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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ong Sep 25. 2024

5. 수용 : 정신 차림

[종기가 이미 지났어요.]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경고음에 이끌려 법원에 전화를 했다. 

  “제가 살고 있는 전셋집이 경매에 넘어갔다는데, 혹시 법원에서 관련 문서를 보낸 게 없을까요? 제가 아무것도 못 받아서요.”

  사건 번호를 대고 담당 법원의 전화번호를 안내받았다. 

  담당 법원 경매계 직원은 집 주소를 불러 달라고 했다. 나는 내가 사는 집의 호수를 불렀다. 직원은 등본상 호수를 말하라고 했다.

  “문패 호수랑 등본상 호수가 달라서 법원에서 보낸 서류를 못 받은 분이 많아요.”

  내가 사는 건물에는 방이 100여 호실 있는데 등본상에는 40여 개 있다. 40여 개 실을 쪼개서 방을 늘린 것이다. 예를 들자면, 301호, 302호, 303호, 304호, 305호의 등본상 주소는 모두 301호다.

  “배당요구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언제까지 제출해야 하나요?”

  “배당 요구 종기일은 이미 지났어요. 빨---리 서류 챙겨가서 제출하세요.”

  ‘빨’과 ‘리’ 사이에 3초 정도의 간격이 있었고 내 심장이 3초 동안 낙하했다. 

  ‘이미 지났다’는 대목이 반복재생됐다. 서류를 제출하라는 대목은 의아했다. 기일이 지났지만, 서류를 받아준다는 건가? 법원이 그렇게 말랑한 곳이던가?

  따져 묻는 건 법원에 가서 하기로 하고, 서둘러 책꽂이와 서랍을 뒤져 임대차계약서를 찾았다. 마침내 현실을 직시하고 해야 할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주민등록 초본, 등본, 확정일자 필증과 계약서 사본을 품에 꼭 안고 처음 가보는 법원을 향해 달렸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법원까지 가는 잠깐 동안 신발에 물이 찼다. 빗줄기가 청바지 아랫단을, 종아리를, 허벅지를 적시는 동안 나는 서류가 담긴 가방을 품을 상체를 더욱 웅크렸다. 내 전세 계약이 망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서류가 젖을세라. 

 

  민원 창구의 직원이 비치된 서류를 작성하라고 했다. 전세 계약을 할 때보다 훨씬 신중한 표정으로 한 자 한 자 썼다. 창구 안으로 서류를 내밀면서 질문을 쏟아냈다.

  “날짜가 지났는데, 지금 내도 되는 건가요?”

  “이거 내면 그다음에는 뭘 해야 하죠?” 

  “법원에서 보낸 줄 준 서류를 제가 못 받았는데 여기서 다시 주실 수 있나요?” 

  창구 유리막에는 직원에게 법률상담을 하지 말라고 쓰여있었다. 그래서 행정 절차에 관한 것만 물어봤다. 법률적인 걸 묻고 싶어 죽겠는데(집주인과 부동산중개인을 고소할 수 있나요? 같은 것) 못하니 답답했다. 접수 기한이 지나버린 서류를 받아준 천사 같은 직원이지만, 질문은 담당 경매계로 가서 하라는 섭섭한 소리를 했다.     

  사실 다른 데 가서 물어보라는 말이 서운한 게 아니라, 그의 무표정이 서운했다. 나는 부정-분노-우울의 단계를 지나야 하는 큰일을 당했고, 그 일 때문에 찾아온 사람이라는 걸 뻔히 아는 사람한테 동정조차 받지 못한다면 도움은 기대할 수도 없겠다는 막막한 심정인 것이다. 하지만 모든 민원인에게 공감하려면 그 직원은 하루종일 울상인 채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는 다른 곳이 있다니 찾아갔다. 바로 옆 창구다.     


  경매계 직원은 표정이 풍부했고 내가 구하고자 했던 정보와 미처 생각도 못했던 정보들을 선물처럼 전해주었다. 종기는 지났지만 배당요구신청서를 받아준 것은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은 세입자가 꽤 많아서 임차인 권리보호를 위해 종기를 연장할 계획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장되면 기한을 지나 제출했더라도 똑같은 권리를 보장받는다고 말해줬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제해 주기 위해 종기를 연장하는 수고를 할 예정이라는 말을 하는 그분은 그날의 천사이고 보살님이었다.

  이날 알게 된 것 중 가장 의미있는 정보는 이 경매사건이 최소한 2년은 지나야 끝난다는 것이다. 아무리 빨라도 내년 초에야 경매가 개시될 것이고 경매가 개시되어 종료되기까지 최소한 1년은 걸린다는 것이다. 가장 알고 싶었던 사실이기도 하고, 알고 나니 가장 속이 쓰린 사실이기도 하다. 이 건물에 거주해야 하는 기간은 최소 2년, 어쩌면 3년이다. 전세 사기의 실질적 피해가 보증금 상실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 때는 몰라서, 이날은 이 숫자의 무게를 실감하지 못했다.

  직원분은 경매가 개시되면 그때는 실거주하고 있는 주소로 우편물이 갈 테니 잘 받으시라고 말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을 경매 개시 소식을 기다리는 것. 그리고 직업을 구하는 것이다.       



두 번 다시는 쓰고 싶지 않은 신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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