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 지 Sep 17. 2023

혼자 하는 잔소리

노화에 미용성형?

"야, 쟤는 돈도 많으면서 어떻게 저 얼굴로 모임엘 나오냐? 너무한 거 아니냐?"


마지막으로 나갔던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한 남자 사람 친구가 한 여자 사람 친구를 가리키며 우리 쪽 테이블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지적을 받은 친구도 우리도 아무 말하지 않고 엷게 웃으며 잠시 그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오십이 넘으면서 흰머리와 주름살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


별로 치장에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이다.


운전을 막 시작했을 때 아이들을 내려주던 어린이집 기둥에 앞범퍼를 심하게 부딪힌 적이 있었다.

앞으로 더 부딪힐 것이 뻔했고, 자동차 범퍼는 그냥 소모품이라는 남편 말에 동의를 했으므로 그냥 다녔다.


손보지 않아 칠이 구석구석 벗겨지고 흠집이 난 차를 나보다 동료들이 더 부끄러워했다. 나를 안쓰러워하고 불쾌하게 여기는 어느 동료는 내가 입은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날에는 내 차와 옷상태에 대해서 그분의 마음상태가 염려스러울 정도로 화를 내셨다. 아이 둘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출퇴근하느라 정신없던 시기였으니 자주 비뚤어진 옷차림을 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지금은 차에 흠집이 생기면 곧바로 수리센터에 보낸다. 나는 괜찮은데 주변 사람들이 더 많이 흠집난 내 차에 신경을 쓰는 것이 마음 쓰여서. 



친구의 얼굴에 짙게 드리워진 팔자 주름과 눈가 주름에 화를 내던 그의 마음에 대해서는 이해를 했다. 노화도 쇠퇴도 다 발달의 단계이기에 어떠튼 우리에게 다가온 나이 든다는 것의 감추어지지 않는 불편함 같은 것들을 힘들어도 직면하고  받아들이기 직전의 그저 가벼운 안타까움이며  사소한 투정일 뿐이라는 걸 우리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전부 다 이해했다. 그러나 이해하는 마음이 불쾌한 감정을 덮어주지는 못했다.


난 조용히 그 친구의 이름을 연락처에서 삭제했다.


'아이러브스쿨'이라는 동창 모임을 통해서  삼십 대 인생의 정점에서 시작되었던 초등학교 동창모임이었기에 비교적 활발하게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 번 모임에 이십여 명 정도가 모여 앉아서 옛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웠지만 불혹의 나이를 넘기고 지천명의 나이로 접어들면서 천천히 짙어져 가는 세월의 흔적들과 나름의 성향대로 세파에 길들여진 면면들이 숨겨지지 않고  드러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냥 즐겁기만 하지는 않아서 모임에 참가하는 횟수도 줄이고 있던 때였다.


얼굴에 생기는 짙은 주름에 상심이 큰 친구들은 진즉부터 의학의 힘을 빌리고 있었다.


나 또한 그 몇 년 전에 피부과에서 탄력 시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오전 수업시간에 집요하게 내 출생 연도를 묻던 아이에게 몇 달 만에 드디어 큰 마음을 먹고 내 출생 연도를 커밍아웃해 주었던 다음날, 아이는 자기 엄마에게 수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고 했다.


"선생님, 00 이가 어제 집에서 아주 심각하게 말했어요. '엄마, 큰일 났어요. 선생님 내년부터 센**실버 사 드려야 해요!' 하고요~" 

그 말을 들을 때, 흠집이 난 내 차에 본인 마음을 다칠 만큼 신경을 쓰던 직장 동료가 겹쳐졌다.

내 차가 흠집 나는 것,  

내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남는 것.

그게 나만 감당하면서 지나가면 되는 일이 아닐 수도 있는 거였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내키진 않았지만 그날로 피부과에 상담을 가서 제법 큰 액수를 지불하고 몇 회였던가 패키지 치료를 받았다.


시술은 무척 고통스러웠다. 벨벳 인형이나 실리콘 공 하나를 손에 쥐고 시술대에 오르면 얼굴에 마취크림을 발랐음에도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은 고통이 온몸 구석구석 힘을 주게 만들었기에 집에 돌아오면 온몸이 욱신거리는 근육통이 남고는 했다.

다시는, 다시는 그렇게 '쌩으로 아픈' 것을 감수하는 피부과 시술 같은 것은 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먹고 약속된 횟수를 채웠던 때였다.


친구의 얼굴에 깊게 파인 주름을 '돈을 아끼느라 방치하는 나태함'이라고 힐난하는 그의 말에 동감을 할 수 없는 것을 떠나서 마음속 깊은 데서부터 울화가 올라왔다.

'그냥 좀 자연스럽게 주름진 모습을 받아들이는 게 그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야유받을 만큼 나쁜 거야?' 하고 묻고 싶기도 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눈에 띄지 않게 불편해지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내가 처음으로 나이를 먹는 일에 대해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된 일은 공항 출국심사를 할 때였다.


공항에서 내국인은 자동출국심사를 할 수 있다.


몇 년 전 어느 날, 지문인식에 손가락을 올리고 신원이 확인이 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되어있는 자동출국심사대에서 나는 오른손, 왼손,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교대로 올려보아도 다음 단계로 진행이 넘어가지질  않는 일을 겪었다.

(지금은 조금 시스템이 개선되었는지 간혹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도 있다.)


주민등록 등본을 발급받기 위해 주민센터에 가서 직원의 안내에 따라 지문인식기 위에 손가락을 올리던 때에도 같은 일이 생겼다. 직원이 연세 드신 분들은 자주 그런 오류가 생긴다고 하면서 손가락에 입김을 불어보라고, 아니면 양 손바닥을 맞비벼서 열이 조금 나게 한 다음 올려보라고 권유를 했다.



그때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시어머니와 여행을 갔을 때 생각이 났다. 시어머니의 여자형제이신 시이모님 두 분이 함께 동행하셨었는데 둘째 날 아침에 시어머니께서 파운데이션을 빠뜨리고 왔다며 나에게 파운데이션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난 크림파운데이션은 없지만 파우더콤팩트가 있으니 쓰시라고 가방에서 꺼내서 건네드렸다.



'이걸 쓰라고?' 약간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렇게 되물으시는 시어머니를 바라보시며 두 분 이모님이 잔잔하게 웃으셨다. 세 분 모두 그 파우더팩트에 손대지 않으셨다.



세월이 지나서 그 순간이 이해가 되는 때가 드디어 왔다.



파우더가 얼굴 위에 올려지면 얼굴에 생긴 주름을 더 과장되게 보여주는 피부상태가 되어서는 일부러 지울 때까지 얼굴 위에 동동 뜬 것처럼 남게 되는 것을 피부노화라고 한다는 것을 이제 안다.  파우더팩트는 이제 내 화장파우치에 없다. 크림파운데이션이나 씨씨크림이나 물광프라이머 같은 것들이 필요해졌지만 몇 년이 지나면 그것들도 의미 없어지게 된다는 것 정도는 이제 안다.



삼 주 간격으로 뿌리염색을 하지 않으면 대중교통을 탈 때 노약자석에 앉아도 누구도 눈치를 주지 않을 정도가 된다는 것.



앉았다 일어날 때 휘청 무릎에 힘이 빠진다거나 계단을 오르내릴 때 무의식적으로 손잡이를 찾게 되는 것.



가지런한 치아가 자랑거리였는데 딱딱한 생선뼈를 씹다가 금이 간 어금니를 치료하다가 얼토당토않게 반대편 송곳니가 뿌리이동을 해서 치열이 삐뚤빼뚤해져 버리는 난감한 사건을 겪게 된 것.



휴대폰 화면의 작은 글자가 보이지 않게 된 것 정도는 별로 근심거리도 아니다. 안경을 벗고 눈앞으로 가져오거나 글자 크기를 크게 해서 보면 되니까.



현관 출입문의 키버튼도 꼼꼼하게 누르지 않으면 작동을 하지 않아서 천천히 꼭꼭 눌러야 버튼과 손가락 사이의 반응감을 찾을 수 있는 것.



그렇게 세월이 알려주는 노화의 과정을 차근차근 알아가는 중이다. 화내지도, 서글퍼하지도 않으면서 세월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이제 어쩔 수가 없어진 것 같다.


작년부터 눈이 침침해져서 안과진료를 받았다. 눈에 별다른 이상은 없지만, 염증은 만성적으로 생기게 될 거라고 안과의사는 말했다.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내 얼굴을 꼼꼼하게 바라보다가 성형외과에 가서 상담을 받아보라고 하면서 노년에 쌍꺼풀 수술을 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난 쌍꺼풀이 있는데 무슨 소리냐 물었더니 내 눈의 현재 상태는 눈꺼풀이 처져서 속눈썹이 눈을 찔러서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믿지는 않았지만 며칠 동안 슬쩍 눈가에 쌍꺼풀 테이프를 붙여보았다.


친구 말이 맞았다.


이젠 친구들의 말도 의사나 전문가들의 말만큼 들어야 하는 부분들이 있다고 인정을 다.


하지만, 너무너무 아파서 다시는 미용시술 같은 것은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었는데.... 시술도 아닌 그 아픈 쌍꺼풀 수술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때가 올 거라고 예상하는 지금 이 순간은 조금 서글퍼진다.




마흔 살이 되던 해.

방학 중 당직근무를 위해 출근을 했던 날 교장선생님께서도 출근을 하셨다. 자연스럽게 교무실에서 서너 명이 모여 앉아 도란도란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장선생님은 그때 예순한 살 환갑이 되셨다고 하셨다.


엄마 같은 그분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고 말았다.


'저는 마흔 살이 되었어요. 서른 살이 될 때는 몰랐는데 마흔 살이 되다니, 이건 정말 엄청난 일 같아요. 사실 조금 우울해요!'


그렇게 그야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허튼소리를 날리는 젊은 나를 보며 환갑의 교장선생님은 지그시 웃어주셨고 위로를 해 주셨다.


'야휴! 저런... 자기 정말 힘든 시간 맞이했구나. 그래도 마흔 살 되는 게 힘들었다면 쉰 살 되는 건 조금 덜 힘들게 지나갈 수 있을 거야.'



그래서, 나이를 먹어간다는 걸 느낄 때마다

 자꾸 그때 그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곤 한다.


나이 마흔 먹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었던 어린 부하직원에게 담담히 명랑하게 세월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분.


그분 말마따나 그다음 나이 쉰 되는 것은 조금 덜 힘들었다.


예순, 일흔, 여든.... 앞으로도 쭈욱 나는 그때 그 말씀을 들려주시던 그 교장선생님과 동행하게 될 것 같다.


힘들지 않게 세월을 보내고 계시지요?

저도 그렇게 하려고요.

내내 건강하시고 행복하셔요.



지워버린 친구의 연락처는 귀가 순해져서 노여움도 없게 된다는 나이가 되면 다시 입력하려고 한다. 그때까지 너도 건강히 잘 지내고 있어라~~


작가의 이전글 저마다의 성장, 저마다의 성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