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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고 싶은 하루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겠네!

by 나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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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중 전화벨이 울린다. 모르는 전화번호! 잠시 망설이다가 받았다. 요양 팀장으로부터 온 것으로, 오늘 4층의 요양실 커튼을 교체하고 싶으니 커튼을 있는 대로 달라는 용건이다. 선임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내게 전화한 거라 말하며 언제쯤 도착하냐 묻는다. 혼자 일하는 날인데 커튼까지 세탁하려면 바쁘겠는걸......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광속으로 가운을 갈아입고, 승강기에 대기하고 있던 햄퍼를 끌고 와, 각각의 세탁물들을 세탁기에 나눠 넣고 작동 버튼을 누른다. 네 대의 세탁기가 굉음을 내지르며 요란스레 돌아가고, 간단한 청소를 하려는데 요양팀장님이 웨건을 끌고 왔다. 린넨실에 있던 커튼을 모두 내주는데 무언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선임한테 먼저 전화를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전화를 안 받는다는데, 쉬는 날, 이른 아침부터 전화하기도

그렇고.’

요양팀장은 불안해하는 내게 다 가져가도 아무 문제없을 거라며 안심시켰다. 그녀는 커튼을 내려보내는 족족 세탁, 건조해서 곧바로 올려 주었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주고 올라갔다.

"네, 알겠습니다!"

흔쾌히 대답을 해 놓고 보니 아차 싶은 게, 시간대 별로 해야 할 임무는 생각지 않고 주문 이행에만 골몰한 것이었다. 2차 세탁물 수거하러 갔을 때, 커튼조차 빨래조차 그득그득 담긴 4층의 세탁물을 보니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눈알이 핑핑 돌 지경으로 평시보다 세 배 정도 바쁘게 움직여야 했고, 드디어, 커튼을 건조해야 할 즈음, 건조 시간도 물을 겸 하여 선임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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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이하 선생님을 줄여 샘이라 씀), 4층 요양팀장님이 아침에 전화했었는데요, 샘 전화가 꺼져 있어서 저한테 전화를 했다네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건조 시간을 물으려 했으나, 선임은 전화한 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말끝을 잡고 놔주질 않는다.

“그래요? 샘 번호는 어떻게 전화번호 알았대요?”

“저도 잘 모르지만, 아마 사무실에 물어본 것 같아요.”

“그 시간에는 사무실 사람들 출근 전일 텐데. 그리고 나는 전화기를 꺼 놓은 일이 없었는데, 그 선생님 참 이상하시네. 꼭두새벽부터 전화해서는.”

커튼을 모두 내주었다는 얘기를 했더니, 선임의 언성이 높아졌다. 레이스 덧댄 커튼은 예비용으로 남겨 놓아야 하는데 전부 올려 보냈느냐고 질책했다. 일전에 일러 주었다는데 기억도 없고, 기억이 나도 몽땅 달라는

팀장님의 입김이 너무 셌다. 그래도 장이니 장의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시바삐 커튼 교체를 마치고 싶어 하는 요양팀장님에게 커튼 교체는, 누가 뭐래도 맘먹은 김에 해치워야 하는 지상 최대의 사명인지도 몰랐다.


“커튼은 좀 덜 말라도 되니 만져 봐서 꺼내세요. 그리고 샘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는지 꼭! 물어보세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알 만하니 알았겠지, 한 직장에서. 샘은 왜 이리 민감하게 굴으실까.) 샘

전화번호는 공유를 안 했는데, 참 이상하네. 그 팀장님도 그렇지, 다른 빨래들도 많은데, 그런 계획이 있으면 이삼일 전부터 우리랑 조율을 하는 게 순서지.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머지는 샘이 알아서 하세요!”

선임 샘의 흥분이 내게까지 전달되는 것 같았다. 결코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 온통 마음을 점령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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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면 수건을 싣고 가, 팀장님에게 선임의 지시대로 물었더랬다. 팀장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내 전화번호는 비상 연락망을 보고 알았으며, 커튼은 지금 예비용이 필요 없는 상황이라 다 가져와도 상관없다고, 자기가 선임 샘과 통화할 거라고 고함(고함으로 들렸다) 쳤다. 커튼 교체 날짜를 미리 조율하지 않은 건에 대해서는, 마침 오늘내일 시간이 나, 커튼 교체를 해도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선임 샘에게 전화를 했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고, 요양팀장님은 언성을 높였다. 화나셨어요? 물으니, ‘예’라는 즉답이 묻는 이의 마음을 죽비처럼 후려쳐버린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그 전화를 받지 말아야 했나? 모르는 전화를 받아서 이 사달이 난 건가? 바빠서 숨 쉴 틈도 없는데, 몸은 몸대로 피곤한데, 요양 팀장님은 팀장님대로 화가 나서 씩씩거리고, 선임은 선임대로 난리네. 참 나.....’

커튼 다 되었냐 묻기에 된 것도 있고, 건조 중인 것도 있다, 커튼이 무겁고 폭 또한 넓어서 혼자 접기에는 좀 벅차다, 했더니 팀장은 바로 달 거라 안 접어도 된다며 웨건을 끌고 가지러 왔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선임과 통화를 한다. 선임에게는 한풀 꺾인 기세로 자근자근 설명을 하면서도 썩 기분이 좋지 않은 눈치다.

“두 분 사이에서 제가 너무 곤란하네요, 화 푸세요.”

그럼에도 그녀는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커튼을 싣고 가버렸다. 쌩하니 이는 찬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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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임한테 전화가 왔다. 팀장과 통화를 끝내자마자 내게 전화를 한 모양으로, 같은 질책, 유쾌하지 못한 얘기를 또 한 차례 들었다. 때마침 건조기에서 꺼낸 울 스웨터(이름표조차 없다)가 바짝 쫄아들어 어린애 옷이 되었다고 하소연을 했더니, 샘이 간호부장님께 가져가 상의를 해 보란다. 자기는 몇 차례나 층에서 내려오는 세탁물에 대한 고충(세탁물 분류나 호주머니 검사 불이행)을 갖고 간호부장님을 찾아갔다고, 그러니 이번에는 직접 해결하라고 선을 그었다.

어린애옷이 되어버린 스웨터를 가지고 간호부장님을 찾았다. 대뜸 웃음부터 터뜨리는 그녀! 나는 웃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덩달아 웃으며 어찌해야 좋을지를 물었다. 일단 주인부터 찾은 다음 보호자에게 연락하든지 하자고 간호부장님은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다행히도 4층 목욕조 선생님은 옷의 주인을 금세 기억해 냈다.

어르신 옷을 벗기면서 이 옷은 드라이해야 될 것 같은데 싶었지만 그냥 세탁통에 넣었다는 설명.

“여기서는 그런 것까지 구분 못 해요!”


주인을 찾은 스웨터를 가지고 다시 사무실을 찾았는데, 요양팀장이 간호부장님과 얘기 중이었다. 일련의 커튼 사건을 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득 들었다.

‘그래도 할 수 없지. 그녀는 열성껏 일을 추진한 거고. 선임은 원칙대로 해 주길 바란 거니.’

어르신의 이름을 대며 스웨터를 내밀었더니 다시 한번 잔잔한 웃음 파도가 일었다.

"비슷한 걸 사다 드리면 어떨까요?"

사고의 장본인은 주눅이 들어 조심스레 물었다.

"안 돼요, 그 어르신이 인지가 얼마나 좋은데. 그 어르신은 귀신 같이 알아차려요."

요양팀장님은 대뜸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내일 린스를 가져와 담가 두었다가 늘려 본다고 선뜻

나서 주었다. 간호부장님은 보호자들에게 너무 고급스러운 옷은 피해 달라 부탁드리는데 가끔 이런 경우가

있다며 재차 웃음을 지었다. 어쨌거나 미니어처가 되어버린 옷이 과연 복원이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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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물러나오면서도 개운치 않은 기분. 요양팀장이 간호부장님과 면담한 사실을 안다면 선임은 또 얼마나 할 말이 많을까. 산더미 같은 세탁물을 정리 정돈하면서도 마음은 줄곧 괴로웠다.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말하고 싶어도 입 꾹 다물고 9년쯤 버티어야 하는 곳이 직장인가.

내가 진정 잘못한 건가?’

가만, 이곳에도 헤게모니 싸움이 있나. 나는 뭐야. 중간에서, 일은 일대로 해 놓고 좋은 소리도 못 듣고. 점심시간도 반납하고 40분 일찍 출근하여 선임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게 하려고 아등바등했는데.

아기 옷이 되어버린 스웨터, 선임의 질책, 화난 요양팀장, 간호부장님과 상담하는 요양팀장, 무거운 의료용

커튼과의 씨름......

지우고 싶은 하루의 마무리를 위해,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기(졸면서도 품위를 잃지는 말아야 할 텐데.)와 초저녁의 꿈나라행 티켓이 순서대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괴로운 기억들, 피로야 물러가라, 꿈속까지 찾아오지는 말거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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