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중에 20분을 정진하는 시각입니다. 20분을 하나의 통시간으로 생각하여 시간이 아니라 시각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른 시각에 108번 절을 올리는 의식은 부처님을 만나는 시각이기도 하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의식이기도 합니다. 지난 9년간 이처럼 아침을 맞아 108번 절을 올리면서 한번 두번의 절 올리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곤 합니다.
절을 하면서 점이 모여서 선이되고 선을 쌓으면 면이되며 면을 겹겹 올리면 팔면체의 공간이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동시에 시간은 초를 모으고 분을 쌓아서 1시간을 만들고 24개의 시간기둥이 되어서 하루를 살게 합니다. 24시간동안 절하지 못하지만 24시간내내 숨쉬고 심장은 쿵쾅거리며 혈류를 보내고 정맥의 피를 받아서 정화하고 다시 동맥으로 영양과 산소를 공급한다 배웠습니다.
아마도 인간의 영혼은 끊임없는 생각을 내보내고 받아들이고 있을 것입니다. 그 영혼이 관리하는 생각이라는 것을 잠시 108배 절하기의 20분에 응축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루의 생각은 24시간동안 움직이고 생각하고 잠자는 모든 것이 쌓여가는 것이라면 108배는 그날 하루 24시간의 108배가 넘는 생각과 상상과 관념을 자신의 머리속에서 만나게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절을 하면 상상을 합니다. 배를 올리면 자신의 과거로 돌아갑니다. 아마도 더더 많은 절을 올리면 전생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절을 하면 어린시절의 가족이 떠오르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했던 유년의 기억이 동영상이 되어 나타나고 그 안에서 평화롭게 놀고있는 아이를 보게 됩니다. 그 아이가, 아이들이 자신의 다양한 어린시절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는 50일이내에 모든 세포구성부분이 바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50일이 정확한 것은 아닌줄 압니다만 뼈, 근육, 혈액 등 모든 구성부분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되어서 얼굴이 변하는 것 이상으로 바뀐다는 말입니다. 산은 그산이로되 물을 그 물이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의 화두는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도심의 군상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아침 그 길을 채웁니다만 어제의 그사람이 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새로운 인물이 지나가는데, 멀리서 보면 어제의 그모습이나 오늘의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군상은 같은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소가 사람을 보면 그사람이 그인간이고 어린이가 소를 보면 그 소가 그 송아지인듯 보인다는 말과 같습니다. 고공을 지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모습은 늘 같은 듯 보이지만 그집과 건물에 사는 이들은 매일매일 변하고 있습니다.
도심의 수많은 간판 주인이 어제의 그 주인이 아닙니다. 하루에도 수백개의 점포주인이 바뀌고 중고차를 팔고사는 이가 얼마이며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다가 어느새 불행을 느끼는 이도 참으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순간 108번 절하는 자신도 변하고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조금전 자신에서 조금 후 자신으로 바뀌고 있음을 알라고 말합니다. 화두라고 합니다. 고승의 말씀에서 '끽다거'란 '차나 한잔 하시게'입니다. 차마시고 가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정말로 진리를 말하는 방에 다른 장식이나 의전이 불요하다는 말입니다. 차 한잔 하라는 말속에 세상의 이치를 모두 담은 듯 여깁니다. 하루를 살고 108번 절을 하고 다시 마음을 정리해 보아도 인간사 살아가는 이치에 대한 깨달음이 부족합니다. 알지 못합니다. 왜 신은 우리 인간에게 80년의 삶을 주시면서 생각은 800년이나 되는 듯 더 깊고 길게 베푸셨을까요.
차한잔 마시고나면 빈잔만 남을 일인데 바닷속 수조마리의 물고기는 같은 모양 같은 크기로 만드시고, 신은 어찌하여 인간만은 다양한 얼굴, 성격, 생각을 하도록 창조한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수천의 병아리가 각각의 얼굴에 다름이 있는데 인간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동물이 인간을 보면 모두가 같은 모양, 모습의 얼굴일까요.
20분동안 108번 절을 하면서 다가서지 못하는 화두와 법문을 가슴에 새긴채 절을 마치고 돌아서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마도 이를 참선이라 할 것이라 상상해 봅니다. 하지만 도저히 다가서지 못하는 부처님의 마음의 깊이를 느끼며 오늘 하루를 기쁘게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