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와 햄릿 - 안으로부터

by blonded

셰익스피어는 현대 영어를 형성하고 이를 세계적인 언어로 거듭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데이비드 캐머런(영국 총리)
 “셰익스피어가 곧 연극이다” – 빅토르 위고
 나는 셰익스피어의 소유물이 되었다 – 괴테
 그는 한 시대를 위한 작가가 아니라 온 시대를 위한 작가다 – 벤 존슨
 햄릿은 서구 문명을 형성한 텍스트라고 우리가 배운다, 햄릿의 유령이 근대사를 지배한다 - 이종숙 교수
 서구 문명에서 셰익스피어에 의해 진정한 개인이 발견되었다. - 해럴드 블룸

셰익스피어는 현대의 신화가 되었다. 그리고 그 신화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 햄릿이다. 햄릿은 여러 말들이 오가지만 대체적으로 1601년에 초연되었다고 보는 편이다. 시대적인 배경은 엘리자베스 1세의 시기이다. 하지만 그보다 내 주의를 끄는 사실은 셰익스피어의 아들인 햄닛의 죽음과 셰익스피어의 아버지인 존 셰익스피어의 죽음 사이에 발표된 연극이라는 것이다. 햄릿은 ‘세계문학의 모나리자’라는 표현대로 다층적이며 다면적이다. 이 작품이 서구 문명을 만들어낸 텍스트라는 평가를 받는 것에는 이 작품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복잡한 층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말대로 미꾸라지마냥 해석의 그물망으로 잡았다 해도 결국에는 빠져나가는 것이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다. 결국 이 난잡한 글도 셰익스피어라는 ‘신’의 그림자를 잡고자 하는 허황된 시도로 그칠 공산이 크다.

클로이 자오가 햄닛이라는 텍스트—셰익스피어와 연관된—를 고른 것은 딱히 놀랍지 않다. 이미 그의 전작인 노매드랜드에서 아름답게 맥베스의 독백과 소네트 18번이 인용되었고 그가 종종 비추는 자연의 풍경은 셰익스피어가 자주 선보인 자연 묘사와 비유의 사용에 맞닿아 있다. 클로이 자오가 이 소재와 연결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그래서 햄릿은 무엇에 관한 연극인가?

지금의 나에게 햄릿은 기표와 기의가 불일치하는 부조리에 고뇌하고 살아가는 인간 실존의 비극이다. 이 틀로 보면 얻는 것도 있겠지만 잃는 것도 있다. 그 점에 유의하며 읽어주었으면 한다.

Who’s there?

햄릿의 문을 여는 대사는 이것이다. ‘거기 누구냐?’라고 말할 수 있는 이 대사는 말, 말, 말로 가득 찬 연극을 시작한다. 이 대사는 10행 정도 뒤에 다시 호레이쇼에게 전해진다. 브래들리의 지적대로 셰익스피어의 제시는 걸작이다. 왜 셰익스피어는 ‘거기 누구냐?’라는 대사로 시작했을까? 극 중의 배경을 살펴보자. 오프닝의 시간은 열두 번 종이 울리는 자정, 공간은 망루이다. 이 시공간은 명확히 경계의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경계의 시공간에서 ‘거기 누구냐’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결국 햄릿은 거기 누구인 존재, 즉 인간에 대한 연극임을 극은 제시한다. 그래서 햄릿—그러니까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seems, madam? Nay, it is.’

슬퍼 보인다는 어머니이자 왕비—거트루드의 말에 햄릿은 이렇게 말한다. ‘슬퍼 보인다고요? 어머니.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보이는 것과 실재의 차이. 이것은 햄릿에서 변주되는 주제다. 햄릿에 대해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논란이 되는 부분은 바로 햄릿이 실제로 미쳤는가의 여부이다. 중요한 것은 햄릿이 미친 척 가장한다는 사실과 동시에 진실을 알기 전에도 우울증의 전조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자에서 햄릿의 광기가 사실인지의 여부보다 햄릿이 광기를 옷마냥 두르고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는 이 작품이 실재와 표면 사이의 부조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후자에서 진실을 알기 전에 햄릿이 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햄릿의 고뇌가 더 근원적이고 심층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prison

감옥. 햄릿은 덴마크가 감옥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 극의 배경이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지 않는 부조리의 세계라는 것을 언급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것도 지적해야 한다. 바로 이 유령은 어디서 왔는가?

유령은 연옥에서 왔다. 이는 유령이 직접 말하는 prison house라는 단어에서 그가 말하는 불로 인한 속죄에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가톨릭은 금지된 것이고 연옥에 대한 묘사 역시 그렇다. 셰익스피어가 가톨릭이었는지는 아직까지 연구 대상이며 어쩌면 그 자신도 그것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그의 아들이 죽은 후에 발표한 연극에 연옥에서 올라와 아들과 대화하는 아버지를 그렸다. 그리고 그가 말한 감옥이라는 대사는 햄릿의 말에도 반복된다. 햄릿의 세계는 연옥인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사실은 지옥도 천국도 아닌, 표면과 실재의 관절이 어긋난 시공간이라는 점이다. 감옥은, 연옥은 다른 곳이 아니다. 그렇기에 햄릿은 ‘덴마크는 감옥’이며 ‘선과 악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내 생각이 그것을 만들어낸다. 내게는 그것이 감옥이다.’라고 말한다.

king of infinite space / quintessence of dust

초반부 대화 장면에서 햄릿의 유학 장소가 암시된다. 그곳은 비텐베르크이다. 비텐베르크는 독일의 도시로 바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세계의 역사를 변혁시킨 사건으로 그로 인해 신교와 구교가 분리되었고 (루터의 의도와 별개로) 개인의 탄생에 기여하게 된다. 왜냐하면 루터는 구원의 새로운 척도로 양심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교회나 권위자의 판단이 아닌 각 개인이 스스로를 판단하는 양심이 루터에게는 구원의 기준이었다. 비텐베르크에서 유학하는 햄릿이라는 존재는 이렇게 또 하나의 층을 얻는다. 햄릿은 지식인이고 신교가 탄생한 곳에서 수학했다. 근대를 개인의, 주체의 탄생으로 읽어낸다면 햄릿에 그 주체성은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울증 환자답게 햄릿은 무한 공간의 왕인 인간에 대해서 다시금 먼지의 정수라는 말을 한다. 무한 공간의 왕인 인간 하지만 동시에 먼지의 정수인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words, words, words.

말, 말, 말. 폴로니어스가 광기를 가장하는 햄릿을 떠보자 햄릿이 남기는 말이다. 이 연극을 정의하는 더 정확한 단어가 있을까? 말 그대로 이 연극은 말, 말, 말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햄릿은 말이 많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의 죄가 말이 많은 것이었는가? 오(이)대(푸)수의 죄는 그 자신을 모르는 것이었다. 역시 말을 너무나 많이 하는 이 등장인물들은 스스로에 무지하다. 햄릿 역시 말을 내뱉고 말을 듣는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를 기표와 기의로 분류했다. 기표는 ‘사과’ ‘apple’이고 기의는 기표가 가리키는 바로 그 대상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덴마크는 감옥이고 온 세상이 그렇다. 결국 이 세상은 기표로 가득 찬 곳이다.

To be or not to be

인류사상 가장 유명하고 위대한 구절. 동시에 수많은 영어권의 학생들을 괴롭힌 구절이다. 3막에 등장하는 이 독백이 가지는 문화사적인 가치, 의미에 대해서는 수많은 말들이 오가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이 구절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무슨 번역을 해도 다채로운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바 나는 감히 이 구절을 존재냐 부재냐라고 옮길 듯하다. 많은 이들이 햄릿을 읽으면서 지적하는 부분은 햄릿이 우울증 환자라는 것이다. 햄릿은 그의 아버지가 살해되었음을 알기 전에도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하나이다. 그것은 자살이다.’라고 알베르 카뮈가 말했다. 그보다 몇백 년 앞서 아들을 잃은 천재 극작가는 (아마도 우울증을 앓으며) 이 주제를 고민한 듯하다. 죽음을 개인이 정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은 그의 전작들인 리처드 2세와 줄리어스 시저에서 반복되어 제시되었다. 그렇게 발전한 인간의 내면성을 언어와 이미지로 표현하는 방법론은 햄릿에서 역사의 절정에 도달한다. 이 독백이 가지는 무진한 영향력은 근대적 인간의 제시에 있다. 단테가 라틴어가 아닌 피렌체 속어로 신곡을 시작한 1321년과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한 이래로 햄릿은 근대적 정신의 완결자로 존재하고 있다. 생과 사를 햄릿은 결정하고 싶어 한다. 여기서 햄릿은 무엇을 바라는가? 이 독백이 삶에 대한 결정권을 개인이 쥐고 있다는 발상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한 채로 다시 읽어본다면, 앞에 언급했듯이 양심이라는 단어가 루터와 셰익스피어에게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명확해진다. 지금 햄릿—셰익스피어는 인생과 인간이 무엇인지 고뇌하고 있다. 존재냐 부재냐라는 번역에 정당성을 더한다. 햄릿의 독백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수많은 질문들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살 가치가 있나? 죽음과 삶은 무엇인가? 그리고 구원은 어디에 있고 나의 양심은 무엇인가? 여러 질문들이 휘몰아치면서 던져지는 이 구절들은 단순히 우울증 환자의 자살 충동이 아닌 삶과 죽음에 관한 실존적인 의제가 된다.

wretched state

비참한 신세라는 단어는 클로디어스가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괴로워하는 본인을 자칭하는 대사이다. 하지만 wretched라는 단어는 어머니—거트루드가 아들 햄릿을 부르던 단어이기도 했다. 이 장면의 아이러니와 장면, 이미지 설계는 가히 전설적이다. 햄릿은 여기서 복수를 유예한다. 왜냐하면 클로디어스의 영혼을 회개하고 있을 때 죽임으로써 지옥으로부터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수를 망설이는 자신에 대한 자기 변명인지 아닌지는 차치하자. 중요한 것은 햄릿이 클로디어스와 자신이 같이 ‘비참한’ 존재임을 잊었다는 것에 있다. 햄릿은 신이 아니다. 누구도 그에게 누군가를 지옥에 보낼 권리를 주지 않았다. 이 장면은 완전한 복수를 위해 복수를 지연하는 아이러니를 제시하기도 하나 동시에 햄릿의 도덕적 추락을 예비하고 있다.

what have thou done? / nay I know not.

햄릿은 어머니와의 대화 중 격정을 표출하고 그런 격한 상태에서 ‘쥐새끼’ 폴로니어스를 죽인다. 어쩌면 이 순간이 햄릿이 가장 추락한 순간이다. 그는 어머니를 공격하고—혹자는 이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해석할 수도 있다.—폴로니어스를 우발적으로 살해한다. 이성적이고 고뇌하던 그이지만 결국 종종 보이던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른다. 자신을 지탄하는 어머니는 ‘무슨 짓을 한 것이냐고’ 묻지만 햄릿은 ‘저도 모릅니다.’라고 답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사에서 햄릿은 너무나 빠른 결혼식을 지탄하고 어머니의 욕망을, 동시에 아버지를 죽인 자와 동침하는 근친상간을 공격한다. 이렇게 거트루드에게 햄릿이 격정을 토해내는 순간, 아버지의 유령이 등장한다.

remember me / speak to her.

아버지의 유령이 처음 햄릿과 대면했을 때 남긴 말은 ‘날 기억하라’였다. 1601년에 아들을 잃은 극작가는 죽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는 말로 ‘remember me’라고 한다. 2017년 멕시코를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에서 한 아버지는 딸에게 역시 똑같이 말한다. 기억.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고 후에 다룰 것이다. 나를 끝없이 경탄하게 만드는 것은 셰익스피어가 보이는 경이로운 보편성이다. 햄릿과 코코를 관통하는 대사—remember me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셰익스피어가 보이는 통찰력이 어느 수준인지 다시금 깨닫게 한다. 햄릿이 자신의 조언을 무시하고 본인을 잊고 추락을 하던 순간,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리고 전한다. ‘어머니에게 말해라’라고. 거트루드는 자신의 죽은 남편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햄릿은 본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말하라는 그의 전언을 이해한다. 아버지의 유훈은 다름 아닌 어머니와의 화해에 다름 아니다. 유령을 떠나보낸 후 햄릿은 어머니에게 말한다. ‘나를 용서해달라고’ 그리고 ‘잔인하게 대했지만 그는 자신의 사랑 때문이었다고’ 그렇게 그는 어머니와 화해한다.

Good night, mother.

자신이 폄하하던 폴로니어스를 lord라고 부르는 햄릿. 그는 명확히 영혼의 바닥으로 침전했다가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햄릿은 그는 이 죽음에 대한 책임도 지겠다고 말한다. 이 순간이야말로 햄릿이 영웅인 이유고 이 비극이 아름다운 이유다. 가장 밑바닥으로 전락한 순간 햄릿은 다시 일어서고 인간성을 회복한다. 그리고 말 그대로 책임을 지기로 한다. 이에 어머니는 ‘믿어도 좋다’라는 말로 화답한다. 그리고 햄릿은 쉽사리 인간을 심판하려던 존재에서 화해와 용서를 한, 다정한 존재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인사를 건넨다. ‘Good night, mother.’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중요한 장면에 주로 그러듯이 이 장면에도 햄릿이 폴로니어스의 시체를 끌고 가는 행위가 명시되어 있다. 이 아름다운 화해의 순간에 햄릿이 저지른 죄가 결합되어 있고 햄릿은 그의 말대로 이에 책임을 질 것이다. 그게 인간이고 인생이기에.

the king is a thing — of nothing

폴로니어스의 시체를 숨긴 햄릿에게 옛 친구들이자 이제는 왕의 간첩인 로젠크랜츠와 길덴스턴이 다가와 추궁한다. 여기서도 햄릿은 수수께끼 같은 말장난과 대화를 반복한다. 대표적으로 시체란 흙먼지와 사촌이다.라는 대사이다. 흙과 먼지는 인간의 죽음을 표징하는 것으로 자주 사용되었던 바 동시에 전도서의 구절인 ‘모든 것은 다 먼지이며 다 먼지로 다시 돌아간다’를 인용한다. 이는 폴로니어스의 시체에 대한 언급인 동시에 인간의 필멸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 동시에 실질적으로 진짜 죽음이 극에 나타난 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실재로서의 죽음을 관객과 햄릿 모두 체감하게 만든다.

지속되는 햄릿과 그들의 대화, 다시금 제시되는 먼지와 몸의 은유. 햄릿은 왕이란 물건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 왕은 무엇인가. 클로디어스인가 아니면 본인의 아버지인가 혹은 정당한 자기의 자리인가. 답은 그 셋 모두이다. 햄릿은 이제 그들 모두가, 앞에 제시된 비유—무한 공간의 왕—까지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disease

질병. 왕 클로디어스는 극심한 병에는 극약 처방만이 남았다고 한다. 병과 부패의 이미지는 햄릿에 반복되는 중추들 중 하나다. 병과 감염, 부패의 이미지는 인간성과 세계에 침투해 있는 것으로 제시되며 선왕의 살해 수단 역시 독약이었다. 그리고 리어 왕이 동물의 이미지들이 다양하게 제시되는 것처럼 햄릿은 다채로운 병리적 단어들이 있다. 3막과 4막에서도 마찬가지. 클로디어스의 회개 장면이나 햄릿의 어머니에 대한 폭언 등… 지금 극작가의 눈—혹은 햄릿의 눈에는 세상과 인간은 병들어 있다. 그리고 극약 처방으로 클로디어스는 햄릿의 영국으로의 추방을 빙자한 암살을 명한다.

go softly on.

덴마크에 노르웨이의 왕자 포틴브라스가 등장한다. 포틴브라스에 대해서 이 글에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극의 초반부에서 등장인물들에게서 설명되어 왔다. 셰익스피어는 왜 이 인물을 이 햄릿의 왕궁 복수극에 등장시켰는가? 먼저 이 인물에 대해 말해보자. 포틴브라스는 현 노르웨이 왕의 조카이다. 포틴브라스는 1막 1장에서 덴마크가 전쟁 준비를 하는 이유였다. 클로디어스는 이를 외교로 정리한 듯했다. 포틴브라스는 아버지 햄릿이 이기고 영토를 가져온 왕의 아들이다. 이런 설정들로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햄릿과 대조되는 캐릭터라는 것이다. 노르웨이 왕자 포틴브라스의 진군은 본인 아버지에 대한 복수이다. 이 두 왕자는 각자의 복수를 하고자 한다. 여기서 다시 물어보자. 복수란 무엇인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과 셰익스피어의 햄릿, 그리고 박찬욱의 영화들까지 복수는 무엇이길래 지속적으로 변주되는가. 이에 대해서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런 말을 남긴다. ‘지나간 것은 사라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다. … 그러니까 과거를 두고 애쓰는 자는 자신을 가지고 장난하는 것에 불과하다. 복수를 궁리하는 자는 자신의 상처를 날 것으로 남긴다.’ 복수는 과거가 현재로 남아 미래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든다. 과거가 현재로 남아 있는 것. 그것이 기억이다. 결국 복수는 과거를 잊지 못하고 미래로 가지 못하는 자가 하는 것이다. 결국 햄릿과 포틴브라스는 과거에 얽매인 존재들이다. 이제 왜 셰익스피어가 포틴브라스를 등장시켰는지 알 수 있다.

the question of this straw

지푸라기만 한 문제. 햄릿은 포틴브라스의 행군을 보고 장교에게 묻고 장교는 그가 별 가치가 없는 땅을 정벌하려고 간다고 말한다. 이는 거짓이다. 이 행군은 덴마크를 정벌하려는 포틴브라스의 위장에 다름 아니다. 이 역시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햄릿은 이 실리적인 군사적 행위에 관심 없다. 이를 지푸라기 같은 문제라고 하며 종양이고 속으로 썩어도 겉은 멀쩡하면서도 사람이 죽어도 왜 죽는지 모르는 병이라고 정의한다. 이 구절에는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와 병의 이미지, 햄릿이 세상에 가지는 환멸이 다 드러난다.

what is a man?

햄릿의 마지막 독백이다. 햄릿은 여기서 포틴브라스와 교차한다. 그들은 닮았지만 햄릿은 사유를 부유하는 동안 포틴브라스는 실제의 땅을 지배하고자 한다. 이 스침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햄릿의 이 독백은 마지막이다. 자세히 살펴보자. ‘일생을 먹고 자는 것에만 쓴다면 인간이라는 게 뭐냐?. 짐승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이 대사는 리어 왕에서 리어의 대사—인간이 필요한 것만 가진다면 짐승과 다르지 않으리라—와 유사하다.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생존이 아니라 삶이다. 햄릿의 존재냐 부재냐라는 질문이 무엇을 물었는가? 삶이 무엇인지, 살 가치가 있는지를 고뇌하고 있었다. 햄릿은 이제 그 질문에 답을 내리는가? ‘인간을 만들고 그 인간에게 앞과 뒤를 동시에 볼 수 있는 능력을 준 신은 그 능력, 신과도 같은 이성을 쓰지 않으라고 주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짐승마냥 잊은 것인가?’ 이성. 이 이성은 과거를 볼 수 있으면서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복수는 현재와 미래를 과거에 묶는 것이다. 여기서 햄릿은 뒤돌아본다. 결국 그는 깨닫는다. 바로 그를 막고 있던 것이 만사를 따지는 소심한 신중함임을. 햄릿은 이제까지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를, 완벽한 복수로 대변되는 완전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가치가 없는 땅을 향해 전진하는 군대를 보면서, 햄릿은 결심한다. 명예가 걸린 일—즉 먹고 자는 것 너머의 일—이라면 지푸라기 같은 일이라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햄릿은 해변가에 서 있다. 이 바다는 수평의 바다고 수직의 성이 아니다. 같은 경계의 공간이지만 망루가 아니다. 광활한 바다를 보며 햄릿은 나는 어디에 서 있는지를 자문한다. 그는 병사들이 조그만 땅덩어리를 위해서 나아가는 것을 본다. 사실 이는 위장된 전략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햄릿은 과거와 미래를 내다보면서 본인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근심이 기표와 기의의 일치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이, 완벽에 대한 불가능한 바람이 현재를 제한하고 있음을 자각했다. 이제 그는 먹고 자는 것 너머의 일—그의 말대로라면 명예를 위해 나아간다.

naked

왕의 명언대로 영국을 향하던 햄릿. 여기서 해적을 만나는 좌충우돌을 겪고 기실 이 추방이 영국과 결탁해 본인을 암살하려는 왕의 음모임을 알아낸다. 햄릿은 이전과 다르게 바로 행동에 나서고 왕에게 편지를 보낸다. 맨몸으로 덴마크로 귀환하고 있다고.

햄릿에서 반복되는 모티브는 옷이다. 여기서 외적인 이유를 설명하자면 당시 연극은 문화의 지배종이었으며 현대의 영화와 같이 여러 계급을 아우르는 매체였다. 하지만 그런 인기가 있음에도 당연히 시대의 한계에 따라 무대 장치에는 한계가 많았다. 이를 메운 것이 옷이다. 실제로 화려한 무대 의상은 극단의 재산이자 무대의 연출에 핵심적인 것이었다. 그렇기에 햄릿에서 옷의 모티브가 반복되는 이유는 추측이 된다. 하지만 내적으로도 연극에서 옷은 중요하다. 폴로니어스가 레어티스에게 하는 충고인 ‘복장으로 사람을 아는 수가 많다.’와 오필리어가 햄릿의 광증을 묘사할 때 그의 어지러운 옷차림새를 지적하는 장면들이 그렇다.

옷의 모티브는 실재와 표층의 간극을 드러내는 것이다. 작중 표현대로 덴마크 그러니까 세상은 병들었고 감옥이다. 그 이유는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지 않는 부조리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햄릿은 이 부조리의 세상에 방황하는 개인이다. 그리고 이 옷의 모티브는 햄릿이 영국에서의 귀환을 알리는 편지에 드러난다. ‘naked’라는 표현은 그가 알몸으로 정확히 말하면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는 상태로, 진실된 상태로 거듭났음을 드러내고 있다.

poor Yorick

햄릿과 호레이쇼는 오필리어의 무덤을 파는 광대들과 조우한다. 여기서 셰익스피어의 천재적인 언어 유희가 빛나는 바, 그의 특징인 희극과 비극을 섞는 능력, 믿기지 않는 이미지 창조력과 함축성이 드러난다. 대표적인 이미지가 요릭의 해골을 든 햄릿이다. 요릭은 어린 시절 햄릿과 함께한 광대이다. 이 해골을 든 햄릿은 다시금 먼지의 이미지를 끌어올린다. 호레이쇼에게 알렉산더가 먼지가 되었는지 묻는다. 먼지. 햄릿은 인간의 끝을 말한다. 광대이든 전설적인 알렉산더이든 먼지로 돌아간다.

this is I, Hamlet the Dane

나. 덴마크의 왕. 햄릿이다. 오필리어의 장례식에서 주요 인물들을 마주한 햄릿. 그는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이 선언은 무엇을 의미할까? 글에 적지는 않았지만 햄릿은 작중 내내 아버지를 신화화한다. 왕의 자리에 대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햄릿이 왕의 자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드러난다. 햄릿은 본인에 대한 고뇌를 하고 왕의 자리에 본인이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무엇보다 아직 본인의 자리를 주장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것인 아버지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초반 왕과 왕비가 말한 망각이 아니다. 햄릿은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거기에 침전되어 있지 않다. 이제 그는 과거를 기억하면서 받아들였다. 그는 어디에 서 있는가? 현재에 본인의 자리에 서 있으면서 본인의 정체성을 주장한다.

enter Hamlet and Horatio

5막에는 무엇이 없을까? 독백이 없다. 대신 대화가 있다. 햄릿과 그의 진실된 친구 호레이쇼와의 대화가 있다. 왜? 이제 햄릿은 자폐증에 가까운 상태에서 벗어났기에. 이제 진실된 친구와 진실된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었기에 본인의 호두알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아갈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대화를 보자.

interim is mine

그 사이는 나의 것. 햄릿은 이제 앞과 뒤의 사이에 있다. 즉 과거와 미래의 사이에 서 있다. 현재에 서 있다는 말이다. 햄릿은 사람의 인생은 하나를 세기도 전에 끝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짧은 인생에서 그 사이의 순간은 햄릿의 것, 그리고 우리의 것이다. 호레이쇼가 말하지 않았는가. 순간을 붙잡으라고.

let be

자 모두들 to be or not to be는 안다. 그런데 그 독백이 대화의 let be라는 답을 낸다는 것은 잘 모른다. 햄릿은 레어티스와의 결투를 앞두고 예감이 좋지 않다는 말에 이렇게 답한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에도 섭리가 있다….. 지금 그대로 두자고’ 마태복음을 인유한 이 구절은 숭고하고 아름답고 비극적이고 영웅적이고……. 셰익스피어적이다. 이제 햄릿은 독백을 하지 않는다. 대화를 한다. 그리고 햄릿은 말한다.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이는 체념이 아니다. 햄릿은 기표와 기의의 불화에, 병든 세상에, 덴마크라는 감옥에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는다. 이제는 본인의 완벽에 대한 집착에 고통받지 않는다. 이제 그는 삶을 수용한다. 이 시간의 관절이 어긋난, 부조리한 삶과 인간성을 그대로 대면한다.

tell my story

이 황량한 세상에 살아남아 고통스러운 삶에서 내 이야기를 전해줘. 햄릿이 호레이쇼에게 전하는 대사다. 연상되는 것은 햄릿의 아버지의 말—날 기억해라이다. 햄릿의 인물들은 크게 두 부류다. 망각하고 망각을 종용하는 자—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 그리고 과거에 사로잡힌 자—중반부까지의 햄릿. 햄릿이 호레이쇼에게 당부하는 것은 둘 다 아니다. 이야기를 전해줘. 이야기를 전한다는 것은 과거를 미래에 전달한다는 뜻이다. 이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품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는 뜻이다. 햄릿이 그의 친구에게 전하는 애정 어린 충고이다. 황량한 세상의 고통스러운 삶을 영위하면서 과거를 잊지도 거기에 포박당하지도 않으면서 이야기를 하라는 뜻이다. 이야기는 청자와 화자를, 과거와 미래를 연결한다.

The rest is silence

남은 것은 침묵이다. 이 말, 말, 말로 가득한 비극을 침묵으로 갈무리하는 왕자 햄릿이다. 하지만 극은 이어진다. 포틴브라스가 등장해 예포를 쏘아 올린다. 이는 햄릿에 대한 추모이지만 동시에 그의 복수와 덴마크의 정벌에 대한 축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극 초반부 연회의 축포를 떠올리게 한다. 햄릿은 떠났지만 세상은 그대로일까? 셰익스피어는 여기서 또다시 모호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햄릿은 세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영웅답게 죽었다. 하지만 과연 세상은 변했을까? 남은 호레이쇼는 어떻게 살아갈까? 셰익스피어는 늘 그랬듯이 확정하지 않는다. 남은 것은 침묵이기에. 그리고 이 모호함이, 희망과 고통과 의미와 무의미가 섞여 있는 것이 삶이기에.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이미 수없이 말해졌다. 서두의 인용처럼 그는 영어와 근대, 극과 문학을 바꿔 놓았다. 그는 단순히 위대한 작가가 아니다.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입센과 체호프조차 그를 넘어섰다고 말하기 어렵다. 몰리에르와 라신, 코르네유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극 속에 구현한 인간성의 깊이와 폭은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에서 겨우 한 번 도달한 지점과 닿아 있고, 조이스나 프루스트조차 그 주변을 맴돈다.

괴테의 메피스토텔레스는 맥베스나 이아고, 에드먼드의 입체성에 비하면 여전히 문학적 장치에 가깝다. 파우스트의 내면 역시 햄릿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다. 언어와 근대에 끼친 영향이라는 점에서 단테가 떠오르지만, 『신곡』의 순례자 단테 역시 셰익스피어가 만들어 낸 인간 군상과 비교하면 단일한 의식에 가깝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멜빌, 포크너, 플로베르, 스탕달… 그 거대한 이름들 역시 어떤 식으로든 셰익스피어 이후에 서 있다. 누구도 그가 오른 높이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셰익스피어의 상상력은 낯선 곳보다 익숙한 곳에 있었다. 그는 비범함을 추구하기보다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드러냈다. 그의 극은 일상을 떠나 형이상학의 홀로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잡담, 사소한 사건, 우스운 놀이 같은 것들 위에서 인간을 드러낸다.

비평가들은 손수건 같은 사소한 물건이 비극의 중심에 놓이는 것을 비웃었다. 학자들은 로마인들이 런던 노동자처럼 모자를 던지는 장면을 못마땅해했다. 톨스토이는 늙은 리어가 황야를 떠도는 장면에서 숭고함보다 도덕적 반감과 미학적 거부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고전주의자들은 그가 무시한 규칙을 문제 삼았고, 그의 부족한 라틴어와 그리스어 실력도 비판했다. 동시대 극작가들 역시 그를 시골 출신의 벼락출세자로 여겼다.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그 자리에 도달했다. 그는 일상과 사유를 나누지 않았고, 비극과 희극을 분리하지 않았으며, 인간과 삶을 따로 두지 않았다. 서로 충돌하는 것들을 한 극 안에 함께 놓았다.

그래서 그의 극에는 인간이 있다. 그리고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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