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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상 Aug 12. 2024

경쟁교육으로 망가지는 아이들 인성 1

- 교사가 보는 학교

‘왜 답안지 늦게 냈는데 무효 처리 안 합니까?’ 


한 무리의 아이들이 학급 친구가 시험시간에 답안지 늦게 낸 것을 교사가 그대로 받아줬다고 해서 교무실까지 내려와 많은 교사들 앞에서 당당하게 항의를 합니다. 소위 비평준화 지역의 명문고 아이들입니다. 성적 앞에서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내 이익 앞에서는 친구도 경쟁자고, 친구도 적이 되는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긴 평상시에도 친구를 왕따시키며 괴롭히는 사건이 종종 있는 마당에 이런 항의는 어찌 보면 충분히 가능한 항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나의 입장에서는 깝깝하기만 합니다. 그깟 점수 1, 2점이 머라고 내려와서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친구를 저리 당당하게 몰아칠 수 있는지 참 안타깝기만 합니다. 서울의 한 고교에서도 급우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중간고사에서 객관식 답안지를 작성하지 못한 아이에게 학교 측이 시험지에 기재한 정답 80%만 인정하기로 결정했답니다. 나름 학교 성적관리 위원회에서 그 아이의 질환과 시험장 상황 고려하여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학교 학생들이 심하게 반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실의 현실, 이게 우리 아이들의 현주소이고, 이런 사회 구성원들을 길러내고 있는 우리 교육의 비참한 현실입니다. 


이미 우리 아이들에게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물불 안 가리고 투쟁해야 얻어낼 수 있다는 의식이 이미 내재되어 있습니다. 매번 중간, 기말고사 이후 몇 번씩 확인시키고 사인까지 받아내야 하는 점수 확인 시간이 되면 이를 입증해 줍니다. 교사들에게는 힘들고 짜증나는 시간 중 하나입니다. 자기 점수가 깎였다고 눈을 똥그랗게 뜨고 교사한테도 덤비는 아이들에게서 교사에 대한 예절보다는 점수에 대한 절박함이 깔여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내 시험은 논술형인지라 주관식 답안지 확인하는 시간에는 더욱 끔찍해 집니다. 목이 마를 정도로 충분히 설명한다고 하지만 아이들은 이미 교사의 타당한 설명이 안중에도 없는가 봅니다. 평소 수업에는 소극적이거나 관심도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 점수 확인에는 적극적이고 심지어는 떼쓰듯이 매달리는 아이들이 생겨납니다. 아이의 반박대로 교사도 당연히 틀릴 수 있지만, 문제는 단지 교사가 틀릴 수 있다는 것에만 집착하며 덤벼듭니다. 결국 어떻게든 1점이라도 더 얻어 보려고 억지 주장을 하거나, 또는 고집을 피워대는 아이들하고 얼굴을 붉히고, 목소리를 높이면서까지 싸워야 하는 상황이 종종 벌어집니다. 아이들과 교사 간의 관계가 멀어지고 갈등 관계로 형성되는 시간들입니다. 좀 더 의미 있는 생각거리를 제공하거나 동영상을 보여줘도 ‘시험에 안 나올 텐데 저걸 왜 봐요?’ 하던 아이들입니다. 동시에 점수 한 점 한점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억지 떼를 쓰는 ‘괴물’같은 아이들로 성장합니다. 


어쩌겠습니까? 정신적 여유가 있을 때 타인을 배려하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을 정도가 되어야 독서도 하고 문화생활도 즐길 수 있지, 하루 매끼를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절박한 심정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 독서나 문화생활을 즐겨야 한다는 소리는 공염불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수업을 즐기고, 독서도 하고, 친구나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점수 1점을 더 얻기 위하여 매일매일 쫓겨야 하는, 그리고 주변의 모든 친구들이 경쟁상대가 되어버린 지금의 우리 아이들에게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타인에 대한 이해, 배려, 협동 등의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 인성을 길러주어야 하는 학교에서, 친구들을 경쟁자로 심어주고 살아남기 위한 이기적 인성을 우선, 아니 이기적 인성만 길러줍니다. 우리의 학교는 서로 배려하고 협동하며 팀을 이루어 나가는 ‘스포츠 그라운드’가 되어야 하는데 치열한 경쟁으로 급우를 제쳐야 하는 ‘배틀 그라운드’가 되어버린 지 모래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입증할 수 있는 유사한 사건, 현상들은 우리 사회의 뉴스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뉴스를 보다 보니 예상 가능한 일들이 보도됩니다. 지방 어느 고등학교의 2학년 학생 두 명이 기말고사 시험지를 미리 빼내려고 늦은 밤에 교무실 창문을 넘어서 잠입합니다. 그러고는 교사들의 노트북에 악성코드를 심습니다. 둘 다 아주 상위권이면서 모범생으로 알려진 아이들이라 합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노트북의 비밀번호를 풀고, 악성코드를 심을 정도로 컴퓨터를 원래 잘하는 학생회장이 그 중 한 명이라는 것입니다. 뛰어난 재능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법적인 행위까지 서슴지 않고 해치우는 엘리트 학생입니다. 최근에는 수능만점자의 의대생이 교묘한 계획을 짜서 여자친구를 잔혹하게 살인한 교제 폭력이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아마 우리 사회가, 그리고 우리 어른들이 성적만 좋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 출세하는 것을 묵인하거나 용인할 수 있다는 인식을 아이들에게 심어준 결과가 아닌가 싶어 더욱 섬찟해집니다. 자신의 이익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으며,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타인을 무시하고 배제하게 하는 ‘무개념’, ‘무공감’의 그런 비인간적 아이들들을 길러내고 있는 것이 우리 교육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육을 파시즘 이데올로기로 비판하는 독문학자 김누리 교수는 어느 강의에서 씁쓸한 한국개발연구원의 자료를 보여줍니다. 가장 경쟁이 심하다는 한·중·일·미 4개국 대학생들이 생각하는 고등학교에 대한 인상을 물었던 결과입니다. ‘고등학교는 사활을 건 전장이다’라는 대답에 80.8 %로 한국이 가장 높습니다. 4개국 중에서도 한국이 미국, 중국의 두 배, 일본의 6배가 넘습니다. 역으로 일본 학생들조차도 고등학교가 ‘함께하는 광장’이라는 대답이 75%가 넘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12%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나마 ‘함께하는 광장’이라는 긍정적인 대답이 12%라도 된다는 것에 위안을 삼아봅니다. 


‘교육과 상대평가’라는 터무니없는 프레임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  교육에서 ‘경쟁’이라는 요인, 그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상대평가’라는 평가 방식이 존재하는 한 교육다운 교육을 할 수 없고,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인간적인 인격을 기를 수 없습니다. 이 주제는 뒤에 가서 더욱 자세히 언급해 보겠습니다. 특히 자신을 둘러싼 모든 적(친구)들을 물리친 우리 학교의 일부 상위권 아이들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길러진다고 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점수 한 점 한점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억지 떼를 쓰는 ‘괴물’같은 아이들 대부분이 성적 상위권 아이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이익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만을 우선하는 엘리트들이 되기도 합니다. 경쟁에서 친구들을 누르고 짖밟아야지만이 내가 성공할 수 있다는 생존전략을 강하게 심어주고 있는 우리 교육 덕분입니다. 타인들과의 신뢰, 협동 과정을 강조하고 반복적으로 지도해도 모자랄 판국에 하루 종일 공부에 쫓기는 아이들, 거기에 치열한 경쟁까지 감수하며 쫓겨야 하는 아이들, 과연 이런 아이들 인성이 좋아질 틈이 있을까요? 


하지만, 이러한 현상들에 대하여 나만 지나치게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내가 보지 못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디에서도 사회적 이슈로 심도 있게 논의되지도 않습니다. 왜 모든 것을 인정받는 상위권 아이들이 얼마나 성적과 경쟁에 쫓기기에, 어떤 인성을 형성하고 있기에 이런 범죄적 행위까지 하게 되었는지, 우리 교육은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하여는 모두들 무감각한 듯합니다. 단지 아이들만 알고 있고, 걱정합니다. 


안녕하세요? 대통령님 현재 고3인 여고생입니다.

대구 집단 성폭력 사건이요.

요즘 초. 중. 고 학생들이 얼마나 생각이 없고 대책이 없는지 모르세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못 배워서요?? 아닙니다. 

원인은 좋은 대학만 가면 된다는 부모들의 잘못된 인성교육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자면 부모들을 그렇게 부추기는 우리나라의 잘못된 교육 정책 때문일 것입니다.

이게 사소한 문제인 것 같나요? 절대 아닙니다. 

................

정말로 너무나도 아름다운 나이에 자신이 가고 있는 방향도 모른 채 오로지 교과서와 문제집을 봐야 하는 이 냉혹한 현실에 한 줄기 빛이 되어주실 분은 한 분도 안 계시는 건가요?


초등학생들의 집단 성폭력 사건에 대한 어느 여고생의 하소연입니다. 아이들이 더 잘 압니다. 교과서와 문제집만을 봐야 하는, 그리고 점수 한 점 더 얻기 위하여 치열한 경쟁에 쫓겨야 하는 잘못된 교육 정책 때문에 자신들이 무사유의 인간들로 성장하고, 더불어 인성도 무너져 가고 있다는 것을. 교과서는 그 교과 고유의 본질을 추구하기 위해 구성된 것일진대, 우리는 오직 시험에 필요한 지식만을 뽑아서 가르치고 배웁니다. 내가 가르친 도덕 교과가 있고, 윤리 교과가 있지만 정작 도덕성 및 인성 함양이라는 교과의 본질은 어디 간데없고 시험만을 위한 필요한 지식만 챙기는 교과가 되어 버렸습니다. 도덕에 관한 지식이라고 도덕성까지 길러주는 것은 아닙니다. 교과 교육에서 인성교육까지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불가항력의 큰 틀이 짓누르고 있는 한 작은 틀 안에서 발버둥을 쳐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이 모든 사회 현상의 원인을 입시 위주의 학교 교육에서 찾습니다. 교육은 받았지만 치열한 경쟁 속에서 친구들을 제끼야 하고, 지식으로는 법을 지키고 타인을 해치면 안 된다는 내용을 배웠지만 단지 시험만을 위한 지식으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교육다운 교육이 아닌 경쟁을 전제로 한 잡다한 지식 암기에만 주력한 교육의 모순입니다. 책 한 권 제대로 읽고 사유할 여유없이 그저 교과서의 단편 지식을 정신없이 암기함으로써 시험 점수만 받고자 하는 공부로서는 어림없습니다. 나 아닌 타인의 의견을 경청해 보고 타인의 입장을 고려해 볼 수 있는 토론 수업의 결여도 한몫을 합니다. 경쟁과 시험만을 위한 지식 공부로 이룰 수 있는 교육의 결과는 너무 미세한, 또는 아주 보잘것없는, 심지어는 역기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사회학 교수이자 한국 사회에 상당히 우호적인 샘 리처드 교수는 어느 인터뷰에서 한국 학생들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할 겨를 없이 공부하는 현상에 대하여 ‘희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제대로된 성장을 하지 못하고 오직 지식 위주의 공부에만 매달려야 하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결과만을 위해 포기하는 모든 것에는 당연히 인격적 성장도 포함되어 집니다. 물론 이러한 ‘희생’의 덕분으로 지금의 놀라운 성장을 가져왔다고 인정하면서도 더불어 이러한 과잉 교육열은 언젠가 한국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경고를 덧붙입니다. 학교 현장에 근무하는 교사의 입장에서는 어떤 전쟁 위기, 환경 위기, 경제 위기 등에 대한 경고보다는 더욱 섬뜩하게 와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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