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하고 기다리고 굶는 게 특기였던 한 사람
21세기 면접장에서 자신의 특기를 묻는 면접관의 질문에 이렇게 답을 하면 합격할 수 있을까?
"제 특기는 사색하고 기다리고 굶기입니다."
약 3초 정도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아마 이런 답을 받지 않을까?
"네, 더 물어볼 건 없네요. 수고하셨습니다. 나가셔도 괜찮아요."
등 뒤에서 들리는 "어떻게 저런 놈이 서류전형을 통과했지?"라는 물음과 함께 그 사내는 문을 닫고 나올 것이다.
여기 무려 2500년 전 부유한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나 명석한 두뇌와 헌앙한 외모를 지닌 사내가 있다. 특기는 사색, 기다림, 단식이고 이름은 싯다르타라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주말이면 도서관으로 도망(?)쳤던 나는 주로 만화로 된 책을 탐독했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된 만화 중 하나가 바로 '붓다'라는 작품. 부처님의 일생을 그려낸 작품이었는데 단군신화 수준으로 믿기 어려운 일화(이마에 난 종기를 없애기 위해 붓다가 매일 몇 시간씩 그 종기에 검지손가락을 대고 서있는 치료(?)법 덕분에 병이 나은 이야기, 붓다를 죽이기 위해 손톱에 독을 바른 사내가 넘어지며 결국 그 독으로 자신이 죽게 되는 이야기 등)들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한반도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게 불교이고, 고등학생 때 읽은 '붓다'는 불교가 우리 역사에, 역사가 한반도의 불교에 끼친 영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0년도 넘게 지났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한강작가의 책을 진열해 두었다. 광화문 교보문고를 가보니 한강작가뿐만 아니라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모아놓은 구역을 만났다. 여기서 눈에 띄었다. 헤르만 헤세가 쓴 <싯다르타>. 이미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의 작품을 읽어 작가가 누군지는 대략 알고 있었다. 독일 태생이고 1877년생(김구선생님보다 한 살 동생이다.)이며 1946년 노벨문학상을 받음. 싯다르타보다 2400살 동생이고, 6500km가 떨어진 곳에서 태어난 독일인. 그러니까 이 독일인은 2400년을 시간을 거스르고 6500km의 공간을 가로질러 세계 3대 종교 중 하나의 창시자의 삶을,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깨달음을 얻게 되는지를 그려낸 것이다.
교보문고에서 생긴 '이게 정말 가능할까?' 하는 호기심의 씨앗은 인천공항에서 싹을 트며 나에게 이 책을 사게 만들었다. 그리고 처음 다섯 장을 읽은 뒤 나는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하나는 '이게 정말 가능하구나.'
다음은 '이 정도는 써야 노벨문학상 받는구나.'
(처음 네 장에서 작가는 싯다르타의 아버지, 어머니, 고빈다, 여인들의 입을 빌려 싯다르타나 얼마나 훌륭하고 지혜롭고 고귀하며 매력있는 청년인지 묘사한다. 그리고 그 다음 한 장으로 그런 자신에게 불만족하는 싯다르타 본인의 마음을 묘사한다. 이 묘사와 대조는 결국 싯다르타의 삶과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싯다르타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은 여덟 명. 싯다르타의 영혼의 단짝인 고빈다. 싯다르타보다 먼저 깨달음을 얻고 고빈다의 스승이 되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테토남식 고백에 넘어가 그의 아들을 낳는 카말라. 싯다르타가 카말라에게 인정받으려 부자가 되기 위해 찾아간 거상 카와스와미. 그렇게 부자가 되었지만 다시 모든 걸 버리고 강에 빠져 생을 마치려 할 때, 깨달음을 얻고 강의 소리를 듣기 위해 함께 생활하는 뱃사공 바주데바. 고타마의 입적을 보기 위해 강을 건너던 카말라가 독사에 물려 죽고, 홀로 남아 아버지인 싯다르타에게 끝없는 번뇌를 안겨주던 그의 아들. 그리고 마침내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게 만드는 강물까지. 불교에서(작중에서는 고타마가) 말하는 팔정도처럼 여덟 명의 주요 인물이 싯다르타의 삶을 깨달음(고타마가 얻은 깨달음을 고타마에게 배우려는 모든 사문과 달리, 스스로 고타마가 되기 위한 길을 걸어야 한다는, 그것만이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으로 이끈다.
불교와 부처님, 나무아미타불과 머리 빡빡 깎은 스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배운 팔만대장경과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을 고요하게 차지하고 있는 반가사유상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무려 2400년의 시간과 6500km의 공간을 넘어,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인 싯다르타의 삶을 어떻게 그려냈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싯다르타의 삶은 길고 불교의 역사도 길지만 이 책은 그리 길지 않다. 그리고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잔잔하고 수려한 문장으로 당신을 사로잡을 것이다. 싯다르타가 걸어간 길을 앉은자리에서 한 번 따라가 보시라 권하고 싶다.
인공지능이 지나치게 발전하는 2026년의 사람들을 보고 싯다르타는 뭐라 말할까? 그는 분명 무언가를 배우거나 해야 할 때, 인공지능을 활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사람들을 나무라거나 가르치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그는 그의 모든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누군가를 따르고 가르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