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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인가 놀이인가?

Jailbreak

by Jimmy Park

"Culture eats strategy for breakfast." (Peter Drucker)


보고서를 한 장씩 쪼개주고, 검사 맡기 전까지는 집에 보내지 않았다.


"부장, 제가 보내드린 원고 봤어요?"


어느 영화에서 본 장면인데 상당히 낯설게 들렸다.

신문사에서 기자들은 부장한테 '님'을 붙이지 않고 불렀다.

부장의 '장'이 이미 높임말이어서 '님'을 따로 붙이지 않는다고 했다.

말하자면 역전앞의 '앞'을 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게 그렇게 어색하게 들릴 수 없었다.

20년 넘게 대기업에서 일하면서 '직급+님'에 귀가 익숙해졌나 보다.

대리님부터 과장님, 차장님, 부장님, 상무님, 전무님, 사장님, 회장님...

직급 높은 분들께는 님자를 붙이는 게 당연했고

직급 낮은 분들께도 꼭 님자를 붙여서 존중을 표현했다.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어제 새로운 분을 만나 명함을 받았다.

이름만 쓰여있어서 직급을 물어봤더니 아예 직급을 없앴다고 했다.
그냥 원장한테도 '이름+님'으로 부른다고 했다.
LG가 그런 회사였던가? 신기했다.

애당초 직급이란 제도는 왜 만들었을까?

직급은 원래 군대의 계급 문화에서 파생되었다.

군대에서는 명확한 지휘 체계를 위해 계급 구조를 발전시켜 왔고

산업화를 거치며 기업에서 이를 차용하기 시작한 것이 지금에 이른 것이다.

태생적으로 전쟁 상황을 상정하고 만든 제도이기 때문에
직급 체계의 기본 사상은 '명령'과 '복종'이다.
상사는 명령하고 부하는 복종한다.
여기엔 상사가 올바르게 판단하고 결과에 책임진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여전히 그 믿음이 존재할까?
제도라는 껍데기만 남고 신뢰와 책임이라는 본질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중요한 건 직급 자체가 아니라 각자의 역할이다.

처음에 직급은 각자의 역할이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직급을 낮춰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원처럼 일하는 부장, 대리처럼 일하는 임원.

임원 중에 별명이 '김대리', '이대리', '박대리'인 경우가 많았다.

부하 직원을 믿지 못하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 직접 챙겨야 직성이 풀린다.

보고서를 한 장 한 장 보며 디테일을 쪼아야 스스로 일 잘한다고 생각한다.

책임 지려다 보니 불안한 것이다.

이렇듯 직급을 낮춰서 일하는 상사 때문에

과장답게 일하는 과장이, 임원답게 일하는 임원이 일 잘하는 세상이 되었다.

마치 연기파 배우가 좋은 배우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승진하기 위한 좋은 방법은 오히려 직급을 높여서 일하는 것이다.
상상해 보라.
당신이 임원인데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아 가게 되었다.
후임을 정해야 하는데, 후보 두 명 중 한 명은 대리처럼 일하고 한 명은 임원처럼 일한다.
한 명은 세부 디테일에 강하지만 전체를 보지 못하고 혼자 일한다.
한 명은 디테일은 약하지만 전체를 보고 다른 사람들을 리드한다.
누구를 당신의 후임으로 올리겠는가?
대리급 부장? 임원급 부장?
때로는 직급을 높여 상사의 입장에서 일을 바라보는 게 도움이 된다.
중1 수학을 중3의 입장에서 돌아보는 것과 비슷하다.

스타트업은 물론이고, 최근엔 대기업들까지 직급을 간소화하거나 아예 없애고 있다.

호칭이 관계를 정의한다.

그렇게 부르다 보면 무의식 중에 마음의 벽이 서서히 사라져서

직급으로 찍어 누르거나 눌림을 당하는 경우가 줄어들고

종국에는 개인대 개인으로 소통하게 된다.

장점도 많다.

자율성이 늘어나고 억눌렸던 창의성이 되살아날 수 있다.
중간 계층이 없어져 빠른 의사결정도 가능하다.
위계보다는 실력이 중시되어 조직 역량도 극대화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리더십은 더욱 중요해진다.
모두가 공범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책임지는 사람이 분명해야 한다.


제도가 변해도 기업의 본질은 변함이 없다.

사업이라는 전쟁터에서 고객을 만족시키고 싸워 이겨야 한다.

과장님으로 불리든, '이름+님'으로 불리든 그건 제도일 뿐이다.

연차에 상관없이 서로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승리하는 건 아니다.


기업은 이기는 것이 책임지는 것이다.
'이름+님' 부르며 수평문화를 논하는 것은 이기기 위한 수단일 때 의미가 생긴다.
본질과 멀어지면 그저 값비싼 동아리 놀이일 뿐이다.

전쟁터에서 놀이는 지속될 수 없다.
무기만이 살아 남는다.


오늘 당신의 수평문화는 무기인가 놀이인가?


(Newspaper Company, Powered by DALL.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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