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운 Sep 22. 2024

도서관에서 일어나는 일

3) 오늘도 나에게, 안녕.

기억이란 것이 존재하던 순간부터 여섯 살 무렵까지 서울의 한 작은 골목의 목조 주택에 살았다.  

너른 마당에 사과와 배 나무가 자라고, 커다란 소나무 아래 평상도 있었고, 작은 장독대를 둔 돌담 곁에는 밭도 있었다. 사글세를 내줄 수 있는 작은 방과 부엌도 딸려 있었다. 조금만 걸어가면 오를 수 있는 뒷산도 있었는데 우리 집 주변엔 다 그런 집들뿐이었다. 골목 끝에는 지금은 시골에서나 가끔 볼 듯도 한 방앗간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1980년 대 서울 한 복판에 그런 곳이 있었다는 것을 지금 세대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집에서 나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는 것이 어찌 보면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집은 전체적으로 하얀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지만 우리는 그 집을 '한옥집'이라고 불렀다. 그 시점에 바로 옆 동네인 목동에 대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우리 가족 또한 그 아파트에 청약을 넣었고 당첨도 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우리 아버지가 '아이들은 땅에서 흙을 밟고 자라야 한다'라고 주장한 나머지 결국 이사를 가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 아파트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두고 4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툭하면 아버지를 원망하고는 했다. 아마 그때 아파트에 들어갔다면 우리 삶이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겠지만 그 집에서 일어난 일들이 불혹을 넘긴 내게 이제 와서 큰 기둥이 되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다지 아쉬울 것도 없다. 그 집에서 일아난 일에 대한 추억이 너무 많아서 가슴 한편에는 늘 그리운 생각이 든다. 먼 훗날 돈을 많이 벌면 꼭 그때와 똑같은 그 자리에 똑같은 집을 짓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그것은 앞으로도 꿈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글을 쓰는 와중에도 사실은 내가 현재 그 기억에 의존하여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생경하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나는 꽤나 오랫동안 그 추억을 까맣게 잊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한옥집을 나온 뒤부터는 너무 슬프고 아팠던 일들이 내 삶에 뒤섞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유년기의 행복했던 기억이 재처럼 흩어 사라졌다.


2020년에 진단받은 극심한 우울증이 발등까지 내려앉았다. 

어둡고 지옥 같은 매일이 하염없이 굽어 들어가는 내 등을 쳤다. 

연이어 가까운 사람들이 죽음, 혹은 죽음 언저리를 오가는 질병을 오가는 일련의 사건을 목도한 뒤, 나는 꽤나 시끄러운 방법으로 오래 몸 담은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이후 2년여간 흩어진 내 자아를 찾아보겠다며 수도 없이 여행을 다니고, 4군데의 회사를 전전하고, 투자에 실패하고, 분쟁과 이별을 겪고, 건강마저 잃으며 모든 것에 실패했다는 생각에 잠식당했다.


그러나 지난 3개월 간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했던 경험이 나를 다시 일어서게 했다.

끝도 없는 배움의 공간, 무해하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아이들, 서로를 위해주는 동료들의 격려와 소소한 지지 속에서 나는 인간으로 인해 받았던 상처가 인간을 통해 치유되는 경험을 했다.


아울러, 업의 본질에 대하여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잊혔던 꿈을 찾아보겠다고 시작했던 사서 공부였고, 마침내 원하던 사서가 되었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계속 내 손으로 끝맺지 못하고 사고로 마감했던 커리어에 대한 미련이 줄곧 나를 따라다녔다. 

돌이켜보니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우울증으로 위축되어 살았던 기간이 꼭 10년이었다. 그러나 그 터널을 지나자 대체적으로 나는 일에 열정적으로 몰입했었고 사랑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늘 일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나의 정체성은 결국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어떤 일을 하느냐 보다는 내가 그 일을 어떻게 대하는 지에 대한 마음가짐에 달렸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미련을 마무리하기 위해 평범한 회사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복귀’


위와 같은 단어로 현재를 표현하려 했지만 어쩐지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속세에 잠시 머무름’이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2년의 방황 끝에 결국 나는 그토록 떠나고자 했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000 회사 경영기획팀 리더 배운입니다.”


지금의 인사가 자랑스러우면서도 낯설다.


현재에도 불안과 흔들림은 계속되고 있다. 내 몸과 정신이 분리된 것만 같은 현실 괴리감과 이인 증세를 약이 아닌 운동과 건강한 생활 습관으로 이겨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나는 이 미련을 정리하고 나면 언젠가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돌아갈 곳이 있어 정말 다행이다.

작가의 이전글 도서관에서 일어나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