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하루하루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오던 유난히도 밝았던 아침, 나를 깨운 것은 알람 소리가 아니라 전화벨 소리였다. 평소라면 모르는 번호를 웬만해선 잘 받지 않는 성격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아침 날 깨우는 전화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는 아주 고상한 목소리의 여성분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며 대화의 문을 연다. 너무 고상하고 잔잔한 목소리여서 그랬는지 잠이 덜 깬 나는 순간 다시 잠에 들뻔했지만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대답을 이어갔다. 알고 보니 강남에 위치한 어느 갤러리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전화의 내용은 공모전에 당선이 되어 전시할 수 있게 되었으니, 미팅을 하자는 이야기였다. 프리랜서 활동으로 작업을 소홀히 하고 있던 나는 순간 '언제 내가 공모전에 넣었지'라며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내가 보낸 메일함을 열어보곤 아차 했다. 서둘러 내용을 확인하고 미팅을 하기 위해 날짜를 잡았고, 작품 두 점을 가지고 오라는 말에 서둘러 패킹했다. 보통 작품 패킹은 은박 완충제로 패킹하는데 그동안 작업을 하지 않고 있어 패킹지마저 동이난 상태였기에 서둘러 가장 빠른 배송을 자랑하는 그곳에서 은박 완충제라 검색해 가장 빨리 오는 것을 시켰다.
다음 날 오전 은박 완충제는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며 누워있었다. 별거 아닌 일이지만 그 순간 다시금 마음에 불씨를 지펴 서둘러 완충제로 꼼꼼히 작품을 포장하기 시작했고 끝내 완충제 위에 작품명을 적었다. 이게 얼마만의 활동인지 괜스레 기분이 좋아 한참을 앉아서 속이 보이진 않지만, 패킹 된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그동안은 프리랜서 일도 일이지만 건강상의 문제가 있어 조금이라도 무리를 하면 겨드랑이에 고름이 차는 질병을 앓고 있어 쉽게 팔을 들지도 심지어는 세수할 정도의 각도도 올리기가 벅찼기에, 붓을 들지는 않았지만, 병원에 다니며 시술과 관리를 주기적으로 하고 있었기에, 이 기회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했고, 다시 용기를 얻었다. 나는 그날 밤 다시 캔버스와 약간의 울컥함 사이에 앉아 이리저리 생각에 잠겼다. 가져다 놓은 붓과 물감, 기름을 덜어내고 작업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그리는 그림이었지만, 큰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 100호 약 160센티미터를 자랑하는 크기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림은 내가 원하는 완성도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 어설프게 하루를 꾸역꾸역 만들어가는 우리들의 인생과 닮아있다. 그렇게 작업을 하며 어느덧 여덟시간을 보냈고, 나는 살아있음을 느꼈다.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삶의 값을 잠시나마 외면할 수 있었지만, 모든 생각의 끝은 어떻게 하면 가치 있는 일이 삶의 값을 지불해줄 수 있을지도 같이 연구해야 하는 노릇이었다. 항상 좋아하는 일은 막상 일이 되면 하기 싫어지고, 그것이 또 돈을 벌어다 주는 것은 쉬운 현상이 아니니 참 어려운 노릇이었다. 가끔 그림이 팔릴 땐 이젠 되겠다 싶다가도 매번 그렇게 팔리지 않으니 놓을 수도 잡기만 할 수도 없는 오묘한 경계에 있다. 생각은 나를 더욱 미천한 인간으로 만들기에 생각을 접고 잠에 들어 갤러리 미팅을 준비했다. 그동안 많지는 않지만, 갤러리 미팅을 자주 다녔기에 예상 질문들과 그에 따른 답들을 스스로 정의해 휴대전화 메모장에 적어 놓곤 안심하며 하루의 끝을 허락했다. 분명 어제만 하더라도 떨리는 감정이 전혀 들지 않았지만, 이상하리만큼 아침은 설렘과 떨림을 주었고, 진정하기 위해 커피를 마셨다. 당시 살던 곳과 가까운 위치에 해당 갤러리가 있었기에 금세 도착했고 생각보다 넓은 규모에 놀랐다.
갤러리 관장님은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고상한 분이셨다. 말투, 행동, 옷 모든 것이 고상 이라는 단어의 자체처럼 느껴졌고, 전혀 무례하지 않지만, 원하는 바를 정확히 말씀하시는 드라마에서 본 듯한 갤러리 관장의 이미지와 흡사했다. 평소 장난기와 말장난을 좋아하던 나도 그날만큼은 토론회에 나온 것처럼 최대한 조리 있고 최대한 안정감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관장님은 옆에 계시던 큐레이터분과 함께 "작가님 작품을 두 번째로 높게 평가했어요."라며 입에 발린 소리로 비행기를 태우셨다. 그렇게 좋은 이야기를 통해 긍정적인 에너지가 갤러리에 가득 찰 무렵 가져간 그림을 보며 약간의 이야기를 나눴다. 별 특이점은 없었지만, 관장님의 한마디가 나를 다시 바닥으로 내몰았다.
"작가님, 모든 작품 액자에 넣어서 전시해 주세요."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액자값은 생각보다 비싸다. 크기가 커질수록 최소 6만 원부터 시작하는데 내가 전시할 작품의 개수는 23점이었다. 최소 비용으로만 잡아도 120만 원 정도의 금액이 액자에 들어가기에 나는 그 공간의 모든 긍정적 에너지를 홀로 받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에둘러 대답을 마치고 황급히 자리 떠나 밖으로 나갔을 땐 하늘도 나의 슬픈 마음을 이해한 것인지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암울이지만 다른 마음을 먹기 위해 생각은 금세 끝이 났고 그때의 현실에 나는 공모전에 합격했음에도 액자값이 부담스러웠기에 전시를 못 할 것 같다는 답장을 태연한 척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