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
빛을 따라 걷다. 인상주의에서 초기모더니즘까지,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에서 빛을 따라 걷다.
겨울 공기가 아직 마르지 않은 아침이다. 나는 용산으로 향한다.
서울 안에서의 이동이지만, 이날만큼은 마음이 여행자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
뉴욕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소장
로버트 리먼 컬렉션이 한국에 건너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오래전 여행 계획을 세우듯 전시 일정을 캘린더에 적어두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나를 멈춰 세운 것은 Vincent van Gogh의 〈꽃 피는 과수원〉이다.
꽃은 피어 있는데, 그 풍경은 고요하지 않다.
붓질은 파도처럼 밀려왔고 하늘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나는 그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봄은 계절이 아니라
어쩌면 마음이 흔들리는 상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옆으로 걸음을 옮기자 Pierre-Auguste Renoir의
〈피아노를 치는 두 소녀〉가 있다.
빛은 다정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소녀의 어깨에 내려앉고 연주하는 손끝을 감싸 안는다.
나는 문득 딸아이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피아노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던 그 시간들. 빛은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나는 그때 그것을 ‘빛’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전시장은 과거의 기억까지 함께 조명하는 곳이다.
Paul Cézanne의 〈목욕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느낌이 달라진다.
감정이 아니라 구조. 따뜻함이 아니라 단단함.
형태는 분해되고 다시 세워진다. 빛은 부드럽게 감싸지 않는다. 대신 묵직하게 공간을 지탱한다.
나는 그 앞에서 ‘변화’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인상주의가 순간을 붙잡는다면, 세잔은 시간을 해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회화는 모더니즘을 향해 걸어간다.
Paul Gauguin의 타히티 여인들은 현실을 벗어난 색으로 나를 바라봤고,
Salvador Dalí의 〈레이스를 뜨는 여인〉은
과거의 명화를 다시 불러내 기억을 흔든다.
빛은 더 이상 자연을 묘사하지 않는다. 빛은 해석이 되고, 질문이 된다.
그림 앞에서 나는 문득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는 빛이 좋은 자리를 좋아했다.
부엌 창가, 빨래를 널던 마당 한쪽, 해가 기울 무렵 마루 끝.
그때는 그것이 단지 햇살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늘 빛 가까이에 서 있었다.
나는 그 빛 속에서 자랐다.
하지만 정작 엄마의 얼굴을 오래 바라본 기억은 많지 않다.
너무 일찍 떠난 사람은 사진보다 공기처럼 남는다.
르누아르의 따뜻한 색조를 보고 있자니
엄마의 웃음이 빛처럼 번져왔다.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
사라졌지만 여전히 나를 감싸는 것.
그날 전시장에서 나는 처음으로 깨닫는다.
빛을 본다는 건 어쩌면 기억을 다시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전시장을 천천히 걸었다.
인상주의에서 시작해 후기 인상주의를 지나 초기 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길.
그 흐름은 낯설지 않다. 마치 내 삶과도 닮아 있다.
젊은 날에는 순간이 전부였고, 중년에는 감정이 깊어졌으며,
지금은 구조를 본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낼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이번 국립중앙박물관 인상주의 특별전은
명화를 ‘보는’ 자리가 아니라 빛이 변해온 시간을 ‘걷는’ 자리였다.
서울 전시 추천을 묻는다면 나는 이 전시를 조용히 권하고 싶다.
빛은 여전히 변하고 있고,
우리는 그 변화를 따라 살아가고 있으니까.
전시장을 나오며 나는 문득 생각한다.
여행이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결을 바꾸는 일이라면,
빛을 따라 걸어본 특별전에서 나는 빛을 따라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온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