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스트릭랜드는 영국의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가장의 책임을 버리고 집을 나간다. 고생하며 떠돌다가 타히티 섬의 아름다운 파라다이스를 발견하고 마침내 있어야 할 곳에 도달한다. 거기서 몇 해를 살다 한센병에 걸려 죽는다. 그의 삶과 죽음을 무신경하고 경솔하게 말한다면 '평범한 가장이 갑자기 그림을 그린다고 가정을 버리고 떠난다. 그리고 고생하고 떠돌다가 어느 섬에서 죽었다.'는 말로 끝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스트릭랜드가 가졌던 내면의 기쁨을 모른다. 멈추지 않고 자기를 발견하려 노력한 그 투쟁을 모른다. 그건 매일의 눈물과 배고픔으로 점철된 고통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존재를 찾는 여정의 흥분에 매일 설레었을 것이다. 그 어떤 고통도 비교되지 않을 자기-예술에 대한 희망과 감동. 점점 자기에게로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
강렬한 의미가 그를 감쌌다. 죽음 앞에서 그린 집안의 벽화 앞에서 그는 자기완성을 보았다. 그림으로 육화 된 그의 육신이 놓여있었다. 그는 자기를 창조했다. 자기 손으로 그 모든 인생을 걸고 달성한 그의 자기-예술 앞에서 그는 행복했다. 죽기 벌써 1년 전부터 한센병으로 인해 보이지 않게 된 눈으로 그는 매일 그림을 주시했다. 그에게는 보였다. 생생한 자기 존재가. 자기 자신이 예술이었다.
그가 떠나왔던 영국의 아내와 자식들은 그를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자기가 된다는 것이 뭔지 모른다. 그들은 타인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만 관심 있는 평범한 족속들이다. 유행을 따라 꾸민 집안의 장식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결과이다. 그러나 그게 자기 남편의 육신인 것은 모르고 있다.
진부하고 상투적인 말을 쉽게 한다. 어떤 이들은 그걸 혐오한다. 그건 당신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그렇다. 당신의 글과 말과 그림에서 당신의 육신은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아무것도 담아내지 않았다. 당신은 삶에서 아무것도 내던지지 않았다. 타인을 게워내고 자기를 채워야 했다. 자기-예술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 의미가 있겠는가.
동정심이 들 것이다. 진리와 아름다움을 쫓는 것이 인간이다. 이것이 인간임을 알아챈다면 그의 고투에 동정심을 가질 것이다. 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다. 일상으로 돌아가서 타인들로 채워지는 자신으로 살다가, 어쩌다 다시 그 그림을 보고 존재의 의미를 알아챌 것이다. 그리곤 잠깐 조급함이 들었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또는 그림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래도 뭔가 느낀 척 고상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미술관 문을 나설지도 모른다. 미술관 관람료로 할 수 있었던 다른 대안들을 생각하고는 몇 푼의 관람료가 아깝다고 느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