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 스미스의 풀파워 스매싱부터 시상식을 침묵하게 만들었던 순간까지.
3월 27일 할리우드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했다. 물론 윌 스미스와 크리스 록의 사건이 가장 뜨거운 이슈로 남아있지만 OTT 영화가 작품상을 거머쥐었고, 여성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사회적 소수자의 수상이 이어졌다. ‘그들만의 축제’라는 비판에 직면했던 오스카는 과거와 달리 시대적 변화에 대한 요구를 적극 수용한 모양새다. 인권, 평화, 평등을 향한 진보의 가치를 돌아볼 수 있었던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인상적인 순간, 다섯 가지를 모아봤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윌 스미스가 크리스 록의 뺨을 갈긴 사건일 거다. 무려 풀 스윙이었고, 장난이 아니었다. 폭행 후에도 분노를 삭히지 못한 윌 스미스는 크리스 록을 향해 거친 욕을 쏟아냈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하다. 시상식에서 크리스 록은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 시상을 위해 무대에 올라 윌 스미스의 아내 제이다 핀켓 스미스에게 “제이다, 사랑해요. 다음 G.I 제안 속편 주인공은 당신이 딱이네요. 그렇죠?”라며 농담을 던졌다. 윌 스미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크리스 록이 서 있던 무대 위로 난입했고 그의 얼굴을 향해 묵직한 펀치를 날렸다. (사실 제이다는 원인 모를 탈모증으로 인해 머리를 삭발했다.)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크리스 록은 “이봐. 친구. 그냥 G.I 제인 영화 관련 농담한 것뿐이야”라고 말했고, 이때까지만 해도 그저 연출된 상황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자리로 돌아온 윌 스미스는 연거푸 ‘F 워드’를 뱉어내며 “네 X 같은 주둥이에 내 마누라 이름을 들먹이지 마”라고 소리치며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사실 크리스 록의 선 넘는 농담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가 사회를 맡았던 201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할리우드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발언으로 박수를 받은 것도 잠시, 도리어 동양인을 비난하는 명백한 인종차별 농담으로 내로남불급 태세 전환을 보여준 바 있다. 또한 미국 매체 버라이어티에 따르면 중계사인 ABC 방송사는 이번 시상식에서의 크리스 록의 발언이 리허설에서는 없던 내용이라고 밝혔다. 생방송 중 예정에 없던 크리스 록의 발언이 이어지면서 방송 관계자들은 농담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며 사태의 심각성을 예견했지만, 내부 판단에 따라 시상식을 이어가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결국 윌 스미스뿐 아니라 크리스 록 그리고 아카데미 역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크리스 록은 윌 스미스를 폭행죄로 고소하진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유가 어찌 됐건 생방송으로 고스란히 전해진 윌 스미스의 폭행 사건은 논란을 빚었고, 아카데미상을 주관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도 “시상식에서의 윌 스미스의 행동을 규탄한다”는 성명을 냈다. 일각에서는 아카데미 내규에 따라 윌 스미스의 남우주연상이 취소될 가능성도 제기했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의 최고의 영애인 작품상은 애플TV+의 오리지널 영화 <코다>가 수상했다. 작품상뿐만 아니라 각색상과 남우조연상까지 꿰찼다. 월트 디즈니, 워너 브라더스 등 전통의 영화산업 강자들을 제치고 넷플릭스의 <파워 오브 도그>와 애플TV+의 <코다>가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결과다.
그간 생태계 교란종으로 인식되어 온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플랫폼의 오리지널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건 이번이 최초지만 실상 OTT 업체 중 가장 먼저 오리지널 영화를 내놓고 꾸준히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린 건 넷플릭스였다. 2019년 넷플릭스 영화 <로마>는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영화로서 처음으로 작품상과 감독상 등에 후보로 지명됐다.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작품상도 받았으나 아카데미에서는 감독상과 촬영상,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올해 역시 넷플릭스의 <파워 오브 도그>가 작품상과 감독상 부문에 후보로 노미되며 수상작으로 점쳐졌으나 아쉽게도 감독상에 그쳤다. 하지만 제인 캠피온 감독이 감독상을 수상해 여성 감독으로서 역대 세 번째 수상자가 됐다. 게다가 전체 23개 부문 중 무려 12개 부문에 후보로 오르며 넷플릭스 파워를 제대로 보여줬다는 평이다. 동시에 스트리밍 서비스에 완고하던 아카데미가 결국 OTT 영화에 왕관을 씌워줬다는 점에서 의미 있으며, 베니스와 베를린은 진즉에 그것을 받아들였으니 이제 3대 영화제 중 칸만 남은 상황이다.
올해 아카데미는 다양성의 축제였다. 영화 <킹 리차드>의 실제 주인공이자 테니스 스타 자매 비너스 윌리엄스와 세레나 윌리엄스가 시상식 오프닝 무대를 소개했고, 비욘세가 <킹 리처드>의 주제곡 ‘Be Alive’를 불렀으며, 세 명의 여성 호스트 에이미 슈머, 레지나 홀, 완다 사이크스가 사회를 봤다. 작품상과 감독상, 각색상의 주인공은 모두 여성이었고, 여우조연상은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아리아나 데보스가 받았다. 그는 퀴어임을 커밍아웃한 성소수자다.
션 헤이더 감독의 영화 <코다>는 또 다른 의미에서 역사를 썼다. 청각장애 부모와 오빠를 둔 루비(에밀리아 존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는 실제 청각장애를 가진 배우가 출연했고,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트로이 코처가 청각장애를 가진 남자 배우로서 처음으로 오스카를 거머줬다. (이 영화에서 코처는 1987년 청각장애를 가진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연기상을 받은 말리 매트린(여우주연상)과 부부 호흡을 맞췄다.) 더불어 아카데미는 <코다>를 작품상으로 선택함으로써 최근 할리우드가 보여주고 있는 다양성 확대 기조를 다시금 확인시켜줬다.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윤여정이 관례에 따라 올해 시상자로 나섰다. 남우조연상 부문 시상을 맡은 윤여정은 왼쪽 어깨에 ‘#With Refugees(난민과 함께)’라는 문구가 적힌 파란 리본을 달고 무대에 올랐다. 리본은 유엔난민기구(UNHCR)에서 진행하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파란색은 우크라이나 국기를 상징한다.
시상에 앞서 그는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를 이끌어가더니 본 시상에서는 수어로 호명하며 청각장애를 가진 수상자 <코다>의 트로이 코처를 배려했다. 이어 양손으로 수상 소감을 말해야 하는 그를 위해 대신 트로피를 들어주며 아카데미에 훈훈함을 선사했다.
축하 영상에는 방탄소년단(BTS)이 깜짝 등장했다. BTS는 디즈니와 픽사 애니메이션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시상식을 축하했다. 한국 배우 박유림, 진대연, 안휘태도 아카데미 시상식에 초대받아 자리를 빛냈다. 그들은 일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 출연했으며, <드라이브 마이 카>는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전부터 관전 포인트로 떠오른 건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등장 여부였다. 할리우드 배우 숀 펜이 젤렌스키 대통령을 초청해 그의 화상 연설을 듣자고 주장한 것. 숀 펜은 27일 미국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AMPAS가 젤렌스키 대통령을 초청하지 않는다면 아카데미 시상식 보이콧 운동을 펼칠 것”이라며 “내가 받은 트로피도 공개적으로 부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이미 녹화된 젤렌스키 대통령의 영상은 아카데미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아카데미의 정치화에 반대한다는 주장이 우크라이나인의 비극을 막아야 한다는 반론을 간발의 차로 이겼기 때문이다.
녹화분 영상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영화인 여러분, 우리 모두가 유명해지고 싶어하지만 유명해지는 방법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존경할 만한 방법 말입니다”라고 말했을 뿐, 별다른 정치적 언사는 없었다고 전해졌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영상은 공개되지 못했지만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연대와 지지의 표현이 시상식 내내 이어졌다. 축하 공연 소개를 위해 무대에 오른 우크라이나 출신의 배우 밀라 쿠니스는 “최근 발생한 사건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처참한 기분을 느꼈다”고 운을 떼며, “우크라이나인들이 보여준 용기와 품위를 목격했다. 상상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도 맞서 싸우는 용기를 잃지 않는 그들을 보며 경외감을 감출 수 없다”고 우크라이나 지지의 뜻을 비췄다.
축하 공연 후에는 우크라이나 연대의 뜻으로 참석자 모두 30초간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동시에 무대 위 화면에는 “우리는 국경 안에서 침공, 분쟁, 편견에 맞서 싸우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지지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어 “자원은 늘 부족하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많다. 우크라이나를 지지해주길 요청한다”는 메시지를 덧붙였다.
그 밖에도 윤여정을 비롯해 제이미 리 커티스, 사무엘 L. 잭슨, 다이앤 워렌 등 시상식에 참석한 배우들은 UNHCR가 제공한 우크라이나 난민 지지의 의미가 담긴 파란 리본을 달았고, 제이슨 모모아와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우크라이나 국기를 상징하는 액세서리를 착용해 눈길을 끌었다.
또한 이날 시상식을 진행한 에이미 슈머는 “우크라이나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고 언급했고, 영화 <대부> 50주년을 맞아 무대에 오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배우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와 함께 “Viva Ukraine”(비바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만세)를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