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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상 Aug 26. 2024

인간적인 교사가 우선이다 1

- 교사부터 변하자

‘아이가 핸드폰 달라고 하면서 내 몸을 만졌어요. 이건 명백한 교권 침해입니다.’


나는 학교 이동할 때 업무 희망 부서를 아이들, 특히 관심이 많이 필요한 아이들과 자주 접촉할 수 있는 생활부로 신청합니다. 하지만 아이들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가끔 못난 교사들도 상대해야 합니다. 생활부에 상기된 얼굴로 들어온 어느 초임 여교사의 하소연입니다. 수업 시간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수업에 집중하지 않길래 폰을 빼앗고, 수업이 끝나고 난 후에 돌려달라는 아이와 오늘 수업이 다 끝난 방과 후에 돌려준다는 여교사 간에 신경전과 대립이 시작되었답니다. 그 과정에서 아이의 반발이 시작되고, 교사와 논쟁, 그리고 폰을 돌려주지 않으려는 교사와 돌려달라는 아이가 떼쓰는 과정에서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는 장면이 연출되었는가 봅니다. 


생활부장에게 하소연하는 교사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단지 손을 뻗었을 뿐이라는 아이를 불러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어봐도 큰 문제 상황도 아닌듯하면서 법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소위 말하는 ‘쌍방 과실’인 듯합니다. 하지만 이 교사는 더 나아가 아이와의 갈등에서 분함을 삭히지 못했는지 저녁에 집에 돌아가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에서 아이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아 이를 본 아이들의 원성을 사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주장을 굽히지 않는 여교사의 의지에 의해 ‘교권 침해’라는 결론을 내렸고, 학교는 교육청에 신고하고, 장학사가 변호사를 대동하여 상담합니다. 아이는 아무런 도움 없이 방어해야 합니다. 어찌 보면 현재 매스컴에 극히 일부 악성 아이들이 보이는 교권침해 상황과는 반대로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교사의 일방적인 횡포로도 보입니다.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교사들이 이러한 우발적인 상황이 발생하면 순간적으로 교사다움을 잠시 망각하고 ‘감히 학생이..’하며 우월적 입장을 고수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나의 관점에서는 아이와의 갈등은 대부분 교사의 교사다운 자세의 결핍에 기인한 대립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사와 아이와의 갈등 상황이라면 교사 먼저 교사다운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교사가 먼저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아이의 잘못만을 따진다면 갈등, 대립의 골만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신에게 교사의 존재가 유의미한지 아닌지에 따라 수시로 태도가 달라지는 아이들을 보면서 교사도 감정적 동물인지라 때로는 인간적 자세를 유지하기가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나도 물론 예외는 아닙니다. 아이러니하게 평소에는 아이들로 보다가, 아이들하고 부딪칠 때만 아이로 보지 않고 마치 1:1 동등한 성인하고 싸우듯이 치열하게 다툽니다. 독일 사상가 마틴 부버(M. Buber)는 인간관계를 규정할 때 ‘나-당신'의 관계와 ‘나-그것’의 관계로 나누어진다고 합니다. 인간 대 인간을 ‘나-그것’의 관계로 본다는 것은 내가 대상을 사물로 보고 관계를 맺는 것이고, ‘나-당신’의 관계는 나와 상대를 동등한 인격체로 보는 관점입니다. 교사들에게 아이들은 번호(나-그것의 관계)로 부르지 말고 이름(나-당신의 관계)으로 부르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대부분 교육적인 교사들이 ‘나-당신’의 동등한 관계적 관점을 취합니다. 특히 교사들에게 아이들과의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인식입니다. 


더불어 교사와 아이들 간의 관계 형성은 서로 간 연민을 바탕으로 접근할 때 밀접하게 형성될 수 있습니다. 교사는 아이들에 대한 연민으로 대하고, 아이들도 교사를 연민의 감정으로 보게 될 때 갈등이 줄어들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사들도 아이들에게 권위적이고 통제적인 자세보다는 ‘너희들도 힘들지. 나도 이러이러 해서 힘들다.’라는 감정을 아이들에게 자주 표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지 아이들 입장에서 선생님도 어려움을 겪고 힘들어하는구나를 인지하게 됩니다. 서로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싹트면 서로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눈이 달라집니다.


밤늦게까지 불 밝힌 교실에 남아서 머리를 감싸며 수능 문제 풀이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들을 교실 밖 복도에서 지긋이 바라보며 눈물 흘리던 동료 교사가 기억납니다. 그 늦은 시간까지 문제집에 고개를 박고 있어야 하는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학교 현장에 근무하는 젊은 교사들이 이 교사의 심정을 공감하며 헤아릴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2년만 버티자.’


어느 아이의 책상 위에 굵게 쓰여있던, 그래서 나의 머릿속에 항상 맴맴 돌고 있는 글귀라고 언급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워야 할 고등학교 3년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1년이 지나면 서서히 자기의 상대적 서열이 어디쯤인가를 인식하게 되면서 희망보다는 좌절하거나 자포자기하는 아이들이 많아집니다. 이렇게 지쳐있는 아이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교사는 어떤 모습일까요? 아이들이 좋아하는 교사 타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입시에 도움이 되는, 더 정확히는 내 성공에 도움이 되는 실력 있는 교사들을 좋아합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힘들어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습니다. 그나마 버티면 희망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교실 한켠 구석에서 숨죽이고 하루하루를 버티는 아이들은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하지만 속으로 자신을 한 번 더 보아주는 교사를 애타게 기다립니다. 


우리 아이들, 특히 학교생활에 부적응 현상을 보이며 힘들어하는 아이들에 대한 접근에서 필요한 능력은 교사로서의 지시적 접근이 아니라 아이들만의 세계와 불만을 이해하고 수용해 줄 수 있는 친구 같은 감성적 공감 능력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지금의 삭막한 학교생활에서, 그리고 공부와 성적에 쫓기는 절박감에서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그네들의 마음을 공감해 줄 수 있는 인간적인 사랑과 관심, 배려입니다. 교사들은 이러한 아이들을 위해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고 존중해 주고, 관심을 갖고, 배려해 주는 자세를 가장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교육학에서 말하는 ‘인간적인 교사’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별 무리 없이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거쳐 임용고사에 합격한, 자부심과 아집이 강한 범생이 교사들 일부는 아이들의 일사불란하지 못한 태도와 행동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한 듯 보입니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학생지도 시의 특징은 왜 일탈 학생(?)이 그런 행동을 하는가를 우선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못합니다. 단지 자신이 학창 시절에 교사들의 지시를 잘 따르고 모범적으로 학교생활 한 것처럼 왜 교사가 지시하는 대로, 그리고 지도하는 올바른 방향으로 행동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책 위주의 일방적, 지시적 지도만 있을 뿐입니다. 교육적이고 체계적인 교사 양성 과정을 통해 교육적인 교사로서의 자질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성장 과정을 통한 결과로서 교사의 자세를 형성하고 있는 우리 교사양성 과정의 한계입니다. 그리고 이런 교사들에게 아이들은 다시 반발합니다. 교사와 아이들과의 관계가 악순환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먼저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잘못만을 따진다면 갈등, 대립의 골만 깊어지고 결국에는 학교생활 내내 그 아이와의 극단적인 대립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야 합니다. 이러한 파국을 피하기 위해 누군가 먼저 상대를 이해를 해야 한다면 누가 먼저 해야 할까요? 내가 교사로서 당연히 갖추었으면 하는 인간적인 자질을 특히 젊은 후배 교사들에게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아직도 믿고 의지할 만한 교사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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