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양수리에 사는 건축가다.
사는 집도 일터도 모두 양수리에 있다. 사무실과 집의 거리는 고작 200m 정도라 출퇴근 시간이랄 것이 없다. 집을 나와 야자매트가 깔려 있는 공원 옆길을 따라 걸으며 팔을 펼쳤다가 오므리는 심호흡을 한 서른 번 쯤 하다보면 어느새 사무실이다. 마실가듯 시도 때도 없이 집과 사무실을 오가니 집에 가는 것이 출근인지 사무실에 가는 것이 퇴근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그럴 정도로 집과 사무실 모두 내게는 편한 장소이다. 이렇다보니 일과 생활이 섞일 수 있는데, 가급적이면 의식적으로 이것을 구분하고 살려고 한다. 일과 생활의 균형을 위해서다. 그럼에도 사무실에 있는 시간이 더 길기는 하다. 건축 설계 일이라는 것이 사람 손을 거치는 일종의 노가다라 시간을 들이는 만큼 일의 결과물이 쌓이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는 하다. 일을 한창 배우던 주니어 시절에는 사무실에 스티로폼을 깔아 놓고 먹고 자고 했는데, 그래도 그때 보다는 상황이 많이 좋아진 편이다.
어젯밤에 혼자 야근하기로 한 것은 잘 한 선택이었다. 역시 아이디어가 필요한 단계에서 어수선한 환경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한다. 쏟아지는 전화와 직원들과의 회의, 성과 없는 상담으로 하루 종일 힘만 드는 제자리 뜀뛰기를 하다가 혼자된 고요한 밤이 되어서야 여주집의 평면이 정리되었다. 가운데에 마당을 두고 집을 ㄷ자로 둘러싸니 건축주가 원하던 작지만 큰 집의 모양새가 갖춰졌다.
어젯밤 노란 트레이싱지에 거칠게 그렸던 평면 스케치를 아침에 부지런히 캐드로 옮겨 그렸다. 개략적인 평면이 그려져야 천팀장이 스케치업으로 모델링을 할 수 있으니 서둘러야 했다. 오후에 면목동 다가구주택의 현장 감리도 예정되어 있어 손은 날아갈 듯 빨라졌다.
점심 먹을 때가 되어서야 캐드 작업을 겨우 끝낼 수 있었다. 다행히 현장에서 귀찮게 하는 전화도 없었고 스텝들도 자기 일 처리하느라 바빠서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침이면 키보드 앞에 앉아 자기를 좀 만져달라고 귀찮게 하는 포도가 없어서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어? 그러고 보니 포도가 안보였다.
‘또 베란다에서 사람 구경하나 보네. 고놈 참 사람 좋아해’
포도는 이른바 개냥이였다. 사람을 잘 따랐다. 특히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항상 지근거리에서 나를 지켜보거나 책상 위에서 잠을 잤다. 그러다 무료해지면 베란다에 나갔다.
사무실은 5층 건물의 3층에 자리했는데, 사무실에 붙어서 사무실 면적만한 베란다가 있었다. 서울에서 양수리로 사무실을 옮겨올 때 이 널찍한 베란다에 반해 보자마자 덜컥 계약을 해버렸다. 물론 서울의 반값도 안 되는 임대료에 더 끌렸던 것도 사실이지만, 베란다에서 보이는 운길산의 능선과 북한강의 윤슬이 아름다워 더 비싸게 불러도 아마 계약하지 않았을까 싶다. 10평 남짓한 베란다 상부에는 불법으로 증축한 4층의 데크가 있어 지붕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비 안 맞는 외부라니, 자연을 즐기기에 더 없는 장소였다.
넓고 지붕도 있어 좋기는 한데, 바닥이 회색의 우레탄 도장이라 건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삭막함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다. 그 때만 해도 설계 일이 많지 않아 통장에 툭하면 0이 찍힐 때였다. 소상공인 대출을 받아 모자라는 보증금을 충당하고 사무실을 꾸몄더니(인테리어라고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책장을 마련하는 비용을 줄여보겠다고 플라스틱 우유박스를 50개 정도 구매해 거기에 이삿짐을 넣어 조금씩 옮겨왔다. 그리고 우유박스를 쌓고 엮어서 책장을 만들어 거기에 책을 넣었다. 선반도 나무를 사와 직접 달았고 페인트도 직접 칠했으니 디자인을 업으로 하는 사무실 치고는 초라해도 너무 초라했다) 베란다에 쓸 돈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하는 것은 장소에 대한 모독이었다.
원상복구도 쉽고 비용도 저렴한 방법을 찾다가 인조잔디를 선택했다. 너무 인조 티가 나고 저렴해 보이면 안 하니만 못하기에, 적당히 도톰하고 갈색 풀도 섞여 있는 자연스러운 인조잔디를 골랐다. 인조잔디를 깔고 차 트렁크에 잠자고 있던 화로대와 캠핑의자까지 배치하니 그럴싸했다. 베란다 공사를 끝내고 화로대에 장작을 태우던 첫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운길산 능선을 넘어가는 해는 장작의 붉은 빛과 닮아 있었다. 얼굴을 붉힌 장작과 붉게 달아오른 내 얼굴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노을 진 하늘과 와인의 색이 절묘하게 어울렸다. 이 때부터 베란다는 사무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다.
포도도 나만큼 베란다를 좋아했다. 툭하면 베란다에서 배를 깔고 앉아 그루밍을 했다. 가끔 화장실 문이 닫혀 있을 때는 인조잔디 위에 똥을 싸기도 했다. 늘 싸던 곳에 싸는 지라 딱히 꾸중을 하지는 않았다. 화장실 문을 닫아 놓은 것은 내 실수이기도 하니까. 퇴근 시간이 되면 홀로 있을 포도가 안쓰러워 항상 베란다 문을 열어 놓았다. 퇴근길에 뒤통수가 따가워 돌아보면 포도는 파라펫 위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는 했다.
아마 오늘도 파라펫 위에서 지나는 사람을 구경하고 있을 것이다.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천팀장을 불렀다.
“철규야. 내가 평면은 얼추 그려 놨거든. 스케치업으로 모델링 좀 해볼래? 이 집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ㄷ자 형태의 집이 둘러쌌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의 정방형 집 가운데에 마당을 품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겠어. 그러면 지붕도 ㄷ자 형태를 따르는 게 아니라 하나의 큰 박공지붕을 씌우고 그 가운데를 비우는 방식이어야 할 거 같아. 처마는 가급적 길게 구성하고. 내 말 알아들었을까?”
“네. 소장님. 안마당까지 집으로 보고 전체에 지붕을 덮으라는 거죠? 안마당 상부는 비우구요.”
“그렇지”
몇 년을 함께 한 사이라 디테일한 설명은 굳이 필요 없다. 디자인 의도만 전달하면, 본인의 생각을 더해서 생각보다 더 괜찮은 모델링을 불쑥 내밀 것이다.
“언제까지 작업할 거야?”
“하루 정도면 되겠습니다. 소장님”
“그래. 그럼 내가 검토하고 수정하는데 하루 정도 걸릴 거고. 삼일 후에 건축주랑 미팅하면 되겠네.”
천팀장과 얘기를 끝내니 12시가 한참 지났다. 점심을 먹고 현장에 가면 현장감리 시간을 맞출 수 없을 듯했다.
‘어차피 오늘 현장은 콘크리트타설만 하면 끝이니, 현장소장님하고 삼겹살이나 먹자’
그 삼겹살이 화근이었다. 콘크리트 타설이 잘 되었다고 기분이 좋아진 현장소장님은 삼겹살 먹자는 내 말에 반색을 했다. 현장 인부들이 밥을 먹는 밥집으로 끌고 가더니 메뉴에도 없는 삼겹살을 시켰다. 소주도 두 병을 시켰다.
“조소장님. 서로 따라주지 말고 각자 마십시다. 좋은 날이니 세 병씩은 마십시다. 하하하”
이렇게 해서 해가 지기도 전에 나는 저물어 버렸다. 붉게 물든 하늘과 내 얼굴이 똑 같아져서는 현장소장님의 손을 붙잡고 고맙다고 연신 머리를 주억거렸다.
“아니. 조소장님이 왜 고마워. 고마우면 건축주가 고마워해야지.”
“고맙죠. 소장님의 좋은 집 짓겠다는 마음이 보여요. 그 마음이 정말 고마워요. 주변 민원도 많은데, 저 걱정할까봐 티도 안내시고.”
“난, 뭐 그냥 도면대로 하는 거야. 설계가 좋으니 나도 신나서 하는 거구.”
그 이후로 말은 계속 이어졌는데, 기억이 없다.
물론 집에 어떻게 왔는지도.
수종사의 종소리를 들은 듯했다. 아니, 내 머릿속에서 울리는 걸까. 뭔가 둔탁한 것이 머리 안쪽을 계속 두드리고 있었다. 이러다가 뇌가 깨져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하다가 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깨보니 9시가 넘어 있었다.
‘아~ 지각이네’
소장이라고 출근을 자기 맘대로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와서 나만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며 살고 있는데, 그게 영 쉽지 않다. 회사까지 고작 200미터 인데, 숙취로 멀어진 거리는 100킬로미터였다. 겨우 몸을 추슬러 사무실에 나가니 나란 존재는 없어도 무방하다는 듯 평온했다. 멍한 머리로 일도 되지 않을 듯해서 포도와 놀아주려고 불렀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소팀장이 걱정을 담아 얘기했다.
“소장님. 포도가 어제부터 이상해요. 저기 책상 밑에서 움직이질 않네요. 오늘 출근해서 보니 여기저기 토했더라구요.”
참견장이인 녀석이 어제부터 움직이지 않았다면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걱정이 됐다.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이름을 부르니 축 늘어진 포도가 고개만 돌려 나를 봤는데, 평소의 동그랗고 빛나는 눈이 아니었다. 머리를 만져주니 힘겹게 손을 핥았다.
“얘 왜이러니? 혹시 니들이 뭐 먹였니?”
“아뇨. 저희는 아무 것도 안줬어요. 어제 재준이가 추르를 주긴 했는데, 안 먹었데요. 그 좋아하는 걸 안 먹은걸 보면, 속이 안 좋긴 한가 봐요.”
화장실에 놓은 포도의 모래변기에 가서 뒤적거리니 모래가 뽀송했다. 소변도 보지 않았나보다, 덜컥 겁이 나서 포도를 무작정 안고 양수리의 하나 뿐인 동물병원으로 뛰었다. 포도의 잠자리인 스웨터로 눈만 보이게 감싸고 혹시 산책 중인 강아지와 마주치지 않도록 큰 길로 달렸다. 동물병원 원장님은 포도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피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피검사의 결과는 십 여분 만에 나왔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정확한 진단이 어렵단다. 신장 기능이 많이 떨어져 있다고 했다.
‘이런, 그 정도 진단은 나도 하겠다.’
일단 약을 먹여보라고 해서 이틀 치 약을 들고 왔다. 주사기로 겨우 약을 먹이고는 스웨터 위에 눕혀 놨다. 책상에 누워있는 포도를 곁눈질로 살피며 도면을 그리는데, 집중이 되질 않는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마우스를 잡은 손 위에 포도가 자기 손을 살짝 얹었다.
‘기운 차리자. 포도야’
직원들 모두 퇴근을 했는데, 난 포도가 맘에 걸려 집에 갈 수 없었다. 약도 먹여야 했다. 아내에게 전화를 해 오늘은 포도 옆에 있겠다고 했다. 아내도 포도가 걱정이 됐는지 늦은 밤 사무실에 왔다. 포도 옆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는데, 울먹거리고 있었다.
동물에게 마음 주는 것을 꺼려하는 아내가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던 것이 포도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포도는 낮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져 있었다. 주사기로 먹인 약도 이내 토해냈다.
날이 밝는 대로 동물병원에 입원을 시켜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내가 돌아가고 나도 포도와 잘 준비를 했다.
오랜만에 사무실 바닥에 침낭을 깔았다. 몇 년 전 상황이 떠올랐다. 그 때는 포도와 한 침낭 안에서 포도의 턱과 이마를 쓰다듬으며 잠들었었다. 집에서 쫓겨 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집에 들어가기 위해 치르는 대가 같은 것이었다.
4년 전 즈음이었나. 양수리 생태공원 앞에 30평 작은 땅이 매물로 나왔었다. 인터넷 부동산 사이트에서 우연히 보게 됐는데, 한달음에 달려와 땅을 확인하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내 집짓기를 결심하고 난 후 꽤 많은 땅을 찾아 봤지만, 이 만큼 마음에 드는 땅이 없었다. 빌라를 짓고 남은 자투리땅이었는데, 바로 앞에 생태공원과 마주하고 있었다.
공원은 생각보다 넓었고 예뻤다. 축구장만한 잔디밭을 품고 있었고 잔디밭 주변으로 습지가 길게 이어졌다. 습지가 끝나는 곳에는 하늘을 가릴 만큼 높고 울창한 두충나무 숲이 있었다. ‘바로 근처가 빌라 단지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숲은 깊고 고요했다.
숲을 벗어나자 햇살이 부서지는 들판이 보였다. 아니, 강이었다. 공단같이 윤기 있고 빛나는 강이었다. ‘아! 근처에 이런 너른 강이 있다니.’
땅에서 직선거리로 고작 200m 정도에 북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숲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는데, 3층 정도 높이면 강이 보일 것이었다.
‘이 땅은 내 땅이 될 수밖에 없겠구나.’
그렇게 운명처럼 다가온 땅을, 보러 온 날에 계약하고 바로 설계에 들어갔다.
양수리는 아내와 내가 꼭 살고 싶었던 동네였다. 가끔 주말 아침이면 한 줄에 천 원짜리 김밥 두 줄을 사서는 두물머리 벤치에 앉아 물안개를 보며 김밥을 먹었다. 나름 우리 부부가 누리는 호사였다. 그렇게 소망하던 곳에 집을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오죽 좋았을까. 아내와 나는 서로가 바라는 것들을 설계에 담았고 욕심이 많았던 탓일까? 다른 일과 병행하는 것이 힘들어서였을까? 집의 설계는 1년 가까이 걸려서야 끝이 났다.
이제 짓는 일만 남았는데,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다. 도곡리 집으로 오면서 전세를 줬던 서울의 작은 아파트를 정리해도 모자랐다. 결국 직접 공사를 해보기로 했다. 시공사에게 맡길 때 들어가는 관리비와 이윤, 현장소장 인건비를 줄여보자는 심사였다. 설계와 감리를 업으로 하고 있는 내게 산경험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막상 직영 공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나니 간절함 밑에 깔려 있던 불안과 걱정이 비집고 올라왔다.
‘남이 하는 공사를 참견만 해봤지 네가 할 수 있겠어?’ 라고 걱정이 속삭였다.
‘그러다 공사가 잘 못되기라도 하면, 네 가족 길바닥에 나 앉는 거야’ 불안이 거들었다.
그 때 옆에서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이 아내였다.
“당신이 지은 집이라면 비가 새더라도 참을 수 있을 거 같아. 뭐, 비가 새면 양동이 받치고 살면 되지. 추우면 꼭 안고 자면 되고. 그런데, 그렇게 안 지을 거잖아. 당신이 건축한 게 몇 년인데. 난 당신 믿어. 그리고 당신은 건축, 죽을 때까지 할 거잖아. 더 좋은 건축을 하려면 직접 지어도 봐야지. 난 괜찮으니까,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이 말에 결심을 굳혔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사무실을 양수리로 옮기는 것이었다. 내 일과 집짓는 일을 병행하려면 아무래도 현장 근처에 사무실이 있는 편이 좋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친한 건축가들이 작별의 선물로 염려의 말을 한보따리 안겨줬다.
“이제 겨우 서울에서 자리 잡고 일하고 있는데, 거길 왜 들어가?”
“설계사무실은 서울에 있어야 돼. 왜 하필 양평으로 가는데, 지역 텃세가 얼마나 심한지 몰라?”
“조소장님. 양평에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양평 설계비 시세 모르세요? 어떻게 경쟁하려고 그러세요.”
일리 있는 걱정이었다. 내가 너무 무모하고 성급한 결정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내 집짓기에 정신이 팔려 업을 내팽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도 미래를 생각하며 내린 결정이었다. 서울에는 건축사사무소가 5천개 이상이 있다. 양평에는 고작 50개 남짓이다. 서울에는 더 이상 건물을 지을 땅이 남아있지 않은데, 양평은 땅이 넘쳐 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내 영업 방식은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이라는 점이다. 서울에서 사무실을 할 때 상담을 오는 예비건축주에게 늘 하는 질문이 있었다.
“저희를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그러면 대부분이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알게 됐어요.” 라거나 “블로그에 올리시는 글들이 참 좋았어요. 시골 살이를 참 재밌게 하세요. 건축에 대한 진심도 느껴졌구요. 소장님이면 내 집을 맡겨도 되겠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얘기했다. 사무실이 위치한 동작구의 건축주는 한 분도 없었다. 같은 동네 건축주가 찾아오지도 않는데, 굳이 거기에 있을 이유가 있나?
양수리에 사무실을 구하러 갔다가 처음 구경했던 곳이 바로 지금의 베란다가 있는 사무실이었다. 양수리는 뭐든 쉬웠고 자연스러웠다. 땅도 한 번에, 사무실도 한 번에 구했으니 공사도 한방에 쉽고 편하게 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공사를 시작하고 여지없이 무너졌다. 주변 민원이 거셀 것이라 예상해서 겨울공사를 시작했건만 추워 창문을 꽁꽁 닫고 살아도 민원은 빗발쳤다. 공원의 전망을 다 가졌다가 나 때문에 뺏기게 생겼으니 그 억울함이 오죽할까 이해는 됐지만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낮에는 민원과 일에 시달리다가 밤이 되면 사무실에서 뜻하지 않은 숙직을 했다. 겨울에 콘크리트 타설을 하게 되면 보양을 잘 해줘야 한다. 타설한 곳에 비닐을 씌우고 열풍기를 가동해서 따뜻하게 온도를 유지시켜줘야 하는데, 열풍기 관리를 하려면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열풍기는 3시간 마다 등유를 넣어줘야 했다. 사무실 바닥에 침낭을 깔고 3시간 타이머를 맞췄다. 사무실 바닥이 온돌이어서 등은 따뜻했다. 그렇게 피곤하고 외로운 밤이 시작되면, 포도가 침낭 안으로 들어와 내 배위에 머리를 기대고 골골 대며 잤다. 어떤 자장가 보다 편안하고 위안이 되는 골골송이었다.
그 때처럼 침낭을 깔고 누우니 포도가 휘청거리며 걸어와 침낭 안으로 들어왔다. 힘겹게 머리를 배 위에 올리고는 들릴까 말까한 소리로 골골거렸다. 포도는 집을 짓는 6개월 동안 내가 외롭지 않도록 옆을 지켜줬는데, 난 몇 년이나 이 녀석을 홀로 외롭게 뒀다. 집을 짓고 난 이후 단 하루 밤도 같이 있어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미안함으로 눈물이 났다. 포도는 배를 기어 올라와 내 얼굴을 마주하고는 볼을 핥았다. 미안할 것 없다는 듯 또 나를 위로해줬다.
아침에 눈을 뜨니 포도가 옆에 없었다. 다행히 기운을 차린 것일까? 그래서 베란다에 나가 사람구경을 하고 있는 것일까? 베란다에 가보니 포도는 거기에 없었다. 차가운 바람이 지나가고 몸에 오한이 왔다. 불안했다. “포도야~” 이름을 부르며, 사무실을 살폈다. 포도는 책상 밑의 더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어제보다 더 안 좋아진 것이 분명했다. 병원이 문을 열려면 두 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포도를 조심히 꺼내서 안았다. 힘들어 하는 포도에게 어떻게 해줘야할지 몰라 답답했다. 포도를 스웨터에 싸서 베란다로 나갔다. 밖의 바람이, 햇빛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포도를 안은 채 캠핑의자에 앉았다. 미동도 없는 포도를 보며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조금만 아파도 아픈 것을 티내기 마련인데, 고양이는 아프면 아플수록 고요해졌다. 난 그 고요함이 무서웠다.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포도는 좀 어때?”
“많이 안 좋네. 병원 문 열면 바로 데려가려고”
“나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일 보고 빨리 올게.”
아내는 양수리로 이사를 온 이후 조경공부를 시작했다, 기능사도 따고 교육도 받더니 조금씩 조경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주택 신축 현장의 작은 정원 공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래. 걱정하지 말고. 나무 잘 심고와.”
의자에 몸을 더 기대고 포도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맨 날 귀찮아만 하다가 마음을 담아 포도를 만지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또 포도에게 미안해졌다.
직원들이 하나 둘 출근을 했다. 기분 좋은 인사를 건네려다 포도를 보고는 이내 걱정이 가득한 인사로 바뀌었다, 슬슬 병원을 갈 시간이었다.
전 날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진 포도를 보더니 동물병원 의사는 적잖이 당황했다. 서 있기조차 힘들어 누워서 눈만 껌벅이는 포도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결국 입원을 시키자고 했다. 수액 주사를 놓으며 경과를 지켜보겠다고 하는데, 왠지 믿음이 가질 않았다. 그래도 다른 대안이 없었다. 의사는 당장에 좋아질 것도 아니니 일을 보고 저녁때 오라고 했다.
포도에게 걱정하지 말고 있으라는 마음을 담아 눈을 깜빡였다. 포도도 그 마음을 알아챘는지 마주 눈을 깜빡여줬다.
“힘내라. 포도야. 좀 있다가 올게.”
예정된 상담이 있어 병원에 오래 있을 수도 없었다. 며칠 전 어떤 여성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목이 쉬어 있었고 기운이 없는 목소리였다. 보통 건축 상담을 요청하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기는 해도 호의가 느껴지고 기대가 섞여 있기 마련인데, 이분은 뭔가 체념한 듯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집을 지어야 됩니다. 그래서 상담을 좀 받고 싶은데요. 제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설계사무실로 갈 수는 없어요. 죄송하지만 이곳으로 오셔서 상담을 해주실 수는 없을까요? 집 지을 땅도 볼 겸해서요.”
얘기에 절박함이 있었다.
‘집을 짓고 싶어요. 가 아니라 지어야 한다고?’
평상시라면 사무실로 오시라고 설득을 했겠지만 왠지 가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절박함이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 궁금했고 내가 가서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게 하필이면 오늘이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무거운 얘기를 듣기 위해 양평 단월면으로 차를 몰았다.
양평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게 숲은 깊었고 길은 좁았다. ‘괜히 온다고 했나?’ 생각이 ‘포도 옆에 있을 것을’ 후회와 섞여 차를 돌리려는 마음을 먹을 때 마침 네비가 목적지 안내를 종료했다. 깊은 산, 무성한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길이 끝나 있었다. 차에서 내리니 개 짓는 소리가 요란했다. ‘들개인가?’ 한두 마리가 아닌 듯했다. 수십 마리가 합창을 하듯 짖어 대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굶주린 애들이 나를 포위한 건가? 잡아먹으려고?
보이질 않으니 더 긴장됐다. 일단 집으로 빨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다 싶어 뛰듯이 걸음을 옮겨 문 앞에서 벨을 눌렀다. 개 짓는 소리가 더 요란해졌다.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 금방이라도 쌀 것만 같아 벨을 신경질 적으로 여러 번 눌렀다.
덜컥, 문이 열리고 경계하는 눈빛의 여자가 나타났다.
“안녕하세...”
말을 끝내지도 못했는데, 여자는 내 팔을 잡고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조소장님이시죠? 죄송해요. 문을 빨리 닫아야 해서요.”
얘기하는 여자의 뒤로, 이럴 수가 어림잡아도 열 마리가 넘는 개들이 나를 보고 짖고 있었다.
“많이 놀라셨죠? 전화로는 말씀을 못 드렸어요. 제가 이렇게 살아요. 애들을 돌봐야 해서 외부활동을 거의 못해요. 사무실을 갔으면 좋았을 텐데... 오시라고 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이럴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럴만하네요. 전부 몇 마리인거예요?”
“집 안에 스물다섯마리 정도 될 거예요. 밖에도 그 정도 있구요.”
정신을 차리고 개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크기도 달랐고 품종도 각양각색이었다. 어디 영화에서 봤음직한 다리가 길쭉하고 늘씬한 아이도 있었고 털이 복실해서 눈도 잘 보이지 않는 아이도 있었다. 기저귀를 찬 개도 있었고 다리 하나가 없는 애도 있었다.
“지역의 유기견들을 한두 마리씩 거두기 시작했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유기견을 보내는 사람도 생겨서 숫자가 이렇게 늘었네요. 이놈들 덕에 애견용품을 팔아 먹고사니 공생관계라고 할까요? 사나운 아이도 있고 치매 걸린 개도 있어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네요.”
개들에 둘러싸여 꽤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 담담하게 풀어놓은 그녀의 일상은 전혀 담담하지 않았다. 매일이 전투였고 생존이었다. 개들의 식사는 제 때에 챙겨주면서 본인은 제대로 된 식사는커녕 거르기 일쑤였고 그 넓은 집에서 몸을 누일 곳은 야전침대가 유일했다.
그녀는 쉴 곳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 역시 공감했다. 당장이라도 만들지 않으면, 그녀는 쓰러질지도 몰랐다. 롤 트레이싱지를 꺼내 길게 펼쳐놓고 그녀의 바람을 담아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개들은 그녀의 시야 안에 있어야 하고 그녀 또한 개들이 안심할 수 있는 거리 안에 있어야 했다. 밥을 먹거나 쉬거나 일할 때에도 그래야 했으므로 집은 거실을 중심으로 모든 공간이 연결될 수 있도록 스케치했다. 직접적인 접촉은 그녀의 선택이 있을 때만 가능하도록 동선을 계획하고 시선이나 소리 등을 통한 간접적 연결의 방식을 제안했다. 개념적인 스케치였지만 그녀는 내 제안에 반색을 했다.
“그림처럼만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개략적인 설계 과정과 일정 등을 설명하고 조심스럽게 설계비를 제안했다. 다소 놀란 표정이었는데, 내가 산 속에 파묻혀 사니 세상물정 모른다고 속이려드나? 하는 의심의 표정도 스치듯 보였다.
“대표님(사업체를 운영한다고 하기에 호칭을 대표라 했다). 건축 설계는 집짓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겁니다. 단순히 인허가가 목적인 것은 아니에요. 설계는 건축주의 바람을 잘 담아야 하는데, 짧은 시간에 그것을 담기는 어려워요. 기술적인 어려움 때문이 아니라 건축주와 건축가가 함께 만족할 수 있는 설계 안을 도출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뜻입니다. 작은 집을 설계하는 데 저희 같은 경우 보통 5개월 이상 걸려요. 그리고 집을 짓는 기간도 그 만큼 소요되죠. 집을 짓는 동안에 저희는 설계대로 잘 지어지는 지 감리를 하게 되구요. 1년 가까운 시간을 저희와 함께 하신다는 거죠. 저는 집짓기를 농사에 비유하곤 합니다. 설계를 하고 좋은 시공사를 선택해 잘 지어질 수 있도록 관리하는 과정이 농사의 과정과 닮아 있고 그 만큼의 시간도 걸리기 때문이죠. 그 전체 과정을 함께 하는 비용이라고 생각하시면 덜 부담스러우실 거예요”
이 말을 듣고는 그녀가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뭔가 오해가 있으셨나 봐요. 제가 처음 상담을 요청 드렸을 때는 저 혼자 사는 집이라 생각하셨을 텐데. 아니, 일부러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에요.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할지 난감해서 그랬어요. 그런데, 애들과 제가 함께 살 집의 스케치를 보니 집이 꽤 넓어 보이고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을 텐데 생각보다 비용이 저렴해서 그랬어요.”
“집의 크기가 조금 작거나 크다고 해서 설계 비용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아요. 그럼, 괜찮으신 것으로 알고 계약서 준비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려요.”
“대표님. 뭐 하나만 여쭤 볼게요. 50 마리면 아무리 개를 좋아한다고 해도 같이 산다는 건 꿈도 못 꿀 일인데요. 어떤 마음으로 거두신거예요?”
“글쎄요. 무슨 사명감? 이런 건 아니에요. 애들이나 저나, 이 세상사는 모든 것들이 한 개의 목숨으로 살잖아요. 그 목숨 다 귀한 거구요. 저 아니면 목숨 부지할 길이 없어 보이는 애들을 어떻게 내치겠어요. 제가 전생에 목숨 귀한 줄 모르고 살았나 봐요. 지금 이렇게 벌을 받고 있으니.”
미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딱 하나의 단어가 머릿속을 꽉 채웠다.
- 목숨 -
생명이라는 단어와는 다르게 뭔가 절박함이 더해진 말이었다. 다들 목숨 하나로 사는 세상이란 당연한 말이 새삼스런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 생각은 내 일에 까지 미치게 되었다.
‘난 과연 집을 설계하면서 가족의 목숨을 담보하는 중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을까?’
달리 생각해보면 집은 목숨을 의지할 곳 없어 찾아온 개들을 맞아준 대표님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아름다움 이전에 절박함이 존재하는 것이 집이다’
라는 데에 생각이 이르자
‘설계자로서 나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결국, 설계자인 나도 남이 아닌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 절박함 속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때론 그 절박함에 매몰되지 않도록 전문가로서의 창의를 드러내면서 말이야’
기대하지 않았던 배움을 얻었다는 뿌듯함으로 잠시 가슴이 뻐근해졌지만 또 다른 목숨에 대한 걱정으로 가슴은 이내 쪼그라들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포도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고양이의 목숨이 9개라는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목숨이 9개나 있을 정도로 질긴 생명력을 가진 것이 고양이 아니었나? 포도도 양수리 사무실로 옮겨오기 전에는 꽤 거칠고 투박한 묘생을 살았던 고양이었다. 산책을 즐기던 고양이었고 마당을 지키던 파수꾼이었다. 그랬던 포도가 갑자기 까닭도 알 수 없이 위독한 것이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포도야. 이제 겨우 하나의 목숨을 쓴 거야.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고 얼른 버리고 남은 여덟 개의 목숨으로 나랑 오래오래 살자’
기도하며 포도에게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