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단상] 안톤 체홉, 『세자매』

우리 안의 모스크바를 향하여

by 백조히프 김재민

[문학단상] 안톤 체홉, 『세자매』


- 우리 안의 모스크바를 향해



⏹ 그리움이 머무는 곳, 모스크바


“모스크바로 돌아가야 해요.”
이 단 한마디가 『세자매』 전체를 흔든다. 세 자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말은, 단순히 한 도시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잃어버린 젊음, 품위, 그리고 아직 꺼지지 않은 희망의 은유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모스크바의 거리 위에 머문다.
그곳에는 봄의 햇살과, 고요한 서재의 냄새, 피아노의 잔향이 남아 있다. 그러나 현실의 그들은, 지방의 흐린 공기 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간다.


체홉은 그런 인간의 덧없음과 품위 사이의 간극을 한 줄의 대사로 붙잡는다.
그의 인물들은 절망 속에서도 결코 조롱당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너져도, 무너지는 법조차 아름답다.


⏹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사라지는 것들


장녀 올가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신을 소모한다.
마샤는 사랑 없는 결혼 속에서 ‘살아있음’의 온기를 잃고,
막내 이리나는 노동 속에서 구원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그곳에서도 자신이 점점 메말라감을 느낀다.


그들 곁에선 오빠 안드레이가 꿈을 잃고 도박에 빠져든다.
그의 아내 나타샤는 조용히 집안을 장악한다.
그녀는 촌스럽지만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
몰락하는 귀족의 자리를 대신해, 현실의 새 질서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체홉은 이 모든 변화를 소리 없이 그린다.
삶의 비극은 폭발이 아니라, 서서히 스며드는 침묵 속에서 자란다.
그래서 그의 무대는 언제나 조용하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시대의 울음이 숨어 있다.


⏹ 체홉의 무대에 흐르는 시간의 소리


『세자매』의 인물들은 큰 사건 없이,
그저 흘러가는 계절 속에서 조용히 늙어간다.
한 번의 봄, 또 한 번의 겨울.
그 반복이 바로 그들의 운명이다.


마샤가 사랑을 잃고 울부짖는 장면에서조차
체홉은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그는 대신 군악대의 행진 소리를 들려준다.
그 소리 속에서, 청춘은 천천히 멀어진다.

그럼에도 체홉은 희망을 남긴다.


“언젠가는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될 거예요.”
그 말은 다만 올가의 독백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체홉의 조용한 신뢰의 선언이다.


⏹ 우리 안의 모스크바를 찾아서


오늘, 우리가 체홉을 읽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의 인물들이 품은 ‘모스크바’가 우리 마음속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청춘의 이상일 수도 있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간일 수도 있다.
혹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나 자신’일 수도 있다.


삶이란, 결국 그 모스크바를 향해 걷는 길이다.

우리는 매일 조금씩 잃어가지만,
또 그만큼 조금씩 자라난다.

체홉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절망을 쓰되, 희망의 잔불을 꺼뜨리지 않았다.


⏹ 맺음말 | 백조히프(김재민)


세 자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살아야 해요, 살아가야 해요.”
그 말은 먼 러시아의 눈보라 속에서 들려오지만,
지금 우리의 일상에도 조용히 내려앉는다.


그리움과 체념, 그리고 희망이 공존하는 그 세계
그곳이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스크바일지도 모른다.


◆ 작가 프로필


김재민 사진(2014).jpg

백조히프(김재민), 경영학 박사, 전 경성대학교 교수


‘인문학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는 글’을 쓰며,

경제 경영·문학·역사·철학·예술교양을 넘나드는 사유의 지평을 탐구합니다.

현재 브런치에서 《세계명작 단상 시리즈》를 연재 중이며,

크몽에서는 『러시아 문학』, 『독일 문학』, 『프랑스 문학』,『영미 문학』, 『한국 문학』 등

e-Book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네요.

언제나 인간의 내면을 통해 시대를 읽고, 시대를 통해 인간을 해석한다는 신념으로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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