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의 이름은...
요즘에는 기타를 배우고 있다. 이것은 상상했던 만큼 지루한 일인데, 나는 딱히 배우고 싶어서 기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뭐랄까, 한량의 삶에서 물결을, 물장구를 치기 위해 거의, 그러니까, 물 위에 떠있는 삶 치고 그런 해엄 치지 않으면 떠있는 삶이 어떻게 의미가 있으랴? 그러므로, 악기를 배우는 일은 상당히 무의미하다는 감상만 남기고 이 문단은 거품의 속으로 나는 사라지게 하리라.
우리가 평론을 한다는 것은 막연하다. 이봐요 거기 당신. 작품을 평론 좀 해봐요. 아니, 이 양반이, 작품을 써서 잘 된 적도 없는데 뭔 작품을 평론을 해?
그러나 당신은 작품을 읽고 쓰라린 듯한 감동의 물결이, 아침 녘의 물기가 가득 찬 공기를 들이마시고 소스라치게 놀리게 하는 숨결, 연달아 열다섯 시간을 자고 일어났을 때, 그런 때의 뇌 속의 작은 씨앗을 기억하고 있는가? 반복하자면 작품은 마음으로 읽는 것이고 평론은 뇌 속까지 그걸 싹 틔우는 것이다. 과연 신경화학자가 하는 일에 평론은 비견될 법하다.
나는 한숨을 쉰다. 세계와 문학이 가지는 그 사이의 희미한 틈새를 바라본다. 이것과 저것의 화성처럼, 이해할 수 없는 멜로디 하나가 공간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것의 이름은 문학 평론이다. 관능과 인생과 분노와 동성애, 근친상간, 이를 테면 그것은 다른 쪽 극단의 엄숙함으로만 나에게 그런 작품들은 보인다.
이 작품을 내가 이해했는가? 전혀 아니다. 하지만 소화시키지 못한 내용물을 역류시켜 토해내듯 싸지르고 뱉어낸다. 이것의 빛깔을 잠시 보아하니, 아차, 평론이다.
누구에게도 논할 수 없는 것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그것을 논하는데 또 다른 자기 자신이 하나 더 필요하다는 역설, 남자와 여자로, 신과 인간으로, 벌레와 곤충으로, 물건과 생물로, 존재와 그렇지 않은 것, 오성과 느낄 수 없는 것, 이성과 생각할 수 없는 것, 감성과 기뻐할 수 없는 것. 그렇게 세계를 온통 두 극단으로 갈라서, 한쪽에는 나를, 또 다른 나는 수많이 변용하고 탈태시키며 그들을 앉도록 한다.
아차, 평론이다.
... 그런데 악기를 배운다는 것의 좋은 점은 뭘까...? 나는 무기를, 아니 악기를 들고 전장으로 나선다. 악기도 나를 택하지 않았고 나도 이 악기를 따로 택하지 않았다. 이 악기의 이름이... 프로이트이다. 나는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을 참 좋아한다. 나는 '꿈의 해석' 한 권을 읽었고 그 외에는 이 악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도 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악기 없이 음악을 한다고 하면 무척이나 난해하지 않겠는가? 해묵은 이론이다. 터무니없는 체계이다. 하지만 내게는 악기가 이것밖에 없다!
문학이란 또 다른 하나의 세계라고 우리는 겸허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문학과 등에 짊어지고 있는 악기만 생각해야 한다. 거기에 미쳐있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