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에서
지금까지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감정을 무시하고 억압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정서라는 '무자비한 녀석'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정서의 무자비함은 방향을 가리지 않는다.
때로는 어른에게서 아이로, 때로는 아이에게서 어른으로, 때로는 같은 또래끼리도 흘러간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더 복잡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아이들도 자신들의 감정을 무기로 어른들을 당황하게 만들기 시작했고, 어른들은 아이들의 감정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아이들의 역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이것도 역시 인간이 가진 정서의 무자비함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는 것일까?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윌(맷 데이먼)이 상담사들에게 하는 행동을 다시 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윌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상담사들의 약점을 공격한다.
상담사의 사진을 보고 그의 결혼 생활을 분석하거나, 개인사를 추측해서 상처를 준다. "당신 아내가 죽기 전에 바람피웠다는 거 알고 있었나요?"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윌의 이런 행동은 정당할까?
윌은 분명히 상처받은 아이다. 버림받고, 학대받고, 이해받지 못한 채로 자랐다. 하지만 그 상처가 다른 사람을 공격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윌은 자신의 고통을 방패로 삼아 타인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다. 상처받은 자가 보여주는 또 다른 형태의 무자비함이다. "나는 피해자니까 이래도 돼"라는 논리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거다.
한국에는 "한(恨)"이라는 독특한 정서가 있다. 오랫동안 쌓인 서러움과 억울함이 응축된 감정이다. 그런데 이 "한"은 때로는 매우 무자비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고생했는데 너는 왜 편하게 사려고 하느냐“
"내가 못 이뤘던 꿈을 너는 반드시 이뤄야 한다“
"내가 받은 상처를 너도 느껴봐야 안다"
이런 말들 속에는 진짜 아픔과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 아픔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한"도 무자비할 수 있다는 거다.
드라마 《소년심판》에서 소년범 백성우의 모습도 흥미롭다. 판사 심은석(김혜수)이 "왜 그렇게 화가 났니?"라고 물을 때, 성우는 "화난 게 아니라 그냥 그래요"라고 답한다.
하지만 그의 몸짓과 표정에서는 억압된 분노가 느껴진다. 더 주목할 점은,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범죄를 부인할 때이다. 그는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법정의 분위기를 지배한다.
이때 성우는 정말로 무력한 피해자일까?
성우는 자신의 침묵을 전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어른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무표정함으로써 상황을 통제한다. 그의 침묵은 저항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형태의 권력 행사이다.
여기서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일까? 성우는 분명히 상처받은 아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상처를 무기로 사용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들을 보면, 정서가 얼마나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같은 감정이 동시에 두 가지 얼굴을 보여준다:
1. 진짜 고통과 전략적 활용의 공존
정말로 아프면서 동시에 그 아픔을 이용한다
상처는 진짜지만 그 상처를 방패로 삼는다
2. 피해자성과 가해자성의 동시 존재
누군가에게는 피해자이면서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해자가 된다
같은 순간에 약자이면서 동시에 강자가 될 수 있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송혜교)의 복수를 보면 이런 복잡성이 더욱 명확해진다. 동은의 분노와 고통은 분명히 정당하다. 그녀가 겪은 학교폭력은 끔찍했고, 그 후유증은 평생을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녀의 복수 방식은 어떨까? 가해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 심지어 무고한 아이들까지 고통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동은의 감정은 진짜지만, 그 감정의 표현 방식은 또 다른 무자비함을 낳는다. 피해자였던 그녀가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이것은 동은을 비난하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정서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때로는 무자비한 동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왜 울었어?“
"그렇게 화낸 건 무슨 이유였어?“
"그 말은 진심이었니?"
감정은 언제나 해석의 대상이 된다. 아니, 감정은 해석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다뤄진다. 아이가 울면 어른은 이유를 묻고, 청소년이 분노를 터뜨리면 그 동기를 분석하려 든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감정이 항상 명확한 이유나 목적을 가지고 있을까? 때로는 그냥 '왠지 모르게'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고, '별 이유 없이' 눈물이 날 수도 있다.
문제는, 감정이 이런 방식으로 자주 오해되고 해석당하는 순간,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전략적인 선택이 된다는 점이다.
드라마 《소년심판》에서 백성우를 다시 보면, 그는 선도 관찰관의 질문을 듣고도 대답하지 않는다.
"왜 때렸니?“
"그건 누구 때문이었니?"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단 한마디만 남긴다.
"몰라요."
성우의 무자비함: 그 순간, 그는 가해자일 수도 피해자일 수도 없게 된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해석을 피하고, 정체성을 유보하며, 심판받지 않는 공간을 확보하는 거다.
어른들의 무자비함: "몰라요"라는 대답을 들으면서도 계속 추궁하거나, "정말 모를 리가 없다"며 아이의 답변을 무시하는 거다.
이 침묵은 단순한 방어가 아니다. 기민한 회피 전략이다. 감정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고, 설명이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든 순간, 말하지 않음은 스스로를 지키는 '정서적 비가시화'의 기술이 되는 거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있다. 말하지 않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사건을 '기승전결'로 진술하는 순간이 있다.
영화 《한공주》에서 주인공 공주는 긴 침묵 끝에 자신의 성폭행 피해 사실을 말하기 시작한다.
"친구들하고 놀다가 그 애들이 와서......"
이런 식으로 말이다. 교사는 놀라고, 어른들은 판단한다. 하지만 여기서 놓치기 쉬운 게 있다. 그 말이 온전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공주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둘러싼 사건의 윤곽을 전달하고 있다.
공주의 무자비함: 진실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진실을 어른들이 감당할 만한 형태로 편집해서 전달하는 것. 자신의 보호를 위해서.
어른들의 무자비함: 그 "편집된 진실"을 듣고 "이제 다 알았다"고 생각하면서, 아이가 여전히 숨기고 있는 부분들은 더 이상 묻지 않는 것.
고통은 언제나 말보다 느리다. 그 말이 거짓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 말은 감정과 진실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복잡한 구조를 보여주는 거다.
트라우마 연구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충격적인 경험은 일반적인 기억과는 다른 방식으로 저장된다고 한다. 트라우마 기억은 파편화되고, 시간적 순서가 뒤바뀌며, 감정과 인지가 분리된다.
이는 상담 현장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내담자가 일관성 없는 이야기를 하거나 논리적이지 않은 반응을 보일 때, 그것을 단순히 '거짓말'이나 '조작'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그 말은 진심이었니?"라는 질문은, 감정이 감정으로 받아들여지기보다 '사실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상태로 만든다. 이 구조가 바로 정서적 무자비함의 핵심이다.
감정은 그 자체로 정당해야 한다는 압력 아래서 끊임없이 입증되고 평가받는다. 마치 감정도 법정에서 증거처럼 검증받아야 하는 것처럼.
결국, 감정은 사회적 상황과 관계적 권력에 따라 언제나 전략화된다. 말하지 않음은 저항일 수 있고, 말함은 회피일 수 있다.
문제는 감정을 '진의'의 문제로만 다루는 이 사회가 말하지 않은 자를 의심하고, 말한 자를 또 의심하는 이중 구조를 갖고 있다는 거다.
감정은 느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게 되었다. 설명하지 못하면 이해받을 수 없고, 이해받지 못하면 제거된다.
이런 복잡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을 선악으로, 피해자와 가해자로 깔끔하게 나누고 싶은 유혹이 있지만, 실제 인간의 감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아이들의 감정 표현이 때로는 순수한 감정이 아니라 전략적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뒤에 숨은 진짜 상처와 필요를 놓치지 않는 거다.
동시에 어른들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며, 자신들 나름대로의 상처와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거다.
하지만 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이 있다. 바로 '인식' 자체가 변화의 시작이라는 거다. 정서적 무자비함의 구조를 이해하면, 그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굿 윌 헌팅》에서도 결국 윌은 숀이라는 진정한 어른을 만나면서 변화한다. 숀은 윌의 공격을 받아내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상처도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렇게 진정한 만남이 시작되는 거다.
정서의 무자비함을 인정하는 것이 정서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무자비함 속에서도 여전히 가능한 연결과 치유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거다.
우리는 모두 때로는 피해자이고 때로는 가해자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출발점에 설 수 있다.
정서는 무자비하다. 하지만 그 무자비함을 함께 견뎌낼 때, 우리는 조금 더 성숙해질 수 있다.
다음 회에서는 감정이 어떻게 무기화되고, 왜 모든 참여자가 손해를 보는 '네거티브섬 게임'이 되어버렸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상처받았어요"가 만능 카드가 되어버린 시대의 진짜 문제는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