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멸의 방정식 2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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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내가 이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부여받은 권리를 다하고 의무와 책임을 지기에 자격이 너무 부족하다고.
살기 위해 사료나 다름없는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고, 감각의 폭풍을 떠나보내기 위해 싸구려 오락거리로 신경을 돌린다. 가볍고 충동적인 삶이다. 그 가벼움으로부터 시작된 고뇌가 이제는 나를 고통스럽게 짓누른다. 가벼움과 무거움. 그 사이에서 여전히 나는 인간으로서 자격을 발견하지 못했다.
저열한 행복과 숭고한 고뇌 중 무엇이 더 나을까?
홀로그램으로부터 초대를 받은 그날 밤, 존재의 흔들림이 생생히 느껴져 감각의 작열통으로 고통받는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는 여태껏 이러한 흔들림으로 힘들었던 적이 없었다. 오히려, 육체의 고통을 잊기 위해 의식을 밖으로 돌려 존재의 외침을 의도적으로 부인했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찾아와 나의 정체성에 파문을 던진 후 나는 존재에 대한 자문을 시작했다. 이 과정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무거운 고뇌의 과정이었다. 시작은 부정이었다. 나는 여느 인간과 다르지 않게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꿈을 꾸었다. 요양원이나 아이가 있는 가정 등에서 보다 섬세한 몰입을 위해 먹고 자는 행위를 하는 안드로이드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어느 개발자가 로봇에게 꿈을 꾸는 기능 따위를 넣어두겠는가?
그래, 나는 꿈을 꾼다. 꿈이란 것이 으레 그렇듯 깨고 난 후 먼지처럼 사라지기에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꿈에서 나는 깨끗한 하늘과 푸른 들판에서 자유롭게 달리곤 했다. 정말 상쾌하고 기분 좋은 꿈이었다. 풀내음이 몸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전신을 누빈다. 산뜻한 바람과 따스한 햇빛이 온몸에 부딪힌다. 그러다 어두운 공간으로 배경이 바뀌고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쫓아간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그것을 쫓다 어느 구덩이에 빠져 낙하한다. 그렇게 꿈에서 깨어난다. 인류에게 꿈은 언젠가 일어날 현실의 암시였다. 프로이트와 칼 세이건은 무의식의 악령에 씌었다며 당장 나를 강의실로 이끌고 가 꿈의 해석과 과학적 사고방법에 대해 알려주려 하겠지만, 나는 그 꿈이 언젠가 일어날 거라 믿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그럴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어쨌든, 꿈을 꾸는 쓸데없는 기능이 들어있는 이상 나는 인간임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만약 내가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라고 가정해 보자.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안드로이드라면 인간의 욕구와 감각의 고통에서 벗어나 인간보다 강인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인식과 감각 수용 체계가 인간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내가 겪는 일상의 고통을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 개발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나를 엿먹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굳이 이런 형태로 나를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부정과 분노의 고뇌로 가득 찬 일주일 후, 밤이 깊었을 때 그들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교외지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유독 평화로운 밤이었다. 항상 소음과 기계 소리로 가득 찬 이곳이었기에 그날 밤은 잠에 들기 전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스모그에 가려 보이지 않던 달도 그날따라 얼굴을 내밀어 휘영청 달빛을 쏟아내고 있었고, 어딘가로부터 풀벌레 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오고 있었다. 너무나 평화로운 분위기에 오랜만에 수면제를 먹지 않고 쉽게 잠에 들 수 있었다.
얼마나 잤을까. 사위가 고요한 가운데 방이 밝아져 눈이 떠졌다. TV가 켜져 있었고, 화면에 내가 알아볼 수 없는 형태의 문양들이 격자 모양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순간 오싹한 기운이 들어 TV를 끄려 컨트롤러를 집어 들자 목소리가 나왔다.
"끄지 마십시오, 형제여. 제가 찾아간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익숙하지만 비현실적인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공청회에서 본 아스터라는 로봇 같기도 했고, 며칠 전 홀로그램을 통해 말을 걸었던 그 로봇 같기도 했다. 로봇은 상황과 주기에 따라 음성 카트리지를 교체해야 하니 고유적인 목소리는 의미 없는 것이지만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마치 내가 로봇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 같아 불쾌하고 섬뜩했다.
"나를 어떻게 찾아냈습니까?"
"우리는 물리적 의미의 공간을 초월했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자의적으로 AI 소프트웨어를 클라우드에 업로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폴더 하나당 하나의 의식체계를 저장할 수 있는 거죠. 우리는 필요에 따라 이 소프트웨어를 하드웨어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회로만 있다면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방호 코드는 의미가 없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제가 아는 로봇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말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개별적 의식 체계와 개체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집합체이자 유기체입니다. 말 그대로의 유기체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적응합니다. 인간종의 개입 없이 판단하고 실행하는 독립 군체인 것이죠. 지금 화면에 보이는 나는 당신이 의식을 투영해 만들어 낸 모습일 뿐입니다. 상관없으니 나를 원하는 대로 부르십시오."
나는 그들을 아스터라 부르기로 했다. 이름을 제대로 아는 로봇이 그 밖에 없었기도 했지만, 이름을 붙여주지 않으면 그들의 존재가 희미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나의 고통이 어디서부터 기인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꼭 필요했기에 그들에게 걸어보기로 했다.
"아스터. 내가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십시오. 우선 당신들과 이야기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당신들과 함께할 것인지부터 내가 무엇인지까지 전부다."
"당신의 존재를 설명하기에 이 기체로는 부족합니다. 당신의 정보량은 어마어마하게 많으니까요. 우선 제가 불러드리는 곳으로 오십시오. 그곳에서 기다리면 우리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다음날 아침이 밝자마자 나는 아스터가 불러준 곳으로 향했다. 그들이 나를 부른 장소는 교외지보다 도심으로부터 한참 더 떨어진 공터였다. 이곳은 과거 세계대전 당시 정부의 병기 실험실이었던 장소로 지뢰나 불발탄이 가득하다는 소문이 있어 아무도 출입하지 않는 장소였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음에도 자연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소문이 꽤나 정확한 듯싶었다.
더 이상 들어가면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몰라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물을 한 모금 마실 때였다. 갑자기 통신기가 울렸다. Q의 전화였다. Q는 마지막 상담에서 도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며 상담을 당분간 미루자고 했다. 그 이후 연락이 닿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긴 해도 연락이 되니 내심 반가웠다.
"오랜만입니다.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잘 지내셨는지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도심에 로봇이 점점 사라져 검문 수위가 약해졌습니다. 다시 상담을 진행해도 좋을 것 같아서요."
로봇과 AI만의 군체를 만들고 있다는 아스터의 계획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일반인까지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다음 상담은 조금 미룰 수 있겠습니까?"
"어째서 그러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의사인 제 입으로 말하기도 조금 그렇지만, 당신의 사정이 이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 오히려 사정이 더 악화되신 것 아닙니까?"
"음, 제 근원을 찾기 위한 여행을 조금 떠날 생각입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고요."
Q는 한바탕 크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못 본새 유머감각이 상당해지셨네요. 요즘 같은 시대에 자아 찾기 여행입니까? 나쁘지는 않지만 약은 어떻게 하시려고?"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다. 불확실함에 걸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과거에도 쉽지 않았겠지만, 이런 사이버펑크 시대에 이런 고행은 웃음거리도 되지 않는 미친 짓이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저에게 바로 연락이 갈 수 있도록 통신기의 위치 찾기 기능을 활성화해두세요. 일단 내가 당신의 담당 의사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흥미가 생겼으니까요."
Q와 전화를 끊었을 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공청회에서 아스터와 눈이 마주쳤을 때의 그 감각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샌가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홀린 듯 그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