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싫어하는 계몽주의자들에 대한 리뷰
그러나 실제 빅 브라더는 전능하지 못하고, 당은 완벽하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매사를 처리하는 데 있어 임시변통의 능력이 끊임없이 필요한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말이 ‘흑백’이다. 이 낱말에도 여러 다른 신어들처럼 두 가지의 상반된 뜻이 담겨 있다. 반대편에게 이 낱말을 적용할 때는 명백한 사실인데도 흑을 백이라고 우기는 뻔뻔스러운 기만을 의미한다. 하지만 당원에게 적용될 때는 당의 요구대로 흑을 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충성심을 뜻한다. 그러나 이 말은 더 나아가서 흑을 백이라고 믿고, 또 흑을 백으로 알며, 이전에 이와 반대로 믿었던 사실을 잊어버리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개조를 요구한다. 그런데 이는 다른 모든 것을 망라하는, 신어로 ‘이중사고’라는 사고 체계에 의해서 가능하다.
누구든 노동자들이 육체로 살아남듯 정신으로 살아남는다면, 그리고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는 은밀한 법칙을 전달할 수 있다면 미래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
- 조지오웰 <1984> 발췌
조지오웰이 그린 1984년은 객관과 주관의 세계가 명백히 구분된 시대다. 객관의 세계를 지배하는 언명은 거부할 수 없는 절대 진리이자 위대한 영도자 빅브라더다. 그는 모든 것을 예측하고 발명하였으며 인민이 풍족하게 살도록 해주었다. 그는 몇 안 되는 내부당원들과 함께 세 개의 나라 중 하나인 오세아니아를 다스린다. 주관의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은 당의 손발이 되어 일하는 '외부당원'과 인구의 85%를 이루는 '무산계급'이다. 노동자인 무산계급은 자식을 키우고 이웃과 다투며 영화, 축구, 맥주, 도박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내부당원의 시각에선 지성이 없기에 지적 자유를 마음껏 허용해도 되는 존재다.
외부당원은 조금은 더 특별하다. 외부당원은 빅브라더 체제를 유지하는 일들, 예를 들면 역사와 기록을 조작하고 사상범들을 잡아들여 증발시키고 무산계급의 암시장에 제공될 포르노를 제작하는 중차대한 업무를 수행한다. 그들은 손가락부터 뇌세포 하나에 이르기까지 빅브라더를 사랑해야 한다. 의문을 갖거나 불만의 표정을 짓거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는 낌새가 보이면, 이를테면 몰래 일기를 쓰면, 어느 곳에서나 눈을 부릅뜨고 귀를 기울이는 텔레스크린이라는 감시장치를 통해 적발당한다.
객관적 세계의 구성원들은 주관의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의 주체성, 즉 가치판단의 능력을 거세한다. 그 중심엔 언어 개편이 있다. 빅브라더는 형용사와 부사를 거의 제거하고,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는 단어와 다채로운 표현을 모두 없앤 ‘신어’를 공용어로 지정한다. 언어를 통해 다양한 사유를 할 가능성을 애초에 차단하기 위함이다. 불온한 자들은 텔레스크린에 의해, 동료에 의해, 가족에 의해 적발당하고, 고문을 통해 의식이 개조된다. 끝내 처형당한 이들의 흔적과 기록은 모두 증발된다. 다시 말해 <1984>의 세계는 왜곡과 억압과 주입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다. 이 체제는 자본주의와 닮았다.
주관의 세계에 사는 노동자들은 사유재산과 시장의 기능을 절대명제로 여기는 자본주의를 이미 주어져 바꿀 수 없는 객관적 세계로 여긴다. 그들은 그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담론을 만들고 이야기하지만 결국 빅브라더가 그어 놓은 선을 넘지 못한다. 자본을 많이 가진 자들에 감탄하고, 자본이 없는 처지를 비통해하며, 복지제도는 불합리하다 욕하고, 서비스와 상품이 별로라며 비판하지만, 자본주의가 옳고 그른가에 대한 가치판단은 하지 못한다.
객관적 세계를 구성하는 핵심 세력은 자본과 생산양식을 독점한 부르주아다. 자신들의 지위를 보장하는 체제를 영속화하기 위해 대중의 의식에 그 정당화 논리를 끊임없이 주입한다. 그것은 의도적이고 계획적이기보단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부르주아라고 음험한 계략으로 무장한, 그늘 속에 숨은 음모가들은 아니다. 그들 역시 그들이 속한 대지에 발을 딛고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일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빅브라더가 행한 극단적인 억압은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경제적 자유'를 표방하는 유튜브 채널과 각종 책들은 의도와 다르게 가난을 개인의 탓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고, 재벌 기업들의 때로는 정당하지 못한 돈벌이는 '애국'과 '경제위기'라는 언론의 단골 키워드에 묻힐 뿐이다. 이렇게 세련된 왜곡과 정당화의 과정들이 이루어진다.
그 와중에 변태들이 태어났으니 바로 <1984>의 주인공 윈스턴과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 루카치다. 이 둘은 보통의 세상에서 태어난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남들이 당연시하는 걸 당연하지 않다고 여긴다. 본인은 남들이 못 보는 걸 본다고 생각한다. <1984>의 세계에서 외부당원으로 활동하던 윈스턴은 당의 억압과 부조리를 비판하며, 아직 원시적인 감정을 생생히 간직한 무산계급에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1885년에 헝가리에서 태어난 루카치는 자본주의를 바꿀 수 없는 객관적 진리로 여기고 그 안에서 바보같이 울고 웃는 사람들을 깨우치려 한다. 본인들은 자신들이 속한 세상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전체적이고 중립적인 조망을 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84>의 무산계급은 배고프고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삶을 살지만, 세상을 원망하거나 체제에 대해 불만을 갖진 않는다. 평소엔 일을 하고, 여가시간엔 근교로 나들이를 간다. 가족, 친구, 이웃들과 맥주를 마시며 축구경기에 환호한다. 복권이 꽝이면 하늘을 원망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어느 고위 내부당원은 이들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들은 자기네 삶을 살아가기 바쁘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고. 적절한 언론 통제와 역사 조작, 주입의 과정만 있으면 소소한 일상 속에 못 박힌 85%의 무산계급이 정치적 변수로 등장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평가다. 이에 대해 루카치는 “너희가 느끼는 행복은 단지 감정일 뿐이며 실제로는 절대 행복할 수 없다.”라고 일갈한다.
루카치는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세계의 이분법을 깨려 했다. 모든 사람들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객관의 세계 역시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부수고 다시 건설할 수 있다고 말했다. 루카치는 자본주의에 대한 가치판단을 했고, 그 결과 자본주의는 악이었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물질에 의해 지배받게 하지만, 지배당하는 당사자들은 자신이 지배받는다는 것을 모른다. 스스로가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선택한다고 믿는다.
루카치에게 자본주의 체제의 인간은 그저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그대로 따르는 수동적 존재다.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가는 와중에 물화된다. 물화된 인간은 모든 것을 물질적인 가치로 환원하는 인간이다. 타인을 평가하는 척도는 그의 취향이나 인품이 아니라 시장가치다. 월급, 사회적 지위, 부동산, 타고 다니는 차 같은 것들로 인간의 가치를 재단하는 것이다. 자본을 적게 가진 사람을 낮게 평가하고, 자신이 가진 프레임 자체에는 비판의 화살을 돌리지 않는다. 개인의 인성이나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에 적응하며 자연스럽게 체화된 결과물이다.
루카치는 이 점에 착안하여 거세된 노동자들의 의식을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노동자가 역사의 주체와 객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역사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그 스스로 역사를 이끌어 가고, 객관적인 세계를 주체적으로 변형시키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객관적이라고 믿었던 세계는 절대 객관성을 가진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객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노동자가 스스로의 역사적 위치를 객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카치의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객관적 명제로 받아들이는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객관화하지 못하는 존재다. 자신이 처한 객관적인 상황을 조명하지도 못하고 왜 이런 위치에 있는지 그 역사적 기원을 탐색하지도 못한다. 그렇기에 옆에서 깨우침을 줄 뛰어난 존재가 필요한데, 그 역할을 루카치 본인이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객관화는 의식화다.
루카치는 객관의 세계가 실제론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지지 않은 진리인 것처럼 포장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세계는 노동자들의 의식화를 통해 재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르크스가 조건이 갖추어지면 자본주의 체제는 자동적으로 무너질 거라 믿은 것에 반하여, 루카치는 노동자들의 의식을 고양시켜 자신들의 역사적 객관적 위치를 알게 해 주어야 한다고 여겼다. 아무리 노력해도 위로 올라설 수 없는 객관적 위치에 놓여 있음을 깨달아야, 비로소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객체의 세계를 바꿀 동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자신을 객관화한 가진 것 없는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에 비해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더 맹렬하게 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이상과 괴리의 차이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 루카치 본인과 같은 지식인의 역할이자 특권이라고 믿었다.
<1984>의 주인공 윈스턴은 언제가 이런 일기를 쓴다. “나는 (역사를 조작하는) 방법은 알지만 이유는 모른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지만,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는 모르는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그 의문을 갖게 된 시점이 윈스턴에겐 객관화의 시작이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