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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들아빠 Aug 18. 2024

여자라서 우울증이 오는 게 아니라 주양육자라서 온다

아들 15개월 16일(475일)

여자라서 우울증이 오는 게 아니라 주양육자라서 우울증이 온다.


나는 어릴 적 우리 엄마를 기억한다.

짜증과 화가 많았다.

며칠에 한 번 몸져누웠다.

집안일이 끝이 없었다.

할아버지와 고모도 함께 살았다.

아빠와 동생까지 가족 6명의 살림을 엄마가 했다.

나는 어린 나이에 엄마가 힘들어 보여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사서 드렸던 기억이 있다.

정확한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행복을 찾는 100가지 이야기” 이런 책이었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매정했다.

네가 엄마를 가르치려 드냐고 화를 냈다.

울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결국 그 책은 내가 가져와 읽었다.

그 책이 아직 부모님 댁 책꽂이에 있는데 읽어보셨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30년 전 일을 꺼내서 무엇하랴..

엄마는 어린 나의 말을 들을 여유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엄마를 지금도 나는 사랑한다.

그러나 엄마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이런 엄마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이유는 내가 내 아이의 주양육자가 되면서 나도 우리 엄마처럼 됐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나 첫 세 달을 와이프가 돌보고 100일쯤 복직했다.

나는 출산하는 날부터 한 달간 육아휴직을 썼고 복직해서 두 달 더 일하다가 와이프 복직에 맞춰 퇴사했다.

첫 세 달 동안은 와이프가 우울증에 걸려 자주 울었는데 복직하고선 싹 나았다.

와이프가 복직한 후에는 내가 우울증에 걸렸다.

심할 때는 일주일 내내 육퇴 후 소주 한 병씩 먹었다.

내가 출산을 한 것도 아닌데 그리고 난 남잔데 무슨 우울증이냐 싶었다.

나는 여자들이 예민해서 출산 후 우울증에 걸리는 줄 알았다.

아니면 호르몬의 변화로 일시적으로 겪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게 생각한다.


여자라서 우울증에 걸린 게 아니다.

엄마라서 우울증에 걸린 게 아니다.

출산해서 우울증에 걸린 게 아니다.


누구라도 육아를 하면 우울증에 걸린다.


아무튼 내가 우리 엄마처럼 됐다는 말을 하던 중이었는데 나도 육아를 하는 동안 와이프에게 툭하면 화를 내고 매사에 짜증 투성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왜 이렇게 꼴 보기가 싫은지..

또 왜 엄마가 되어서 아기에게 관심이 없는지..

(당연히 주양육자의 주관적인 생각이다.)

쉬는 날에 아이랑 더 놀아줬으면 좋겠는데 쉬는 날이라고 친구들 만나러 간다고 나가면 집에서 혼자 아이를 보느라 승질이 또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벼르고 있다가 며칠 뒤 사소한 일을 트집 잡아 화를 내기도 하고 육아 안 하겠다 취직하겠다 엄포를 놓기도 하고 내가 어릴 적 보았던 엄마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갔다.

나는 또 여자가 아니라 남자이다 보니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면 와이프는 얼마나 곤혹스럽고 무서웠을까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미안하고 창피한 일이다.


육퇴 후 찾아오는 고독감과 우울감은 말로 다 표현을 못한다.

하루종일 아이를 안고 있다 보니 온몸은 쑤시고 신생아 때부터 겪은 수면부족은 나를 더욱 예민하게 만든다.

아이가 몇 살이 되면 내가 다시 취직을 해야 할까.

그때 가서 내가 일할 곳이 있을까.

배달을 해야 하나.

택배를 해야 하나.

청소를 해야 하나.

경비를 해야 하나.

나를 써주기나 할까.

육아를 하면서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온라인으로 물건을 팔아볼까.

주식이나 코인 투자를 해볼까.

기술을 배워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결국엔,

나는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내 인생은 이제 끝인가.

아빠가 육아라니.

나만 희생하나.

어쩌다 이렇게 됐지.

부정적인 생각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걸 이겨내려고 배달음식을 시킨다.

스스로 이겨낼 힘이 없다.

술과 야식으로 스스로를 달랜다.

그렇게 술기운에 잠을 청한다.

다음날 숙취로 육아는 더 힘들어진다.

아들은 일어났다고 아빠를 깨우는데 푹 자지도 못한 아빠는 미안함과 동시에 원망하며 일어난다.

야식으로 달랜 마음에 여유가 좀 생겨 그걸로 버틴다.


우리 엄마는 뭐로 버텼을까.

술도 안 드셨는데.

주양육자가 되어 우울증을 달고 살다 보니 엄마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여자라서 우울증이 오는 게 아니라 주양육자라서 우울증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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