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더니 3
어릴 때부터 일본을 좋아했다. 사실 뭐 좋아했다기보다는 쉽게 접할 수 있는 다른 나라 중 하나여서
익숙하고 편안해서 좋았던 것 같다.
내가 지금 살고 있어서 해외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프랑스를 제외하면 일본을 제일 많이 간 것 같다.
특히 부산에서는 후쿠오카까지 비행시간이 30분 정도밖에 안 된다. 이륙해서 음료수 한 번 마시고 컵 내려놓으면 착륙하잖아.
중학교 때부터 학교 교류 활동이나 해외 경험 활동 등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자주 갔다. 중학교는 그냥 동네에 있는 흔한 중학교였는데, 학교 내에 동아리라고 해야 할까 걸스카우트 같은 그런 거 있잖아. 그런 걸로 방학 때 일본을 갈 수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도착하는 배를 타고 후쿠오카와 규슈 지역 여기저기를 다녀왔다. 아소산도 가고 쿠마모토 성도 보고. 그때 봤던 것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10번 이상 일본 여행을 간 것 같다. 학교에서도 가고, 혼자도 가고, 가족들이랑도 가고, 동생이랑도 가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언어에도 관심이 갔다.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지만, 일곱 살 차이 동생은 일본어 학과로 진학했다. 나랑 어릴 때 여행 다녔던 게 조금은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어릴 때 나는 내가 외국어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과거형인 이유는, 지금 생각하면 나는 뭐든 중간은 하지만 어떤 한 가지를 특출 나게 잘해서 이걸로 먹고살아야겠다 하는 능력은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중간은 하는 게 어디야!)
대부분의 외국어를 배울 때 그 언어를 배워야 하는 뚜렷한 이유나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시작했었다. 영어를 할 줄 알면 시각이 몇십 배는 넓어진다던데. 지금 생각하면 맞는 것 같고. 팝송을 들으면서 따라 부르고 가사를 이해할 수 있는 그 쾌감, 영어로 쓰인 원서들을 번역이 되지 않은 작가의 표현 그대로 읽을 수 있다는 점에 행복 느낀 이후로는 영어가 너무 좋았다.
고등학교 때는 스페인어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할 것 많은 고등학생 때 갑자기 라틴 음악의 리듬에 빠졌기 때문인데. 친구들이 아이돌 노래를 듣고 춤을 연습할 때, 나는 라틴 음악과 EDM을 들었다. 라틴 음악의 가사를 알아듣기 시작할 때쯤 다행히도 나는 이미 성인이었고, 나는 그 당시에 유명했던 노래들의 가사들이 굉장히 지저분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래도 그 쉬운 발음의 매력이 있어서 좋았다.
프랑스어는 프랑스로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열심히 했고,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그렇게 흥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배워야 하는 목적이나 이유가 있었던 다른 언어들에 비해서 일본어는 정말 언어 자체가 마음에 들어서 그냥 어쩌다 보니 시작하게 되었다. 어릴 때 일본 여행을 다니면서 들었던 일본어가 무지 예쁘다고 느꼈고, 나도 그 언어를 내 입으로 뱉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작했다.
또다시 여행을 가면 그때는 조금 더 길게 말을 해봐야지. 조금 더 자연스럽게 말을 해봐야지 라는 막연한 목표를 가지고 계속 배웠다. 발음이 쉽고 생각보다 비슷한 문법이나 단어도 많다 보니 들이는 시간에 비해 실력이 잘 늘어가서 좋기도 했다.
그러다 프랑스에 오고 나서부터는 안타깝게도 "일본"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그만 대화하고 싶게 되어 버렸다.
나도 일본에 대한 환상이 있었어서 이런 사소한 일들로도 싫어진 건지,
일본과 관련된 사람들 와의 관계가 실패한 탓인지 잘 모르겠지만.
찬찬히 생각해 보면,
이렇게 애증의 관계가 되어 버린 것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1. 대학교까지 이어진 일본어 "공부"
고등학교 때까지는 취미로서 일본어를 배웠었다. 고등학교에서도 수업이 있었지만 사실 중학교 때 이미 배웠어서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서 딱히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고 늘 일본어는 즐거웠다.
프랑스에 와서 나는 학사과정을 다시 하게 되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언어를 전공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선택한 학사였다. 법+경제+경영+영어+제2외국어를 모두 겉핥기식으로 할 수 있는 학사였는데, 내가 알기로는 프랑스에만 존재한다.
처음 왔을 때 내 프랑스어는 대학 수업을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겨우 프랑스어 성적을 갖추어서 대학에 입학을 했는데 너무 알아듣기 힘들었다. 처음 일 년은 수업을 모두 녹음을 해서 집에서 다시 들어야 했다. 내가 매번 교수님들께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 녹음기를 켜서 교수님 앞에다 놔서 한 법 수업 교수님은 한 학기 내내 내 핸드폰에 녹음기를 켜고, 마이크처럼 들고 수업을 하시기도 했다.
그래서. 제2 외국어 과목은, 나에게는 제3 외국어지만, 내가 이미 잘 아는 일본어로 해야 졸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했었다.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기 위한 고군분투가 시작되었고, 어쩔 수 없는 일본어 공부가 시작된 거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프랑스어와 일본어를 번역해야 하는 수업도 있었고, 프랑스어로 일본어 문법을 다시 배웠다. 수년간 일본어 공부를 깔짝깔짝 했는데도 생각해 보니 나는 일본에 관심 있는 분야가 없었다. 애니나 영화, 드라마를 보는 것도 아니고, 일본 노래를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당연히 학사 과정 동안에도 딱히 관심 있는 분야가 생기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가끔 일본 여행을 가서 배운 일본어를 사용할 수 있어서 다시금 열심히 해야겠다는 동기부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성적을 위해서 하는 공부다 보니 재미가 없었다.
게다가, 같은 일본어 수업을 선택한 친구들은 일본에 미쳐있는 사람들이었다. 무언가에 열정을 가진다는 건 너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일본이면 뭐든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일본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억지로 억지로 공부해서 일본어 능력시험도 쳐가며 동기부여를 위해 노력을 했지만 아무리 해도 더 이상은 재미가 없었다.
그렇게 일본어를 그만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 일본과 프랑스의 애틋한 관계
일본과 프랑스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럽을 꼭 가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프랑스 사람들도 아시아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일본. 일본 문화나 일본풍 무언가에 영감을 받았다는 유명한 예술가들도 굉장히 많고. 하지만 가끔 일본은 무조건 최고라고 생각하는 프랑스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아무튼 나는 한국인이고, 아시아에는 여러 나라가 있다고 이야기를 해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곤 한다.
"오! 한국? 대단해! 나는 일본에 너무 가고 싶어." "일본에 가는 게 내 인생 최대의 꿈이야!" "일본 문화가 너무 좋아"
문화라고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애니를 뜻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왜냐면 이 이후에 어떤 애니를 좋아하는가. 어떤 애니를 본 적이 있는가 등을 이야기하고, 내가 장단을 맞춰주지 못해서 금방 나에 대한 흥미를 잃곤 했다.
이렇듯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일본에 관한 이야기를 거쳐야 진짜 우리의 자기소개를 할 수 있는 이상한 상황들이 종종 발생하곤 했다.
혹은 본인이 최근에 다녀온, 이전에 다녀온 일본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으며 내가 당연히 공감하겠거니, 한국도 당연히 이렇겠거니 단정 짓고 이야기하곤 한다.
"나 일본 너무 좋아해. 일본 문화 너무 좋아해"라고 하면 모든 아시안이 좋아하고 공감해 주고, 당연히 본인과 같이 일본의 팬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유럽의 국가들은 각각의 국가와 문화를 가졌는데 아시아 국가들은 모두 다 비슷한 문화라고 알고 있나?
물론 이 사람들의 목적은 나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오기 위함, 아시아에 관한 관심을 보여주면 내가 더 좋아하겠지라는 생각 등 좋은 의도라는 걸 알지만, 이런 대화를 새로 만나는 사람들과 같은 레퍼토리를 6년 이상 겪은 나는 이제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졌다.
나는 그냥 각자의 이야기를 했으면 한다. 굳이 왜 아시아 사람만 만나면 다른 아시아 나라, 자신이 아는 다른 아시안 친구 이야기를 꺼내는 거냐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프랑스 사람을 만났을 때 프랑스인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가정 하에 "오 나는 빠에야를 너무 좋아해" "오! 옥토버 페스트 가보고 싶어!"라고 이야기하던가.라고 생각해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말이지. 뭐 그럴 수도. 내 주변에는 없는 걸지도.
3. 옐로 피버, 아시안 페티시, 그리고 실패한 연애
우리 학과 자체는 학생 수가 정말 많지만, 같은 일본어 수업을 제2 외국어로 선택한 사람들끼리 당연히 더 자주 마주치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그들은 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보니 나에게 더욱 관심을 가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학사 생활 동안 우리 과의 나와 그다지 친하지 않은 동기들이 내 절친한 과친구에게 늘 나와 친구가 되게 해달라거나 나와 만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부탁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몇 명은 나에게 적극적으로 연락을 해오거나 한 적도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전혀 그런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거나, 연하는 연애 상대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한국에서 학사를 하다가 갔기 때문에 신입생 친구들보다 최소 3살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늘 과 친구들을 Mes enfants (내 아기들)이라고 부르곤 했다.
일본인 여성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대놓고 나에게 나는 일본여자와 만나보는 게 꿈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꽤 있었고, 이런 사람들은 내가 학사 생활을 한 작은 도시에서는 일본 여자를 만나기 쉽지 않으니 대체할 인력으로 다른 아시안 여성을 타깃으로 삼기도 했다. 특히 중국이나 한국계 아시안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나를 대체품으로 생각하고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기가 세고 본인들이 생각하던 아시안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과는 딴판인 내 성격을 경험한 사람들은 나에게 가졌던 흥미와 관심이 바사삭 부서지고 말았다.
이로써 그들의 고정관념을 타파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은 다음에 파티할 때 네 한국인 여자친구들도 같이 와라며 끝까지 꿋꿋하게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누구나 실패한 연애는 있지. 그런데.
많은 연애를 한 것도 아닌데 하필 그 실패한 연애 중 두 사람이나 일본과 관계되어 있다.
프랑스에 와서 처음 만난 연인은 동양인 페티시가 있는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인 여성에 대한 환상이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한 마디만 나눠봐도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지만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는 당연히 몰랐다. 그걸 알아차릴 만큼 프랑스어를 잘하지도 않았고. 그냥 나를 좋아해 주니까, 친구들이 많이 없는 나에게 친구들을 소개해주니까. 당연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만났지만 세 달도 채 못 만났다. 그는 당연히 일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겠다고 했고, 나는 가라고 했고,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그가 일본 워홀을 다녀온 후 다 읽기도 힘든 장문의 문자를 보내며 다시 본인의 페티시인 일본인 여성의 대체품으로 나를 만나고 싶어 했지만, 그때 나는 안타깝게도/다행히도 조금 자라서, 전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헤어진 후 늘 잘 헤어졌다고 생각했었고 안도한 적도 많았다..!
지금 남자친구 말고 전 남자친구도 어쩌다 보니 일본과 관련이 있는데. 전 남자친구랑은 엄청 좋은 관계로 지냈고, 우리의 관계는 다툼 한 번 없이 끝났다. 내 친한 친구들과도 다 만났었고, 그의 가족들과도 정말 잘 지냈다. 우리는 장거리 연애가 돼서 헤어지게 되었다. 다들 예상했겠지만 그는 일본 지사로 가게 되었다. 나는 확고하게 일본으로 따라갈 생각이 없었고, 그는 언제 프랑스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헤어졌다.
어...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는 주절거림이었다. 쓰면서 생각한 건데, 어쩌면 우연의 일치로 일본과 관련되어 일련의 나쁜 기억들이 생겨버렸고, 나는 아직 성숙한 어른이 되지 못했고 탓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본 탓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기분 좋게 시작한 일본과 나의 관계가 (굉장히 일방적인. 일본은 나의 존재도 모름) 이렇게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서 매우 안타깝다. (?!)
양측의 관계가 조속히 개선되기를 진심으로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