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2. 서글서글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본 건 2년 전 여름이었다. 독립출판 프로그램이 끝난 후, 책이 나온 기념으로 대구에 밥을 먹으러 가던 날. 지도 선생님과 참가자들이 모두 모이는 식사 자리였다. 정원진 선생님과 나는 같은 차를 타고 이동했다. 차 안에는 프로그램 지도 선생님과 참가자였던 정원진 선생님, 나, 그리고 다른 참가자 한 분. 이렇게 네 명이 타고 있었다. 기억이 흐릿하지만 구미에서 대구로 가던 고속도로 위에서 우리 넷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던 거 같다. 어떤 계기로 글을 쓰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글을 쓰려하는지… 이런 시시콜콜한 물음부터 이상형 토크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독립출판 프로그램 참가자 중에는 내가 제일 나이가 어렸고 그다음이 정원진 선생님이었다(아마). 그래일까, 왜인지 모르게 선생님의 글을 읽을 때면 다른 글보다 더욱 친근한 감정이 느껴지곤 했다.
그 사이에 나는 대학을 갔고, 정원진 선생님은 첫 책을 내셨다. 사이다와 환타를 섞어 마시는 걸 좋아하던 나는 이 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소주와 맥주를 3:1 비율로 섞은 일명 ‘꿀주’를 좋아하는 스물한 살이 되었다. (섞어 마시는 건 어릴 때부터 습관이었나 보다.) 정원진 선생님은 벌써 교직 3년 차가 되어 내년 전출을 앞두고 있으시다고 한다. 많이 변했다면 변했고, 바뀌지 않았다면 그대로인 우리는 2년 반 만에 새롭게 만났다.
선생님을 다시 만나기 전, 뜻밖의 이들에게서 정원진 선생님의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어느 글쓰기 수업의 조교로 잠시 일을 할 때였다. 한 학생의 문장력이 좋아서 ‘어디서 글을 배운 적 있냐’ 물었고, 학생은 ‘배운 적은 없지만 중학생 때 학교 도서관에서 하는 독립출판 프로그램에 참가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번뜩 머릿속에 정원진 선생님이 떠올랐고, ‘혹시 해마루중..?’이라 물었더니 그렇다고 답했다.
다른 하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꾸준히 연락을 하고 지내는 K선생님의 입을 통해서다. 졸업한 이후로도 가끔 만나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며 지내는 선생님이 한 분 있다. 내게 글을 쓰는 재미를 알려준 스승이기도 하다. 요즘 뭐 하고 지내냐는 K선생님의 물음에 ‘구미에서 잡지를 만든다’고 답했다. 잡지에 관련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와중, 섭외한 인터뷰이의 이름을 꺼내다 ‘어, 그분 나도 아는데’라는 말을 들었다. 새삼 구미 땅이 참 좁다는 걸 느낀다. 알았던 사실이지만 더욱더 뼈 져리게.. 느낀다. K선생님은 그런 내게 ‘그러니까, 잘 살아야 돼.’라며 느슨해진 내 마음에 약간의 탄력을 주곤 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언어가 주는 다정함의 힘을 아는 사람들인 거 같다. 내가 만난 대다수의 쓰는 사람들은 다정한 언어를 주고받는 사람들이었고, 정원진 선생님도 그중 한 명으로 남아있다. 다정한 선생님에게서 다정한 언어를 배우는 해마루중 아이들은 어떤 모습일까. 문득 궁금해져 선생님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구미 해마루중으로 발령받게 된 에피소드가 궁금해요.
해마루중학교는 제가 2021년 2월에 졸업을 하고, 운이 좋게도 바로 발령받은 학교예요.
사실, 사서 교사는 전국에 12% 정도 학교밖에 배치되어 있지 않아요. 100개 학교가 있다면 12개 학교에만 사서 교사가 있다는 건데, 경상북도의 경우 이보다 더 적으니 애로사항이 많죠. 게다가 사서 교사는 타 교과 교사들과 달리 한 학교에서 근무할 수 있는 최대 연수가 3년이라, 다른 선생님들께서 5년 동안 근무하실 때 어쩔 수 없이 다른 학교로 이동해야 해요. 작년부터는 발령 후 4년으로 연장됐지만요. (올해가 해마루중에서 3년째시잖아요?) 네. 저도 내년에는 다른 학교로 가야 해요. (씁쓸한 웃음)
발령 초기에 적응하시면서 우여곡절은 없으셨어요?
저는 원래 국어교육과로 대학교에 입학했고, 국어 교사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어요. 그렇기에 제가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교사의 모습은 수업을 하거나, 아니면 담임을 하거나. 그 두 가지밖에 없었죠. 이 두 가지를 수행해야만 교사다, 라는 로망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이후 진로가 바뀌면서 사서 교사 임용 고시를 쳐 학교에 발령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서 교사는 수업도, 담임도 맡지 않는 거예요. 특히 사서 교사가 담임을 맡는 건 기대도, 전례도 전무했어요. 그래서 방과 후 시간을 활용해 독서나 글쓰기 수업을 추진하는 것부터 시작했죠. 사서 교사가 학교에서 가지고 있는 입지가 너무나 좁다는 걸 체감할 때마다 등교하기가 참 무섭고 힘들었던 것 같아요.
‘놀고 먹는다’는 인식이 있었던 거군요. 생각보다 고충이 많으시겠는데요?
아무래도 그렇죠. 전국적으로 사서 교사 수가 적기 때문에, 제가 자신들의 교사 인생의 첫 번째 사서 교사인 경우가 많아요. 인식이란 것 자체가 없는 거죠. 여유롭게 근무할 거란 상상과 달리, 학교 도서관은 업무가 분업화돼 있지 않아 혼자 많은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게 현실이에요. 선배 사서 교사분들께서는 이런 인식들은 우리가 학교를 옮길 때마다 다시 느껴야 하는 거라서,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고 하시더군요. 아무래도 사서 교사는, 사서 교사가 배치되고 나서 가장 오랫동안 공석인 학교로 발령되거든요. 그중엔 도서관이 20년 동안 없었던 학교도 있어요. 도서관이 잘 관리되지 않았던 학교에서 다시 아이들의 독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건 또 다른 고민이죠.
반 아이들과 독서 모임을 추진하고 계시다면서요?
올해 1학기부터 방과 후 시간에 독서 모임을 운영했어요. 활동을 하고 싶은 아이들끼리 조를 짜서 찾아오면, 제가 블라인드로 책을 고르게 해요. 1번 책은 차별에 관한 도서, 2번은 청소년 소설의 대가가 낸 작품 이런 식으로요. 다행히 아이들이 제가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모임을 재밌어했어요. 2학기에도 하자고 해줘서 고마웠죠.
요즘 아이들은 어떤 책을 많이 빌리나요?
아이들은 문학(800) 도서를 압도적으로 많이 읽고, 다음으로 철학과 심리학(100)에 관심을 보여요. 그중에서도 제가 1학년 수업 때 활용했던 <회색인간>이라는 책은 20-30편이 수록된 초단편소설집이라서 독서 입문용으로 친구들이 많이 빌려갔죠. <행운이 너에게 다가오는 중이야>처럼 아이들 삶의 고민을 담은 책들도 인기 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책부터 추천하고, 반납하러 올 때 점점 더 생각해 볼거리가 있는 어려운 책들을 소개해주고 있어요.
만약 도서관에 음악을 재생할 수 있다면, 어떤 노래를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으세요?
로시의 <stars>라는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요.
날 들킬까 봐 매일 나를 숨겼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걸까
그런 사람이 되면 행복해질까
사람들의 그림자 뒤따라 가지 마
이런 노래 가사가, 학교 공간에서 수행 평가와 시험으로 평가되며 어쩔 수 없이 스트레스받을 친구들에게 많은 울림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이들이 내가 틀린 게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보편적인 정체성을 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외로워야만 하는 아이들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서가를 꾸리시겠단 말씀을 봤어요. 책에게 위로받았던 선생님의 어린 시절 특별한 기억이 있을까요?
고등학생 시절엔 <레 미제라블>을 읽고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장편 소설 속에서 정말 많은 인물들이 각자의 사연과 감정을 가진 채로 살아가고 있거든요. 지나치듯 읽어갔던 모든 이들의 스토리가, 마지막에 책을 덮었을 때 정말 다채롭게 떠오르더라고요. 우리는 다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세상은 결국 이런 게 아닌가 싶었죠.
선생님이 된 이후로는 제가 학교 내 소수자가 돼보니까 그제야 차별, 퀴어, 장애인, 여성과 관련된 도서에 관심이 가더라고요. 그중에선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저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 책이고, 이 책을 비롯해 저는 아이들과 독서 토론을 나눌 땐 항상 차별에 대한 책을 첫 순서로 진행하고 있어요.
선생님의 저서 <선생님도 선생님이에요?>에는 존중받지 못한 순간에 느꼈던 슬픔이나 허탈, 자괴감, 소외감 같은 깊은 감정이 묻어 나온다고 느꼈어요. 지방도시 속에서 소외받고 타인의 인정을 기다리는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시다면요?
뉴스는 항상 서울을 가리키고 있지만, 사람 사는 건 어디 가나 다 똑같은 것 같아요. 누구는 서울에서의 삶을 꿈꾸지만, 저는 구미가 절 만들었다고 생각하거든요. 독립출판과 연이 닿아 저의 책을 집필하기까지 구미라는 도시가 그래서 저는 내가 처한 환경 때문에 너무 위축되지 말자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환경에 매몰되지 말고, 내가 이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고요.
선생님께선 좌우명이 있으세요?
올해 결국 첫 담임을 맡았어요. 좋은 기억도 많지만, 제가 지도를 했음에도 나아지지 않는 모습을 볼 때면 종종 힘이 빠질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마다 저는 ‘후회 없이 살자’고 마음을 다잡아요. 먼 미래에 오늘을 되돌아봤을 때, 나와 아이들에게 후회가 남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고요. 실은 학창 시절 제 좌우명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 였는데, 아시다시피 사람의 존재 가치는 쓸모로만 증명되는 게 아니잖아요. 최선을 다한다면 끝엔 무언가 남는다고 믿어요.
현재 하고 계신 작품이나 글이 있으실까요? 최근엔 어떤 주제로 글이 잘 써내려 가졌는지 궁금해요.
요즘은 도서관이 어려운 공간이 아니라는, 도서관의 매력을 알릴 수 있는 책을 써 보고 싶더라고요. 또 학교와 학생들의 일 말고, 내가 밝히고 부각하고 싶은 우리 사회의 주제들로 소설도 써 보고 싶어서 끄적이고 있습니다.
새로 도전하고 싶거나, 현재 도전하고 계신 일이 있다면요?
복수 전공했던 문헌 정보 교육은 당시엔 취업 수단이었어요. 하지만 이젠 도서관이 너무 좋아졌거든요. 교육학이나 교육 심리처럼 더 나은 교육 방법과 커리큘럼을 도출해 낼 수 있는, 내 전문성을 높일 수 있는 공부를 재개하고 싶어요. 사서 교사로서는 교사 독서 모임이나 사서독서 모임, 지역독서프로젝트에도 참여해보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구미의 행복 스팟이 있으세요?
구미에 오래 살았는데, 부모님께서 제가 힘들 때마다 항상 금오산에 데려가셨었어요. 주변에 있는 수제비집을 들렀다가 산 공기 마시며 저수지 한 바퀴 걷고 나면 마음이 풀렸죠. 다시 구미로 발령됐을 때에도 금오산이 주는 장소감에 여전히 위로받을 수 있더라고요. 작은 상가들이 옹기종기 붙어있는 금리단길도 혼자가 아니란 느낌을 줘서 그 길목을 걷는 것 자체만으로 힐링이에요. 그중에서도 ‘책봄’이라는 서점의 차분한 분위기를 좋아해요.
떠나시기 전에, 선생님께서는 해마루중 학생들에게 어떤 선생님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이거 울어야 되나요? (웃음) 사실 사람들은 옛날의 일을 기억할 때, 어떤 사건보다는 감정으로 기억하더라고요. 그때가 좋았지, 참 행복했지, 하고요. 저는 아이들이 저랑 한 것들 다 까먹어도 좋으니까 함께했던 순간만큼은 참 좋았다고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사서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따뜻했으면 좋겠어요.
글, 편집 : 김가은, 김예빈
사진 : 정원진, 양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