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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Jun 14. 2022

엄마였던 아기

치매 환자 돌봄 가족 이야기

  “어서 일어나, 그냥 –썩- 일어나면 돼.”

  “아이 귀찮아”

 


   아침마다 조용조용 깨우는 엄마와 반어리광, 짜증이 섞인 나의 대답뉴스 시작 부분의 시그널처럼 반복되었다. 캄캄한 겨울 새벽, 엄마는 곰국을 끓여 아침상을 차려 내 머리맡에 놓았다. 그리고 나를 깨우셨다. 겨우 눈을 뜨고 세수하고 밥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밥을 먹는 동안 엄마는 내 등 뒤에 앉아 고데기로 머리를 고동처럼 말아주셨다. 머리 손질하는 시간을 아껴 조금 더 자라고 배려해주신 것이다. 등 떠밀어 다니는 직장도 아니었다. 나 좋아서 다녔는데 왜 아침마다 엄마를 힘들게 했었는지.


  돌이켜보면 엄마는 당신의 삶이 신산(辛酸)스럽고 팍팍했다. 그러나 자식에 대해서만은 유럽 어느 나라 공주 못지않게 대접하신 듯하다. 지금 엄마는 이 세상의 기억을 하나하나 버리고 점점 가벼워지시는 중이다. 여러 가지 기억들이 엄마를 떠나갔다. 아파트 출입문의 비밀번호를 몰라 출입 카드를 목걸이로 만들어 걸고 다니신다. 출입 카드를 전자센서에 접촉해야 한다는 습관조차도 잊은 지가 꽤 된다. 이른 아침과 초저녁의 어스름을 구별하지 못한다. 저녁에 주간보호센터 가실 준비를 하고 나가 통학차를 기다리기도 하신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발견하고 집에 데려다주셨다.


  당신의 아들, 딸 다섯을 키우셨다. 그 아들과 딸의 아이들 여섯을 또 키우셨다. 맞벌이하는 딸과 며느리를 대신하여 손자와 손녀를 키우신 것이다. 식구들은 엄마를 육아 전문가라고 말하며 웃었다. 자신이 키운 손녀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을 때, 손녀사위는 할머니께 육아를 부탁하고 싶다고. 농담 반 진담 반인 듯 말을 하며 웃었다. 그 엄마가 이제 역할을 바꾸어 놀이하는 연극처럼 아기가 되어가고 있다. 치매라지만 주변 사람을 번잡하고 고생스럽게 하는 괴팍한 습관은 없다. 말이 없다는 것이 증상이다. 간단히 말하면 자신이 키운 자식, 손주들처럼 아기가 되었다. 얼마나 말을 하지 않았던지 이제는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이곳이 아닌 먼 어딘가를 여행하고 있는 듯한 엄마. 아기가 된 엄마를 위해 내가 하는 일은 간단하다. 하루 두 번, 아침과 저녁 간단한 샤워를 해드린다. 샤워 후에는 새 옷으로 갈아입힌다. 작고 여윈 몸이라 샤워 후 감기가 들면 안 되니까 최대한 빨리 옷을 입혀드린다. 씻은 후 많이 힘드실 것이므로 따뜻한 물 한 잔을 드시게 하고 소파에 누인다. 머리가 젖어 있으면 감기에 걸릴 수 있으므로 헤어드라이어의 따뜻한 바람으로 빨리 말려드린다. 깨끗해져서 소파에 누워 있는 ‘엄마였던 아기’를 보면 인형 놀이를 하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어릴 때 바비 인형을 사서 씻기고 닦이고 자투리 천을 잘라 옷을 만들어 입혔다. 엄마 옷을 만들기 위해 바느질을 한 적은 없으니 인형 놀이보다 수월하다. 식사할 때에는 아기처럼 턱받이를 해주고 입 짧은 아이 먹이듯 골고루 반찬을 올려드린다. 이런 일들은 전혀 힘들지 않다.

  

  기억 보따리들을 하나, 둘 던지고 어디로 가려는 듯한 엄마 때문에 힘든 일도 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어른다운 조언을 해줄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현명한지, 어떤 판단을 하면 더 기뻐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선물 받을 사람을 모르면서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처럼 느껴진다.


  젊은 시절 엄마는 펄펄 끓는 물에, 여리고 착하게 생긴 면을 넣었다. 하얀 거품이 냄비 뚜껑을 밀어 올리고 넘치려고 할 때마다 찬물을 조금씩 탔다. 탱탱하게 잘 익은 면발을 미리 받아둔 찬물에, 한 번에 쏟아붓고 찰랑찰랑 씻어냈다. 국수 면발은 투명하게, 차게, 소녀의 세수한 맨얼굴 같이 바뀌었다. 씻은 면을 동그랗게 사리를 만들어 내 입에 먼저 넣어주셨다. 뜨거운 물을 능숙하게 다루던, 멸치로 육수를 낸 국수를 만들어주시던, 믿음직하고 큰 나무처럼 기댈 수 있는, 엄마는 없다. ‘엄마였던 아기’가 고른 숨을 쉬며 뜨거운 물을 견디고 나온, 찬물에 씻기워진 면발처럼, 소녀처럼 평화롭게 누워 있다. 보송해진 엄마 곁에 누워 잠든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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