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도 몇 번의 사업자를 등록했었지만 사업자 등록을 할 때면 은근히 할 일이 많다. 사업장을 구하고 사업자 신청서를 작성한 뒤 온라인에서 결제창을 만들기 위해 통신판매업을 신고하고 또 통장을 개설해야 한다. 여러 번의 절차는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귀찮은 일에 속한다. 하지만 안전한 구축을 위한 시작이라 볼 수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귀찮음을 감수했다. 사업자까지 등록했지만, 나에겐 사업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정확한 목표는 없었다. 그저 외주를 위해 등록한 사업자였고, 목표치나 계획은 없이 시작한 것이었기에 다소 어이없는 상태로 창업을 한 셈이 되었다. 프로젝트의 규모가 커진 것을 제외하곤 달라진 게 없었다. 그저 매일 일하고 수정하고 소통하길 반복했고 연락하기에 바빴다. 오히려 프리랜서의 생활에서 일과 삶의 균형은 더욱 사라지고 없었고,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눈을 감는 순간까지 오로지 일에만 매달렸다.
일이 일정치 않기 때문에 일에 몰두해 완벽한 결과를 만들어야만 한다. 결과가 완벽지 않으면 다음은 없는 것이 프리랜서의 숙명이다. 프리랜서란 언제 사라져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글씨가 단어 옆 괄호 안에 있는 듯했다. 주변에 다양한 예술가와 프리랜서들이 있었지만 정말 하루가 다르게 그만두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고, 그 이유 중 가장 큰 문제는 지속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덩달아 그들은 안타깝게도 예술과 프리랜서의 생활을 모두 접고 회사로 돌아갔다. 그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거친 욕설과 함께 항상 한탄하였지만 그래도 고정적인 수입구조에 자신에게 그렇게 중요했던 예술을 완전히 지운 듯 보여 안타까웠다. 나는 그들의 행보를 보며 혹여나 나도 저렇게 되진 않을까,라는 약간의 불안 때문에 하루 중 일을 놓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젠 식사하는 시간마저 일하는 시간으로 변했다. 그 시간을 줄이고 차라리 업무를 하나 더 보면 빨리 끝낼 수 있을 거로 생각해 점심시간을 스스로 20분 안으로 줄였다. 비윤리적 행위를 자신에게 가장 많이 저질렀다.
나는 끊임없이 지속 가능한 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생각했지만 지속 가능한 외주는 존재하질 않았다. 온통 깎으려는 업체만 수두룩했고 디자인 계열의 노고를 인정해 주는 업체가 적었기에 이것은 언제까지나 단발성으로 남는 듯했다. 막상 사업자를 냈음에도 막막한 것은 모든 프리랜서의 무게인 듯했다. 어디선가 예술가와 프리랜서는 시간이 가면 자동으로 버티는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떠난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 얘기는 오로지 '돈' 때문은 아닐 것이다.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오는 새로운 변화들과 가족들 혹은 지인들 혹은 상황 같은 모든 것들이 좌지우지했을 것이다. 떠난 이들도 아마 항상 예술 혹은 프리랜서 생활을 그리워하며 개인적인 모습이 아닌 이타적인 사람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버거운 일상에 스스로를 태워 일을 하고 있을 때, 나는 환기가 필요해져 전시를 보러 갔다. 강남에 위치한 한 전시장에서 외국 작가의 개인전을 보게 되었다. 그림은 대체로 방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그림이었고, 바람과 물을 표현한 기법이 너무나 사실적이고 안정감 있는 그림들이었다. 원화를 들여온 탓에 기름 냄새가 많이 났고, 나는 그 기름 냄새가 너무도 좋았다. 그림을 보는 것보다 기름 냄새를 맡으며 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전시를 보고 나왔지만 기억에 남는 그림은 딱히 없었고, 전시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버렸다. 돌아가는 버스에서 나는 공모전 사이트를 뒤졌다. 막상 준비된 그림도 없었지만, 그저 보는 것만으로 충족이 되었고, 가장 인상 깊게 봤던 전시를 주최한 성수의 어느 공간에서 공모전을 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끌려 공모 내용을 모두 확인하고 조건을 확인했더니 다행히도 조건엔 충족했다. 문제는 작품이었다. 포트폴리오를 보내야 하는데 작품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고, 공모는 아직 두 달 이상의 시간이 남아있었기에 작품을 또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약간의 객기로 말이다. 하루에 프리랜서 일을 14시간 정도 했고 6시간은 작업을 했으며 나머지 4시간 정도 자길 두 달간 반복했고, 마침내 공모전이 닫히기 하루 전날 나는 포트폴리오를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