던 카모 강가가 근처라기에, 곧장 달려가 아이가 만족할 때까지 사진을 찍어주고, 찍히고, 찍고, 야단법석을 떤다.



다음 행선지는 철학자의 길이란다. 철학자의 길은 무성한 숲가를 흐르는 얕은 시내를 따라 죽 이어진 길로,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이 길을 다녀서 유명해졌다 한다. 임마누엘 칸트처럼 그도 시간을 정해 산책을 했을까. 그의 철이 일본 군국주의의 상적 기반이 된 것은 유감스럽지만, 길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다만 거기에 있을 뿐인데...... 벚꽃 필 무렵이면 이곳은 발 디딜 틈 없다는데 날씨가 더워서인지 인적이 드문드문 눈에 띄는 정도다. 철학자 대신 사색에 잠긴 고양이 몇 마리를 만난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생각한다.  똑똑한 고양이가 나오던 나쓰메의 소설.

할머니 한 분이 작은 액자에 그림을 그려 팔고 있다. 주먹만 한 팔레트, 5~6색의 원색 물감만으로 딸기나 해바라기 풀꽃 등을 그려내다니! 놀라워하며 구경하는 어미에게 아이가 한 점 사 준다. 400엔. 득템!

철학자의 기리에서 만난 무궁화, 반가워 눈물이 나려 한다.


양산을 써도 햇볕은 강렬하다. 더위에 지쳐 카페로 향한다. 시원한 음료로 더위를 달래고는 다음 행선지인 우메다로 향했다. 매실 매자에 밭 전자를 쓰는 우메다. 예전에 이곳에 매실밭이 많았던가 모르겠지만, 지금은 쇼핑천국답게 사람도 많고 복잡하다. 사람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와 일본어로 떠들어대는데 영혼까지 탈탈 털릴 지경이다. 전철이 지나는 곳 바로 아래도 상점가로 활용되고 있다. 저런 곳에서 시끄러워서 어찌 장사를 할꼬. 하여튼 신기한 것투성이다. 좁은 길 한쪽에는 자전거가 주욱 주차되어 있는데, 이곳은 자전거도 주차비를 내야 한단다. 오잉?



인솔자는 우리를 캐릭터선물센터로 ABC마트로 끌고 다닌다. 계산하는 직원을 가리키며,

"나도 저런 일을 한다고!"

말하는 아이.

"그래, 저런 곳에서 일하려면 참 정신없고 힘들겠구나. 대단해!"

"나도 내가 저런 일을 해내는 것에 놀랐어."

말에 힘이 들어가는 아이. 캐셔를 레지라 하는데, 레지들은 자기가 계산한 영수증에 일일이 자신의 도장을 찍어야 한단다. 싸인도 아닌 도장을 너무 사랑하는 민족의 틈바구니에서, 외국인으로서 처음 레지를 맡고 익숙해지기까지 내내 긴장의 연속이었을 아이를 생각하니 생각할수록 짠하다.


상품이 다 거기서 거기련만, 쇼핑에 취미가 없는 어미는 지루해하고 젊은이들은 어린 조카의 선물을 고른다며 눈을 빛낸다. 제 엄마를 위해 퀼트가게에도 들러 억지로 예쁜 천 몇 가지를 사다 안겨주는 아이들. 냅두지 말라니깐 그러네....... 어미와 언니가 기절하기 직전까지 쇼핑센터를 훑고서야 아이는 삼각김밥(오니기리) 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고윳그리 도죠! 매니저가 선창하면 주방 직원들이 따라 제창하는 양이 우스워, 먹다가 킥킥 웃었다. 뭐래? 물어보니 맛있게 드시란 소리란다. 수시로 들려오는 고윳그리 도죠. 올 때도 갈 때도 그들은 이럇샤이마세를 제창하고 아리가또 고자이마시다를 제창해 댔다. 떠들썩하고 명랑한 가게분위기가 썩 싫지는 않았다. 고독한 미식가에 흔히 나오는 가게 같은 분위기.


마지막, 왕눈이 스티커사진을 찍는데 기절하는 줄 알았다. 시끌벅적, 난리법석, 대혼잡의 메카인 스티커사진관에서 스티커 사진을 찍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젊은이들에게 이끌려, 한 30분을 낑낑대며 기계와 씨름을 한 결과, 우리 자신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만화 캐릭터 사진을 들고 허허롭게 웃었다. 이건 절대로 우리가 아니다! 부정할 수밖에 없는 모습들이여, 추억 저편으로 가 있거라! 이따금 꺼내어는 주마.

집까지 걸어서 30분 정도 걸린다기에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어서 빨리 우메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래저래 또 떡실신할 수밖에 없는 둘째 날......



일본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사과와 키위를 깎는다. 토끼 모양으로 깎아 달래서 고객의 취향에 맞춰 깎아 준다. 어제저녁, 일본 마트에 들러 사 온 과일인데 생각보다 물가가 비싸지 않다. 사과 가격이 4개에 8백 엔 조금 넘었던 듯. 우리나라처럼 사과값 비싼 곳이 또 있으랴. 맛을 보니 우리 것보다는 덜하다. 색깔은 이쁜데 퍼석거린다. 두 개를 세 명이 해치운다.

"다음 일정이 뭔가요?"

"코메다 커피집에서 브런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아이집 근처의 코메다 커피집으로 함께 고고! 소포장 설탕 봉투의 글자를 더듬더듬 읽다가 그라뉴 설탕이란 글자를 포착했다. 그레인을 그라뉴로 표기하고 설탕은 설탕 당자를 썼다. 아직껏 적응이 잘 안 되는 일본 발음......  일본어보다 영어가 가깝게 느껴지는 게 현실을 떠올리며 웃는다. 기모노 입은 어린애가 일본어로 뭐라 뭐라 말하는 것이 신기하여 눈과 귀가 자꾸만 그쪽을 향한다.



점심은 인솔자의 권유대로 카레로 정했다. 갈색에 가까운 일본 카레는 좀 짰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처음 먹어보는 가지카레의 튀긴 가지 맛이 고소하다. 어미한테 계산을 해 보라 해서 엔화를 들고 주인에게 내밀며 한 마디, 기어드는 목소리로 아리가또 고자이마시다! 한 마디를 해 본다. 이렇게 쑥스러울 수가!

가게 앞에서 기념사진을 빼먹을 수 있겠는가, 아이의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한 그건 있을 수 없는 일! 사뿐, 몇 컷인가를 찍고 이별의 시간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떼어 놓는다.



난바에서 우리는 헤어지기로 했다. 공항에서 헤어지면 즙(눈물)을 짤 것 같고, 즙을 짜며 터벅터벅 홀로 집에 가느니 환승역에서 헤어지는 게 나을 성싶었다. 또, 2박 3일 동안 우리를 인솔하고 다니느라 수고한 아이에게 다음날 출근을 위한 쉼이 필요하기도 할 것이기에, 공항까지는 우리끼리 해 보기로 했다. 행렬만 따라다니면 괜찮을 거라고.

아이는 맘이 안 놓인다며 난바에서 전철에 올라 망설였지만 우리는 아이의 등을 자꾸 떠밀었다.

"우리끼리 할 수 있어, 얼른 가렴!"


우려와 달리, 짐을 부치고 하는 일련의 출국 절차를 차근차근 다 밟을 수 있었다. 올 때와 달리 갈 때는 까다롭기가 덜하다. 한적한 면세점 선물가게에 들렀다. 현금을 안 받는다기에 다른 가게에 갔는데 기다란 줄이 있어 따라갔더니 주문하는 키오스크다. 알고 보니 주문 따로 결제 따로 선물 수령 따로인 시스템! 이건 관광객의 인내심을 시험하려는 시스템 아닌가? 답답해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결제줄에서는 한 직원이 창구번호표를 나눠준다. 비어 있는 곳에 차례대로 가면 될 것을 번호표는 왜 주는 건지...... 결제하고 선물 교환권을 받아 인파를 뚫고 선물 수령하는 코너에 가 번호가 뜨길 기다려 선물을 받아 든다. 에효..... 이런 면세점, 두 번은 이용 못하겠다. 이렇게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시스템을 왜 개선하지 않는지. 이 모든 불편함을 무릅쓰고도 일본을 찾는 관광객들이 이렇게도 많은 이유는 무언지. 그것이 알고 싶다, 정말.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어 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할 수 있을까 우려했는데 아무런 언급이 없는 걸 보니 이륙에 지장 없는 모양이다. 활주로의 풀밭을 휘젓고 다니는 바람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풀파도는 끊임없이 저 머나먼 곳으로 달음질쳤다가 되돌아오곤 한다. 순조로이 잿빛 구름 사이로 이륙한 비행기가 우리나라의 영공 어디쯤에선가, 노을을 만났다. 노을에 비낀 구름의 파노라마에서 하나님을 떠올린다. 천지창조를 마치신 날 보시기에 좋았노라시던 노을이 지금 저기에 있구나 싶다. 노을을 머리에 인 구름길을 날아 무사히 땅을 밟았을 때,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히 우리나라에 도착함을 감사, 감사드리며 이국땅에 두고 온 아이의 남은 날 동안도 지켜주시기를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어미! 짧지만 강렬한 2박 3일의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방문기를 마무리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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