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침묵전략

"그냥요." "몰라요." "모르겠는데요."

by 김경은

요즘 아이들의 감정 어휘집

"오늘 기분이 어때?""그냥요."

"뭐가 속상했어?""몰라요."

"왜 화났어?""싫어요."

혹시 이런 대화, 익숙한가?


요즘 아이들과 대화해보면 이런 대답 들을 자주 듣게 된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감정 표현을 못 하는구나' 생각하기 쉽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이것이 단순한 무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정말로 아이들은 감정이 없는 걸까? 아니면 감정을 표현할 '안전한 언어'가 없는 걸까? 혹은 또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


《나의 아저씨》 이지안의 침묵 전략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이지안(아이유)을 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녀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특히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힘들지?""괜찮아요."

"뭐가 필요해?""없어요."

"어떻게 지냈어?""그냥요."

처음에는 이지안이 감정이 메마른 아이처럼 보인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다 보면, 이 아이는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전략적으로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있다.

이지안의 침묵은 정말 순수한 자기 보호일까?

드라마를 자세히 보면, 이지안은 자신의 침묵을 통해 박동훈과 그의 가족들을 통제하기도 한다.

그녀가 아무 말 하지 않을 때, 어른들은 더욱 걱정하고, 더욱 신경 쓰게 된다.

침묵이 방어이면서 동시에 권력이 될 수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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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이들의 "체념"과 "전략"

한국 아이들의 반응을 보면 크게 두 가지 패턴이 있다:

1. 체념형 반응

"어차피 말해도 소용없어"

"어른들은 이해 못 할 거야"

"뭘 해봤자..."


2. 전략형 반응

"내가 아무 말 안 하면 더 관심 가져줄 거야"

"괜찮다고 하면 뭔가 해줄 거야"

"모른다고 하면 그만둘 거야"


문제는 이 둘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말로 체념하면서 동시에 그 체념을 전략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진짜로 힘들면서 동시에 그 힘듦을 어른들을 움직이는 도구로 활용할 수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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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의 만능 대답: "모르겠는데요"

"왜 그렇게 말했어?""모르겠는데요."

"기분이 어땠어?""모르겠는데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모르겠는데요."

이 "모르겠는데요"라는 말을 요즘 아이들이 정말 많이 쓴다.

어른들은 이것을 듣고 답답해한다.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말하기 싫은 거야?"

사실은 둘 다일 수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복잡한 의미들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한국 아이들의 "모르겠어요" 스펙트럼

한국 아이들의 "모르겠어요"를 자세히 들어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다:

1. 진짜 모를 때의 "모르겠어요"

목소리에 당황함과 혼란이 섞여 있음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하려는 모습

"정말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2. 말하기 싫을 때의 "모르겠어요"

단호하고 무표정한 톤

눈을 마주치지 않거나 다른 곳을 봄

"모르겠는데요." (끝)


3. 시험할 때의 "모르겠어요"

약간 도전적인 뉘앙스

상대방 반응을 살피는 눈빛

"모르겠는데요? 그래서요?"


4. 책임 회피할 때의 "모르겠어요"

빠르고 자연스럽게 내뱉음

이미 연습된 듯한 능숙함

"모르겠어요" + 어깨 으쓱


《굿 윌 헌팅》: 지능적인 무지 연기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윌이 여러 상담사들을 만나는 장면들을 보면, 상담사들은 윌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관점에서 윌의 상황을 해석하려고 한다.

이때 윌의 "모르겠다"는 답변은 이런 일방적 해석에 대한 저항이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뻔한 이야기로 나를 재단하지 마세요'**라는 메시지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윌이 정말로 모르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윌은 천재다. 그는 상담사들의 심리를 꿰뚫어보고 있고, "모르겠다"는 말을 전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윌의 "모르겠다"는:

진짜 대답하기 싫음 30%

상담사들 시험해보기 40%

상황 통제하려는 욕구 30%

이런 복합적 의도가 담겨 있다.


한국의 "체면" 문화와 "모르겠어요"

한국 문화에서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때로는 체면과 관련이 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그건 제가 잘 모르는 분야라서요" (실제로는 알지만 책임지기 싫음)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의견이 있지만 갈등 피하고 싶음)


아이들도 이런 문화를 학습한다:

"모르겠어요" = 안전한 답변

확실하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

틀릴 바에는 차라리 모른다고 하자

하지만 이런 "안전한 무지"가 때로는 책임 회피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디지털 세대의 선택적 무지

요즘 아이들에게 "모르겠어요"는 단순한 무지의 표현이 아니다. 정보 과부하 상황에서의 **'선택적 무지'**일 수 있다.

디지털 환경에서 학습한 것들:

너무 많은 정보 → 선택적으로 모르는 것이 생존 전략

모든 말이 기록됨 → 확실하지 않으면 말하지 않기

온라인에서 틀리면 공격받음 → "모르겠다"가 안전한 답


온라인에서의 "모르겠어요" 변형들:

"잘 모르겠어요 ㅠㅠ" (귀여움 어필)

"모르겠는데요?" (약간 공격적)

"몰라 ㅋㅋ" (무관심 어필)

"모르겠어요... 도와주세요" (도움 요청)


관계적 맥락에서의 "모르겠어요"

감정은 언제나 관계적이다. 해석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감정의 의미가 달라진다.

아이의 "모르겠어요"를 들었을 때:

신뢰하는 사람 앞에서는 → "정말 복잡해서 모르겠어. 도와줘"

불신하는 사람 앞에서는 → "당신에게 말할 이유가 없어"

권위적인 사람 앞에서는 → "말하면 더 문제가 될 것 같아"

관심 받고 싶은 사람 앞에서는 → "내가 모른다고 하면 더 신경 써줄 거야"

같은 말이지만 완전히 다른 의미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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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성을 인정하는 지혜

결국 아이들의 "그냥요", "몰라요", "모르겠어요"는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정말로 복잡해서 설명할 수 없어요"

"말해도 이해받지 못할 것 같아요"

"일단 나 혼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요"

"당신이 듣고 싶어 하는 답과 내 진짜 감정이 달라요"

"내가 모른다고 하면 더 관심 가져줄 거죠?"

이 모든 것이 짧은 한 마디에 담겨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복잡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침묵을 무조건 순수한 방어로만 보지도 말고, 무조건 조작으로만 보지도 말아야 한다.

침묵도 하나의 완전한 답이다. 하지만 그 답 안에는 순수함과 전략이, 진심과 계산이, 상처와 조작이 함께 들어있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정서의 무자비함이다.

감정이 단순하지 않고, 선악으로 나누어지지 않으며, 때로는 자기중심적이고 때로는 타인을 이용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무자비함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일부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더 진실한 관계가 시작될 수 있다.



책제목: 정서, 이 무자비한 녀석!


다음 회예고:

이렇게 1장이 끝나고 2장이 시작된다. 감정 교육이 대세가 된 시대의 역설적 현실을 다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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