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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볼든 Apr 12. 2022

세지니스트, 우리가 몰랐던 ‘국뽕’의 맛

147cm 국뽕 디자이너가 만드는 조선 스트릿 패션의 미래.

가장 한국적인 것을 무조건 ‘김치’나 ‘전통’에서만 끄집어내야 직성이 풀리던, 마치 굳은살처럼 속박된 이 고정관념에서 사람들이 벗어나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마 BTS를 위시한 다양한 문화 콘텐츠의 힘이 컸을 것이다. 덕분에 이제는 K라는 -비록 조롱이나 풍자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도 많다지만- 알파벳 한 글자만 들어가도 정체성이 부여되고, 그 자체가 캐릭터가 된다. 


그래도 여전히 하나의 제품에 한국적이라는 속성을 불어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를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소비하게 만드는 건 더더욱 그렇다. 이걸 해내는 건 결국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세대가 풀어야 할 숙제일 터. 그리고 그 어려운 숙제를 열심히 풀어가고 있는 ‘세지니스트(Sejinist)’라는 스트릿 패션 아트 브랜드가 있다.      

‘빡 쳐서’ 시작한 브랜드


세지니스트는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젊은 디자이너 박세진 대표가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건 브랜드다. 사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세지니스트는 ‘화가 나서’ 시작하게 됐다고. 사정은 이렇다. 대학생 졸업반 시절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통해 프랑스 파리에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프랑스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오르세 미술관에 작품을 전시할 일이 생겼고, 학교에 몇 안 되는 동양인이었던 그녀는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을 고민하다가 한복을 테마로 옷을 꾸몄다. 그런데 브로셔에 한복임을 명시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지인들은 그저 “Beautiful Japanism”이라는 감탄사만 외칠 뿐이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저 오리엔탈리즘 판타지의 일본 문화 정도로 인식하는 서구권 사람들의 인식에 소위 ‘빡’이 친 박세진 대표는 귀국하자마자 그 길로 덜컥 세지니스트를 만들었다. 그런데 “화가 나서 홧김에 만들었다”며 웃어넘긴 답변 사이에는 제법 진지한 속내도 보였다. 그녀는 이런 상황인식을 조금이라도 바꿔보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고, 그 부분에서는 일종의 사명감마저 느낄 수 있었다.      

맨땅에 헤딩하기


시작이 순탄치는 않았다. 가장 먼저 부딪힌 건 주변의 만류였다. 상업성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물론 걱정하는 마음이 먼저였겠지만, 지인들은 한사코 ‘그렇게 하면 돈 못 번다’,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욕심을 버려라’라며 그녀를 막아 세웠다. 


주변의 우려 섞인 시선,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세지니스트는 첫발을 내디뎠다. 별다른 사회 경험도 없었던 박세진 대표는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맨땅에 헤딩하듯 그렇게 첫 룩북을 촬영했다. 모델도, 포토그래퍼도 지인이었고, 메이크업이나 헤어도 따로 없이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누가 봐도 초짜 티가 났다. 하지만 그만큼 순수했기에,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다행히 열악한 상황에서 모델들은 최선을 다해 표현해줬고, 어설펐지만 그만큼 브랜드를 운영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었다고 박세진 대표는 설명한다.      

한국적인 스트릿 패션


문제는 런칭이었다. 이제 갓 대학교를 졸업한 20대 청년에게 당장 브랜드를 만들고 꾸려갈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선택지는 결국 펀딩이었는데, 사실 도박에 가까웠다. 독특하고 강한 컬러 덕분에 자연히 취향을 탈 수밖에 없는 이 옷에 호응해줄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 반신반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지니스트 런칭을 위한 펀딩은 수요 파악을 위한 일종의 시장조사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한복과 그래픽 아트를 담는 가장 한국적인 스트릿 패션’을 모토로 삼고, 런칭 날짜도 처음에는 2019년 8월 15일 광복절을 계획했다. 물론 모든 일이 예상한 대로 순조롭게 흘러가진 않았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날짜도 9월 6일로 늦춰졌다. 펀딩 목표 금액도 일부러 보수적으로 높지 않게 책정했는데, 실패할 경우 영원히 사이트에 박제가 된다는 사실이 박세진 대표는 내심 신경 쓰였다고. 일단 너무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았고, 실패하면 아예 패션을 접을 생각도 했었다고 했다. 


어떻게 해서든 성공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배수의 진을 쳤다. 다행히 펀딩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고, 소수의 취향으로 생각했던 작품에도 분명한 수요가 존재한다는 것을 파악한 것 역시 큰 수확이었다. 그렇게 세지니스트라는 브랜드의 본격적인 항해가 시작됐다.      

절충점을 찾아서


화려한 컬러와 개성은 세지니스트를 대표하는 브랜드 아이덴티티 중 하나다. 기본적으로 한복 자체가 직선과 화려한 패턴으로 다른 기성복과 완벽하게 다른 디자인언어를 가진 의복이기 때문. 이는 원체 화려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박세진 대표의 성향에도 정확히 부합하는 포인트였다. 오죽했으면 대학 시절 과제나 졸업전시도 옷에 그림을 그리거나 자수를 놓곤 했으니.


하지만 이를 브랜드 비즈니스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하루종일 장인처럼 옷 하나에 매달려 일일이 자수를 놓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 어떻게 하면 이 고유의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최대한 접근성 좋게 만들 것인지를 고민한 끝에 도출한 결론은 프린팅이었다. 


대신 세지니스트는 단순히 화려한 무늬와 색깔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 한국적인 요소와 디테일을 담는 것에 무게를 싣는다. 멀리서 보면 기하학적인 패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 패턴을 이루는 요소가 파전, 태극기, 막걸리처럼 한국적이면서도 재미있는 소재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옷은 스토리를 담는 그릇


그렇다고 세지니스트가 우리에게 친숙한 요소를 그저 무지성으로 늘어놓기만 하는 디자인을 하는 건 아니다. 브랜드의 가장 중요한 철학 중 하나는 바로 옷에 이야기를 담는 노력이다. 콘셉트의 중심은 박세진 대표 개인의 경험에 기인하는데, 이를 풀어가는 방식이 재미있다. 그녀는 지극히 동양적인 요소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거나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것들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에 집중한다. 


예컨대, 세지니스트의 첫 시즌을 장식한 ‘샤머니즘’ 같은 테마가 그렇다. 우리가 흔히 ‘무당’ 하면 떠올리는 일반적인 이미지 – ‘오컬트’라던가 혹은 ‘부정한 기운’ 같은 모습을 최대한 지우고, 그 안에 숨겨진 예쁘고 아기자기한 디테일을 극대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무당의 무복은 점프슈트로 재해석했고, 그 안에는 삼족오와 호랑이의 디자인을 패턴으로 넣어 삼재를 막고 행운을 비는 의미도 담았다.      

Negative to Positive


세지니스트는 이런 표현방식을 일관적이고 뚝심 있게 지켜나간다. 지난 S/S 시즌 역시 마찬가지. 올해의 테마는 바로 ‘아홉수’였는데, 이는 마침 올해로 29세를 맞이하는 박세진 대표 개인의 경험에서 찾아낸 이야기다.

 

박세진 대표는 흔히 아홉수라고 하면 ‘평소에 당하지도 않을 일을 아홉수라서 당했다’ 같은 식으로 팽배한 부정적 인식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고 싶다고 했다. 그 상징을 구미호로 삼고, 이와 관한 여러 가지 설화들을 세련된 스토리텔링으로 다듬었다. 아홉수의 의미를 완성 직전의 불안,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하는 우리의 모습을 완성할 수 있는 마지막 한 걸음으로 표현했다. 색깔도 콘셉트에 맞는 감성을 끌어내기 위해 보라나 민트 같은, 평소에는 잘 쓰지 않던 탁한 컬러를 선택했다. 그래서 2021 S/S 시즌 제품들의 패턴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치 하나의 무늬처럼 교묘하게 자리한 구미호의 앙증맞고 귀여운 그래픽 아트를 발견할 수 있다.

스스로 ‘국뽕’ 디자이너를 자처하는 박세진 대표는 최근 의미 있는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지난 2020 도쿄올림픽이 그 발단이었다. 당시 도쿄올림픽 누리집에는 성화봉송 루트를 그린 일본 지도가 있었는데, 여기에 교묘한 방식으로 독도가 포함되어 논란을 낳았던 것. 


때마침 울릉도와 독도 여행까지 다녀온 박세진 대표로서는 분통이 터질 따름이었다. 끊임없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행태에 화가 난 박세진 대표는 광복절과 맞물려 독도를 테마로 풀어낸 티셔츠를 제작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얻은 수익금 일부는 독도협회에 기증할 예정이라며 힘주어 말했다.      

우리의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지니스트의 목표는 명확하다. 티셔츠처럼 일상에서 모든 이가 접하는 그런 것처럼, 우리만의 것을 만들어 그것을 계속 향유하는 것이다. 독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동시에 “이런 부분에서 일본은 리스펙트할 수밖에 없다. 그런걸 누구보다도 잘 하는 나라니까”라고 대답한 박세진 대표의 말은 그래서 더욱 무게가 실렸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사랑하는 것,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숙제다. 세지니스트는 그 어려운 과제를 즐겁게 웃는 얼굴로 풀어가는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다.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그녀의 넘치는 열정을 느껴보고 싶다면 영상으로 확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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