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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상 Aug 15. 2024

경쟁교육으로 망가지는 아이들 인성 2

- 교사가  보는 학교

‘혼자 하면 안 돼요?’


일부 상위권 아이들에게 발견되는 특징이 또 하나 있습니다. 성적, 점수와 관련하여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둠을 구성해서 준비하는 발표 및 토론 수업에서 모둠을 통한 발표 수업 준비보다는 개인별 활동을 더욱 선호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특히 상위권 아이들이 친구들과 기꺼이 협력하길 꺼리고 혼자만의 힘으로 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수업 전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들과 함께 발표 팀을 짜보라는 부탁을 해보지만 여지없이 상위권 아이들 중 혼자서 하겠다는 아이가 나타납니다. 소위 공부 못하는 아이와 함께 팀을 짜게 되면 어차피 자기 혼자 해야 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럼 더욱 힘들어진다는 의도가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 덕분에 부족한 친구가 어부지리로 점수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깔려있을 것입니다. 교사인 나로서 최대한 설득해 보지만 손해 볼 것이라고 뻔히 예상하고 있는 아이의 일그러진 얼굴을 쳐다보며 자신 있게 밀어붙이기도 어렵습니다. 


이처럼 우리  교육의 가장 심각한 폐해는, 꿈을 찾지 못하는 아이들도 문제지만, 그나마 버틴 아이들조차도 타인과 공존해야 하는 사회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나만 아는 이기주의적 아이들,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데 익숙지 않은 아이들, 타인의 고통과 어려움에 공감할 줄 모르는 아이들, 즉 공감 능력이 결여된 아이들을 길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입증하는 사회적 현상들이 내 눈에는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아니, 내가 왜 경쟁자에게 자료를 공유해야 합니까?’


단순한 드라마의 한 장면에 불과하지만 내가 학교 현장에서 접하고 있는 상위권 아이들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가볍게 넘어가질 않습니다. 교육 밖의 상황이지만, 어느 유명한 드라마에서 1년 재계약을 앞두고 경쟁해야 하는 두 변호사가 같은 사건을 맡아 호흡을 맞춰 대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건 관련 자료들을 먼저 본 변호사가 파트너인 변호사에게 같이 공유하지 않고 당연하듯이 던진 말입니다. 같은 사건을 맡았지만 재계약 경쟁에 이기기 위하여는 파트너도 없고, 협력도 거부하는 우리 사회 엘리트들의 한 단면을 비추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드라마 장면과 유사한 장면이 연출됩니다.


'매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학창 시절 공부에 매진한 의사'

'성적은 한참 모자라지만 그래도 의사가 되고 싶어 추천제로 입학한 공공의대 의사'


어느 날 의사 파업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의료정책 연구소가 ‘당신의 생사를 판가름 지을 중요한 진단을 받아야 할 때, 의사를 고를 수 있다면 둘 중 누구를 선택하겠냐’는 질문과 함께 제시한 보기의 내용입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겠지만 아마도 국민들의 동조를 구하고자 하는 의도로 게재한 내용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적 지상주의로 무장한 의사들이 국민들의 생명을 볼모로 자기 밥그릇만 챙기려는 이기심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비판을 모두 인정한다면, 이 모든 불찰이 결과적으로는 나를 포함한 교사들의 잘못이라는 생각에서 더욱 민망하기만 합니다. 교사의 입장에서, 특히 나에게는, 공부만 잘한 나의 제자들이, 성적 지상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제자들이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을 성적으로만 보고 있다는 점에서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만을 위한 기준을 적용하여 자신들의 이익 쟁취의 합리화로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에서 서글프기만 합니다. 


‘우리 교육은 잠재적 파시스트를 양성하고 있다.’


독일 교육을 바탕으로 한국 교육을 비판하고 있는 중앙대 김누리 교수도 어느 방송 대담에서 앞에서 언급한 파업하는 의사들의 행태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더 나아가 나는 감히 쓰지 못한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기에 나도 학교에서의 여러 사례들에 근거하여 마음으로 동감하며 옮겨봅니다. 사유 과정 없이 단지 시험만을 위한 암기 위주의 우리 교육을 파쇼 교육이라 비판합니다. 이런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성인이 된다고 과연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으며, 성숙한 민주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요?  


'5년 뒤에 내가 무릎을 꿇게 하겠다.'


뉴스에 나온 어느 경찰대생이 경찰을 폭행하면서 호언장담을 했다는  발언입니다. 경찰대라고 하면 어느 고등학교든 성적이 최상위권 학생들만이 합격가능한 학교에 속합니다. 모든 상위권 학생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일부 학생들, 아니 생각보다 다 많은 학생들은 나만의 공부로, 나만을 위해 노력한 대가를 누리고자 하는 자기만족과 자기 성취 학생들입니다.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고 내 능력만으로 지금의 성과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상위권 아이들 일부분이 남과 함께 더불어 무엇을 해본 적이 없고, 남을 배려해본 적도 없었던 아이들입니다. 나에게는 우리 아이들의 현재 모습이 동시에 오버랩됩니다. 


유사한 사건이 또 있습니다. 어느 저녁 무렵에 노상방뇨를 하고 있던 두 청년이 주의를 주던 식당 할아버지와 이를 말리던 할머니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른 사건이었습니다. 내가 놀란 것은 두 청년이 우리 사회 엘리트 계층이자 법을 제일 잘 안다는 변호사 양반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변호사라 함은 당연히 학창 시절에 성적이 최상위권에 위치한 학생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최소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의 잘못에 대한 지적에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90세 이상의 할아버지에게 폭력을 휘두르기까지 하였다 합니다. 이들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뇌·신경 심리학자인 이안 로버트슨교수는 ‘승자의 뇌’(The Winner Effect)라는 책에서 권력을 맛보게 되면 뇌에서 과도한 도파민이 분출되고, 이는 자기만족과 자기애에 빠지게 함으로써 지나친 오만과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의 약화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의 일부 엘리트들에서 쉽게 발견되어지는 특성입니다. 교사의 입장에서는 우리들의 엘리트 아이들에 내재된 이 지나친 자기 오만이 혹 ‘나만 최고다.’라고 인식을 심어준 우리 교육의 결과는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먼저 듭니다. 치열한 경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내가 어떻게 살아남고, 이 자리에 올라왔는데...’하는 자신이 이룬 성과에 대한 보상을 당연히 받아내야 한다는 의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내재된 의식을 바탕으로 난폭한 행동을 타인에게 함으로써 자신의 높은 위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의식이 이미 잠재적으로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소위 말하는 갑의 횡포를 위한 의식이 내재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버드대학교 마이클 샌델 교수는 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공동선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능력주의'의 오만을 지적합니다. 시험을 통해 능력을 검증하는 능력주의는 단지 시험 능력에 따라 돈과 권력을 부여하는 제도입니다. 단지 시험을 응분의 자격을 부여하는 타당한 장치로 인정하고, 경쟁의 승자는 보상을, 패자는 굴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정당화 기능을 발휘한다고 비판합니다. 시험만을  통하여 우리 교육이 길러주고 있는 이러한 능력주의 사고방식은 승자들을 오만으로, 패자들은 굴욕과 분노로 몰아갑니다. 특히 우리의 교육제도 하에서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능력에 대한 자부심은 자기 자신의 성과에 대한 정당성과 이에 기초한 지나친 자기 과신, 그리고 독선적 오만을 부여하게 됩니다. 위의 경찰대생이나 두 변호사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됩니다. 


결국 이렇게 성장한 아이들이 타인을 배려하고 고통을 공감하기는커녕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타인들의 고통을 더 후벼파는 이기적 엘리트, 지도층들로 자리매김할까 봐 두렵습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이기적이라고 한다지만 우리 교육은 더 나아가 '나'를 중심에 두는 이기적 속성을 더 당당하게 발휘하도록 인정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으며, 오히려 타인을 무시하고 배제하게 하는 ‘무개념’, ‘무공감’의 그런 비인간적 아이들들을 길러내고 있는 것이 우리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어릴 때, 그리고 학창 시절의 경험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어떤 사회 구성원이 되느냐가 결정된다고 본다면, 우리 아이들에게는 도움이 되는 경험보다는 부정적인 트라우마가 잔뜩 남겨진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교육을 받을 만큼 받았음에도, 아니 교육을 더 많이 받을수록 오히려 인간성 상실이 우려되는 교육입니다.


여행길에 들린 태국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 고등학교에 일부러 들어가 모여있는 아이들을 잠깐 만나보았을 때 내가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 ‘학교생활이 즐겁냐?’는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마침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던 아이들은 어설픈 한국말을 던지면서 서슴없이, 그저 해맑게 웃으며 모여들더니 나의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아 학교생활이 행복하다는 대답을 합니다. 11학년까지는 입시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학교생활을 즐기고, 12학년이 돼서야 조금 입시 준비를 하면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학교보다 훨씬 더 열악한 여건인 듯 보이는 학교에서 매일 7~8 시간을 공부하지만,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대학 진학을 원하지만 입시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친구들과 함께 학교생활을 즐겁게 영유하고 있는듯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다같이 즐겁게 학교생활을 마친 아이들이기에, 그래서 이 도시의 사람들이 모두 친절하고 여유 있는 자세를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경쟁없자가 아닌 그저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학교생활의 즐거움, 여유로움의 여부가 결과적으로 우리들의 인격적 성장, 삶의 자세를 결정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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