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 [言語]’ 와 ‘행동 : [行動}’ 을 디자인 하세요.
품격 : [品格] 의 사전적 정의 :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 사물
나에게 ‘품[品]’이란 단어의 의미가 머리속에 깊게 박힌 계기는 바로 이기주 작가님의 ‘말의품격’이라는 책 덕분이었다. 때는 2017년 군복무 시절 군대에선 할짓이 너무나도 없다보니 책이라도 읽어보자 라는 정말 단순한 생각이 내 인생 전체를 뒤흔들 계기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내가 후천적으로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들인 습관 중 어느정도는 내 인생에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 나는 ‘말을 이쁘게 하는 방법’ 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었다. 말을 이쁘게 한다라… 이처럼 추상적인 목표가 또 있을까. 말이란 우리 삶의 근간이 되는 것들 중 하나이며 항상 말을 하고 사는 우리가. -굳이- 무슨 목적이 또 필요해서 이쁘게 해야할까? 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당시 군인 시절 뭐가 그리 잘났다고 좋아하는 이성에게 어떻게든 뭐 하나 어필해 보려고 ‘꽤나 그럴싸한 문장들을 수첩에 적어두는 행위’들을 하며 마치 영어를 처음 공부하는 학생처럼 문장 전체를 외우고, 내뱉고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아주 드문 확률로 그 문장을 말할 기회 혹은 찰나의 타이밍이 있다면 적은 문장 그대로 연습했던 기억에 의존하여 단순히 ‘뱉는 정도의 모습’으로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말을 이쁘게 하는 방법’ 프로젝트는 하늘에 떠있는 구름과도 같은 상상을 갖기 시작하면서 읽게된 책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발췌하며 내가 생각하는 ‘품[品]’의 대하여 이야기를 풀어보도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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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品] 이라는 수준이나 등급을 나타내는 한자의 구조가 흥미롭다. [입 구: 口]가 세 개 모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말이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품성이 된다.
-이기주 작가님의 ‘말의 품격’ 본문 중 한 구절-
나의 글을 꾸준히 읽어온 독자들이라면 내가 얼마만큼 ‘태’를 강조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거라고 믿어의심치 않는다. 축구로 비유하자면 세계 최고의 축구 감독인 펩 과르디올라가 윙백을 전술 포지션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처럼, 영국 명문 축구 클럽 아스날의 오랜 감독 생활을 한 아르센 벵거가 점유율 축구를 구사하던 것 처럼 말이다.
태, 결, 바이브 ,톤앤 매너, 표정, 제스처, 눈빛, 말과 행동, 옷 매무새, 헤어스타일, 손톱, 향, 등등
이런 모든 행동의 디테일한 것들이 축적 되어 그사람의 품격이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태’와 ‘취향’을 찾아 갖는 일은 꽤나 어렵고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퇴적물이 쌓여 퇴적층이 되고 퇴적층이 모여 하나의 층이 만들어지듯이 말이다.
그저 호기심에 구매한 복권이 당첨된 것처럼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끊임 없이, 수도 없이 내 자신을 파악하고 살피고 복기하고 이해하고 받아드리며 불편한 감정까지도 수용하는 하면서 쌓이는,일상에서의 결을 제련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특징을 갖는 일이다.
연희동에 자주 가는 카페, 항상 앉는 자리, 가방을 먼저 두는 행위, 실내에 들어오면 항상 손을 먼저 씻기, 대중교통을 탈 때는 뒷사람이 기다리지 않도록 카드를 먼저 꺼내 놓는 행위, 유독 글씨가 잘 써지는 나만의 볼펜, 볼펜의 굵기, 항상 들고 다녀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하루키의 책, 플레이리스트, 입술 색깔, 사용하는 틴트 혹은 립밤, 아이라인의 방향, 휴대폰 커버, 항상 여분으로 들고 다니는 마스크, 항상 지참하는 향수, 말로 내뱉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행위, 대화의 주제 등등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취향이 묻어있다. 마치 청소는 매일, 매주 하지만 미처 파악하지 못하여 오랜 시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묻은 창틀의 먼지처럼.
너무 많은 디테일들을 이렇게까지 신경 써야 돼? 피곤하지 않아? 라는 말도 자주 듣고는 하지만
이것이 내가 영위하고자 하는 삶의 근간이 되는 것들이라 어느것 하나 쉽게 놓지 못한다.
양손잡이가 아닌 나로서는 당장 힘을 더 보태어 무언가를 한다던가, 손가락 마디 사이사이의 근력을 키워서 더 많은 것들을 들게 할 방도 따위는 존재할 일 없지만 내 한손이 버텨주는 한 나의 근간:[根幹]이 되는 것들과 함께 하고 싶다.
우리가 타오르는 불을 보고 있으면 흔히들 ‘불멍’ 이라 칭하곤 한다. 사실 불이 타오를 때 불꽃 속에는 다이아몬드의 나노입자. 그러니까 원자보다도 작은 단위와도 같은 눈에 띌 수 없는 아주아주 작은 나노입자들이 1초에 150만개가 타들어 하늘로 연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타오르는 불들을 보고 있으면 본능적으로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몇 억개의 아주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나노입자들이 타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멍 때리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불꽃 속 연소되는 아주 작은 입자처럼 우리의 사소한 디테일들을 매순간 분석하고 눈에 보일 수는 없지만 이런 입자들이 새어나와 우리를 타인과 어딘가 다른,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 내리지는 못해도 특별함을 만들어준다고 나는 믿는다.
영혼이나 자아 라고 말하기엔 다소 무거워서 비유할 수는 없을 거 같다. 영혼이나 자아가 스스로 티를 내고 ‘내 자아는 이런 모습이야!’ 라고 어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 티를 내지 않아도 ‘태 : [態]’ 가 나는 사람.
품격이란 태 와 마찬가지로 내 스스로가 티 내고 어필한다고 타인이 알아주는 것이 아니다.
나는 몇년간 서비스직에 종사하며 가장 크게 와닿았던 흥미롭고 재밌는 사실들이 몇가지 있다.
1. 관상은 과학이다.
2. ‘여기 사장 친구 000 입니다 저’
3. ‘저 여기 단골인데요’
4. ‘ 제 이름 말 하면 잘 해준대요.’
우선. 사람의 말 에서 생각과 태도가 ‘표출’된다는 게 상당히 흥미롭다. [표출이란 단어를 쓴 이유를 글을 읽는 ‘누군가’가 이해를 할 수 있다면 글을 쓰고 단어를 선택하고 글에 숨을 불어넣는 나로서는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태도가 올곧으려면 생각과 마음가짐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달리기를 하면서 깨달았다. 이전부터 나의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은 잘 알겠지만 달리기란 그저 단순히 두 발을 힘차게 내딛기만 하면 되는 행위가 아니다.
몸이 힘들다고 느껴지는 순간 정신은 둔해지며 발은 무의식적으로 느려진다 이런 상태로 달리기를 하다간 기록도, 뿌듯함도 느낄 수 없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을 동점처럼 극적으로 뒤짚을 방법은 모든 것을 억지로라도 반대로 되돌리는 것 뿐이다. 힘들다고 느껴지는 나약한 정신이 발까지 전염돼서 느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원천으로 닿기 위해서는 이런 패러다임의 흐름을 ‘역:[逆]’으로 제어할 줄 아는 정신능력이 배양 되어야 한다.
발을 다시 빠르게 내딛고 호흡을 발 속도에 맞춰 빠르게 호흡해준다. 정신은 어딘가 깊은 곳으로 이끌어줄 만큼의 몰입감으로 ‘힘들다는’ 생각이 배제되는 순간 발은 바람에 날려가는 민들레꽃씨 보다도 가벼운 리듬감으로 하늘을 뛰는 기분을 받을 것이다. 단순히 두발을 내딛는 행위만으로도 나의 모든 행동은 생각과 마음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내가 뛰는 행위가 누구나 다 뛸 수 있는 그저 평범한 행위라고 생각과 마음을 가볍게 여겼었다면 그 어떠한 인간관계도, 직업으로서의 프라이드도, 나 라는 사람으로서의 인간미도 절대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나 여기 사장 친구인데’ , ‘여기 누구 지인인데요’, ‘저 여기 단골인데’
‘와 너 인맥 대단하다’, ‘너 주위 대표님들 사장님들 지인들 좀 소개시켜줘’, ‘누구 소개 좀 시켜줘’ , ‘누구 인사 시켜줘’ 이런 사람들은 정말 사람을 ‘인맥’ 하나의 가느다란 -실- 처럼으로만 취급한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아직 닳지 않은 연필심 처럼 조금이나마 이득을 취할 수 있다면 연락하고, 만나고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순간 나름의 쓸모가 다 하면 서서히 닳는 연필심처럼 어느순간 산산조각이 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을 돈으로 밖엔 보지 않는 얄팍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란 걸 느꼈다.
이런 경험에서 나는 말이 곧 태도:[態度]이고 품격:[品格]이라고 이야기 하고싶다.
과연 누가 사람을 단순히 인맥이라고만 칭할까. 나는 분명 이런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이 있을 거라 판단한다.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다. 언젠간 끊어질 인간관계를 돈에 저울질 하며 시소놀이를 한다는 것이.
너 뭐라도 돼?
: 내 이름 말하면 서비스 준대요.
‘간혹가다’ 라는 어쩌다 한번씩을 나타내는 단어로 표현하기가 힘들정도로 빈번하게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내 이름 말하면 서비스 준대요.’, ‘ 내 지인이라 하면 잘 해준대요.’ 와 같은 뜬구름 잡는 말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처럼 여러가지 형태로 받아드려졌다 금방 잊혀진다. 빠른 속도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비행기와 같은 것이다. 본인이 어느정도 인지도가 있으며 어디를 가든 환대 받는다는 것을 티 내고 싶은건지 자랑하고 싶은건지 그러한 발언들을 통해서 얻고싶은 것이 무엇인지 나로서는 알 방법은 없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내가 의도해서 글을 쓰기 나름, 그리고 타인 혹은 독자들이 받아들이기 나름의 차이가 있겠지만 이와 같은 견해의 차이는 일상생활 속에서 어느정도는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라 생각하고 -한편으로는 -굳이 그렇게까지 비난해야 돼? 라는 질타 아닌 질타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고 표현하는 것은 어느정도 인생을 살면서 적지 않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말 친한 사이라면 오히려 피해가 갈까봐 누구 지인이라는 말도 아끼며, 많은 것을 받는게 미안하기도하여 불필요한 부탁이나 귀찮게 할 거 같은 부탁은 최대한 자중하면서도 매너를 지키는 게 대부분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사이라면 오히려 그 공간의 구성원들이 먼저 알아봐주고 더 좋은 서비스와 환대를 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서 나는 ‘티 를 내지 않아도 태 가 나는 사람이 멋있다’ 라는 지금까지 해온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자신의 직급이나 관계 혹은 위상을 높힐 수 있다고 생각되는 말들은 아끼면 아낄수록 매력은 배가 되고 그러한 직급이나 위상은 본인 입으로 나열하는 것보다 본인의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매력적일지도 모른다.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은 시험공부 하겠다고 말할 시간에 이미 공부를 하고 있고, 달리기를 매일같이 꾸준히 하는 사람은 삼삼오오 모여서 조깅을 하면서 그걸 가지고 러닝클럽에 ‘오운완’이라는 해시태그를 거는 것에 목숨 걸지도 않을 것이며 그 시간에 10m를 더 뛰기 위해 발을 내딜 것이다. 사진을 찍으며 인증샷을 남길 시간에 스쿼트 한세트를 더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티 내고 과시하고 본인의 풍요로움에 만족하지 못하고 결핍에 잠식되어 본인이 영위하고 싶은 우아한 모습들, 이상적인 모습들, 아주 일시적인 모습들만을 투영시키고 그것이 정말 현실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들에게 진절머리나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환멸까지 나려한다.
하지만 옛 어른들이 정해놓은 틀 때문에 주위 인맥을 과시하고 싶고, 자랑하고, 시기 질투하고, 티 내고, 자신들이 가진것에 만족하지 못하여 결핍의 골이 깊어지는 악순환의 반복은 과거 어른들이 만든 사회가 이런 현상을 촉진 시켰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느정도는 위로해주고 싶다.
과거 12년의 학창시절부터 획일화된 수업들과 정해진 답과 어른들의 논리로 얼마나 많은 경쟁심을 고취 시켜왔는지 돌아보게 된다. 경계와 증오, 불신 모든것들이 폭력적으로 보이기까지한다.
전교1등을 하면 모든 재학생들을 모아두고 상을 수여하는 문화와 그것을 지켜봐야하는 몇백명의 시선들. 시험이 끝나면 1등 책상에 옹기종기 모여 1등의 시험지와 본인의 시험지를 비교하며 ‘나 정답이다’, ‘나 틀렸다’ 고 단정짓는 행위 역시 개인의 자존감과 취향 개인의 기준은 낮아지고 학교가, 어른들이 정해 놓은 정답들과 그에 가장 도달해 있는 상위권 학생에게만 부여되는 보이진 않는 자격들,시선들
고작 200개 남짓만 질문과 답이 정해진 획일회 된 시험으로 500여명의 학생을 줄을 세우고 등급을 나누어 자기 자신도 모르게 그어지는 한계점들.
그리고 그 한계점이 그대로 성인이 돼서도 전염되는 직장에서의 문제점들과 함께 획일화 되는 개성들.
어쩌면 우리가 과시를 하고 싶어하는 것은 모두가 비슷한 패턴, 비슷한 인생, 함께 쉬는 주말만 기다리는, 월요일은 혐오하는 생활 패턴. 인스타그램에 순기능 오류(좋은 것만 보이고 싶은, 그것이 일상이고 싶은 편집된 삶들)로 인하여 생긴 결핍:[缺乏]들이 아닐까.
내가 일상 생활에서는 영위할 수 없는 생활 라이프를 잠시나마 느껴보고 재충전을 하는 것은 동경과 부러움 혹은 나의 인생을 나답게 잘 살아가자는 긍정적인 자극을 일으키지만, 계속되는 가장 이상적인 취향들의 노출과 일상의 괴리(영위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와 작은 사각형 SNS 안에 나타나 있는 사진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이 안되는데 과연 그 계정에 올라와 있는 삶이 진정 우리의 삶인지? 아니면 보여주고 싶은 혹은 ‘그렇게 보여지고 싶은 삶’인지 스스로가 개인의 존재를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 티 내고 과시하려는 사람들.
과시는 결핍이다. : 결핍은 부족함에서 오는 것이 아닌 만족하지 못하는 오만함에서 파생된다
-본인 스스로가 가장 어필하고 싶은 장점들을 본인 입으로 나열하는 것만큼 밋밋하다 못해 우스꽝스러운일은 더 없을 것이다.
‘내 지인 누구 벤츠 뽑았어. 오늘은 지인이랑 뭐했어. 나 지인중에 지바겐 타는 사람있어. 내 지인 이번에 오피스텔 계약 들어갔어. 내 주위에 누구 잘 나가는데 다음에 인사시켜줄게.’ 등등 주위 사람들에 대한 자랑만 나열하는 사람들, 이런 말만 해대고 정작 자기자신의 대한 복기와 새롭게 셋업하는 루틴은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는 사람들과는 이젠 멀리하고싶다. 진절머리가 나다 못해 얘 또 지랄이네. 싶을 정도로 주위에 대한 자랑을 자신의 자랑처럼 스스로가 나열하는 것 만큼 우스꽝스러운 일은 더 없을 것이다.
본인의 차가 모닝이든 랜드로버이든 나로서는 전혀 신경 쓸 일도, 시기질투를 하거나 부러워 할 만한 아니다. 그런데 굳이. 굳이. 저 발렛 차 랜드로버 맡겼어요, 라는 말과 함께 과시하는 것을 볼 때면 저 사람은 자랑할게 저거 밖에 없나? 라는 생각 말고는 드는 거라고는 불쌍하다는 감정으로 가득찬다.
과거에나 현재에나 그래왔던 것처럼 자존감과 자기과시의 경계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경계선 처럼 미묘하게 그리고 모호하게 희미한 나름의 스토리들을 가지고 있었다. 로고가 박힌 명품에 열광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소비하여 잠시나마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포장되는 우아한 로고들.
전교1등, 대학 수석, 입사평가1등이 아니면 안되는 문화에 대다수가 사회가 만들어놓은 권위에 굴복하고 잠식되어 권위를 잠시나마 명픔 브랜드 로고의 힘을 위임 받아 기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행위들까지. 이러한 우리 삶 속 깊은 곳에 내제된 방어기재를 천박하고 추하다고는 나 역시도 말 못하겠다.
본질 :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
모든 것이 변하지만 절대 변하지 않는 단 하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패션은 변한다. 이 브랜드가 올해는 유행했지만 내년에도 이 브랜드가 유행을 선도할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패션은 자기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어떤사람인지 모를 때나 사용되는 것이지만 스타일은 변하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도, 브랜드의 유행이 바뀌어도 나 스스로의 대한 믿음과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에르메스의 브랜드 모티브인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 모든 것이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 처럼
스타일은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 경험, 인내, 고통, 말투, 표정의 총량이라 그 사람만의 전유물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맥락에서 본인의 것들을 갈고 닦는 것이 아닌 주위에것들을 어필하는 사람은 정말 텅빈 껍대기와 다름없다.
왜냐?
본인은 실속이 없으니까. 본인이 갖고 있는 것은 밑천이라 금방 들통나니까. 주위에 인맥을 과시하고 어필하면 본인도 동급처럼 그 -순간만큼은 자기위로가 되니까.-
마치 지인이 벤츠를 타고 나타나서 조수석에 앉아 있으면 자기 자신도 그정도의 ‘급’이 된 것마냥 기세등등하게 조금이나마 좋은 삶이라고 느끼게 해주는 하차감이 위태위태하게 -버텨주고 있으니까.-
하차감이라는 단어처럼 언젠간 그 차에서 하차해야만 하는게 그대의 진짜 인생이니까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사람의 태와 품격이라는 것은 본인이 자랑스럽게 어필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타인이 느껴주는 ‘공감’과도 같은맥락이다. 책을 읽을 때, 대화를 할 때, 전시를 볼 때음악을 들을 때. 어느 누가 ‘ 나는 이런 의도를 갖고 말을 하고 있어’ 라고 티 내는 사람은 없지 않다. 작가의 의도는 독자가 판단하며, 예술가의 작품의 의도는 관람객이 직접 느낀다. 마찬가지로 품:[品]과 태:[態] 라는 것은 본인이 어필하고 나열하는 것이 아닌 공감의 영역이다. 그리고 품과 태 의 파장이 넓고 깊은 사람은 그 누가봐도 알아 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자신있는 것들을 조금은 티 내지 않고 숨겨도된다.
진짜들은 진짜의 태:[態] 를 알아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