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원짜리의 진료는 어떤 것일까
구내염이 유행할 때의 이야기이다. 구내염은 법정 감염병인 수족구병과 감염원이 겹치는 부분이 있어, 구내염만으로는 법정 감염병이 아니지만, 대부분의 기관에서 수족구병과 격리 기준을 같이한다. 그 말은 즉슨, 기관에서 의사의 등원소견서를 요구한다. 절차 한 가지가 추가됨에 따라 엄마들은 기존에 감기와 달리 약 먹고 좋아지는 듯하면 보냈던 원을 어쨌든 병원을 다시 와야 했다. 빨리 보내고 싶은 엄마들은 매일 오기도 했다.
"목만 잠깐 한번 봐주세요."
구내염 진단 후 경과를 보러 온 6세 오빠의 진료를 보러 온 남매의 어머니가, 오빠의 진료가 끝나자 여동생을 무릎에 앉히며 말했다. 예약접수가 어려워서 남매 중 한 명만 접수하고 진료실에서 다른 형제자매의 진료를 보는 일은 흔한 일이어서, 그런 경우라고 생각했다.
“네, 동생 이름이 뭘까요?”
"목만 볼 건데, 접수해야 돼요?"
"네 어머님, 제가 진료기록도 봐야 하고 차팅도 해야 돼서.."
"설마 목만 보는데 진료비 받아요? 목만 볼 건데요. XX야 일루 와. 목만 볼 거야."
귀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내 말을 자르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엄마의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입만 보는데 진료비는 아까워요. 진료비는 환아 나이를 고려했을 때, 보호자의 본인 부담금은 900원이었다.
오빠에게 구내염이 옮았는지는 알아보고 싶은데 진료비는 내고 싶지 않고 나보고 목만 봐달라는 거였다. 그 말에 의미는 입만 보는 행위 자체는 너무 간단하기 때문에 900원의 값어치도 없어 보인다는 걸 내 앞에서 얘기하는 거였다. 무지일 수도, 무례일 수도, 아니면 내가 자신의 뜻에 동의하는 게 당연할 만큼 그 행위가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엄마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몇 초였지만, 오늘 진료에서 보호자의 눈을 이렇게 깊게 바라본 것은 처음이었다. 바쁜 업무에 지쳐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서있는 미혼의 간호사 손목의 손목보호대가 보였다. 수없이 쌓인 설압자가 보였다. 저 몇 십 개의 설압자는 간호사들이 직접 하나하나 씻어 소독기에 넣어 돌린다. 하루 진료 보는 동안 몇 번을 씻고 소독하고 교체한다. 접수와 수납을 담당하는 간호사가 틈을 내어 수시로 확인하고 수시로 관리해 준다. 인력과 경비가 지출된다. 이경이 보였다. 얼마 전 아이가 몸부림치면서 내 손을 탁 치는 바람에 이경이 떨어져서 이경의 렌즈만 교체했는데 25만 원의 비용이 들었다. 이경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게 된 건 수천번 수만 번 저 이경으로 목안, 코안, 귀안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런 경험들이 환자를 3분 이내 볼 수 있게 한다.
책장에 꽂힌 소아과학 교과서가 보였다. 두꺼운 양장 2권이다. 밤새면서 읽었던 책이다. 수백 번 봤던 책이다. 저 책을 수없이 읽고 발표하고 리뷰하고 케이스에 적용하면서 토론하고, (토론이라 쓰고 혼난다고 읽는다) 줄 긋고, 외우고, 그 모든 과정을 거치며 내 머리 안에 형성된 지식과 경험을 아울러 나는 3분 안에 진단을 추정하고 치료계획을 수립하여 환자 보호자에게 핵심만 브리핑한다. 진료실 전체가 보였다. 신도시에 있는 이 진료실에 월세는 얼마일까.
그냥 목안을 보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의사생활의 경험 아래, 수많은 인력과 시설과 경비가 지출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노력하에 목안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냥 목안을 보는 것이 아니다. 쉽지 않지만 쉽게 보이게 하게 만든 것일 뿐.
다만 저 엄마가 이 사실을 모를 뿐. 엄마뿐만 아니다. 정책을 결정하는 높은 분들도, 보건 정책을 수립하는 연구실에 박혀있는 교수님도, 숫자로만 사회를 파악하는 예산을 기획하는 분들도 이걸 모를 뿐이다. 커피 한잔에 6000원을 쓰는 건 아깝지 않지만, 그저 목 안 확인 하는 것뿐인 한 아이 진료 보는 행위에 600원 지출은 아깝게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가 타인의 노력은 폄하하고, 타인에 대한 고마움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타인에게 책임만을 묻는 사회가 되었다. 해주는 것이 고마운 게 아니라, 해줘를 바라는 사회. 제대로 해주지 않으면, 자기 기준에 맞게 해주지 않으면 망신을 당해야 하는 사회, 처벌을 받아야 하는 사회가 되었다.
서이초 교사의 죽음 이후에, 나는 이런 일을 목도하고 넘어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나, 대기환자가 너무 많아서 많은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다. 엄마에게 단순 목 안을 보는 행위도 진료행위에 들어가기 때문에 접수 없이 볼 수 없다. 단호하게 한 문장 말씀드렸다. 사실하고 싶었던 말은 정말 이렇게 길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