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8. 영업 이사의 빈자리

by 보통의 건축가


포도는 인적이 없는 늦은 밤에 묻었다.

달과 아내가 삽질하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병규씨. 좀 깊이 파요. 포도 위에 나무를 올려놔야 하니까.”

난 대답 없이 땅만 팠다. 생각에 깊이 빠져 아내의 말을 못 들었기 때문이다. 포도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반려’의 사전적 의미는 ‘짝이 되는 동무’다. 포도는 반려 이상의 가족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서로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가족이었다. 여기서부터 슬픈 결과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선주야. 너는 고양이나 강아지를 다시 키울 수 있을 거 같아?”

“아니. 포도를 보내는 게 이렇게 힘든데. 그걸 또 겪으라고? 다신 안 키울 거야.”

아내의 마음도 내 마음과 같았다.


아내가 골라 온 회화나무는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수형이 예뻤다.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가지의 색이었다. 노란 물감을 칠한 듯 가지가 온통 노랬다. 가지뿐만 아니라 잎도 노랬다. 포도의 황금색 털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땅을 70cm 정도 파내려 갔더니 아내가 그만 파도 되겠다며, 땀을 닦으라고 수건을 건네줬다. 땀을 닦으며, 아내 모르게 흘린 눈물도 닦았다. 포도가 잠자리로 삼았던 스웨터를 땅에 깔고 한지로 싼 포도를 조심스럽게 앉혔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쭈그려 앉아 작별 인사를 했다. 아내와 삽으로 흙을 한 번씩 포도위에 뿌리고 함께 나무를 들어 포도 위에 올려놨다. 뿌리 주변으로 흙을 채우고 꾹꾹 밟아줬다. 포도가 웃고 있는 듯 달빛을 받은 나무가 환하게 빛났다. 곁에 있으니 안심하라는 듯 잎을 살랑살랑 흔든다.

회화나무를 우리는 포도나무라 부르기로 했다. 포도나무는 작은 정원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의 시간을 살며 오래도록 함께 할 것이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무심코 “포도야” 라고 부르고 말았다. 사무실 문 앞에서 매일 같이 맞아주던 포도를 볼 수 없는 것이 영 어색했다. 아직 사료가 남아 있는 포도의 밥그릇이 눈에 걸렸다.

‘치울까?’

포도를 묻은 지 이제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남아있는 흔적들을 지우는 건 뒤로 미루기로 했다. 모니터를 마주하고 앉아 캘린더를 열고 오늘의 일정을 확인했다. 오후에 여주집의 건축주 분들과 미팅이 예정되어 있었다.

포도 일로 정신이 없어서 천 팀장이 작업한 모델링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는데, 내가 손을 좀 보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이었다.

‘미팅을 뒤로 좀 미룰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미팅을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집을 설계하는 일이 내게는 삼시세끼 밥을 먹 듯 일상적인 것이고 여러 일 중 하나겠지만 건축주에게는 일이 아닌 꿈이었다. 삶의 어느 지점에서 결단한 전환점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건축주와의 약속은 늘 무거웠다. 집을 설계한다는 것은 집을 짓는 행위의 가장 중요한 첫 단추이자 전체 과정 중의 일부일 뿐이다. 설계가 완성됐다고 우리의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집이 다 지어지고 가족이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할 때, 그때가 우리 일의 종료지점이다. 설계 과정에서 건축주와의 협의는 디자인을 구체화하고 결정하는 중요한 단계이자 서로 간의 신뢰를 쌓는 행위이다. 이렇게 다져진 신뢰로 집짓는 과정을 함께 하는 것이 건축가의 일인 것이다. 오늘의 협의도 신뢰의 벽돌을 한 장 쌓는 과정이니 미루면 안 되었다.


천 팀장에게 지시했던 모델링을 열어 확인했다. 매스의 기본 방향은 얘기한 대로 정리가 되었는데, 뭔가 마뜩치 않았다. 군더더기가 많았다. 아마도 천 팀장의 욕심에서 비롯된 결과일 것이다. 하고 싶은 것, 넣고 싶은 것이 많을 때였다. 나도 그랬으니까.

손을 댈까 하다가 관두기로 했다. 건축주와 협의 때 분명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터인데, 그 때 본인이 직접 듣고 깨닫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9시가 되니 직원들이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했다. 사무실로 들어서며 포도의 빈자리를 확인하고는 내 심기를 살폈다. 물론 그들도 황망하고 마음이 안 좋았겠지만, 나와 직원들이 생각하던 포도의 존재는 서로 다른 위치에 있었음을 알기에 슬픔의 농도가 다른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내게 포도는 가족이었다면, 직원들에게 포도는 한 직장에 몸담고 있는 동료였다.

사무실로 포도를 데려오기로 한 것은 나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포도가 한창 도곡리 집에서 살육을 일삼을 때,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고자 함이었고 남자만 득시글거리는 마초 같은 사무실의 분위기를 좀 더 부드럽게 해보려는 의도가 있었다. 직원들이 당연히 좋아할 것이라 지레 짐작했던 것은 포도의 모험담을 직원들에게 가끔 들려줬을 때 포도를 보고 싶다는 아우성 때문이었다. 물론 직원들은 포도를 환영해줬다. 그런데 몸은 마음과 달랐는지 직원 세 명중 두 명이 알러지로 고생했다.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는 겨우 진정이 됐는데, 그 직원들은 늘 멀찍이에서 포도를 사랑해줬다.

처음 한 동안은 포도가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내가 직접 챙겼다. 포도 화장실의 똥과 오줌을 치우고 사료와 물을 챙기고 털을 빗겨 줬다. 그러다 직원들이 나눠서 챙기기 시작했는데, 알러지가 없는 직원은 포도의 미용을 담담했고 알러지가 있는 직원들은 먹이 주는 것과 화장실을 각각 챙겼다.

포도는 출근하는 우리를 문 앞에서 맞아줬다. “땡”하고 엘리베이터가 멈추면 포도는 유리문 안에 대기하고 있다가 도어락의 번호를 누르고 문을 여는 순간 문 밖으로 나와 우리를 한 바퀴 돌고는 머리를 부비며 인사를 했다. 그것이 우리의 루틴이었다. 포도와 우리는 서로에게 부비고 스며들었다.


점심때가 돼서 직원들과 함께 포도를 보러 갔다. 청명한 날씨였다. 날씨에 어울리는 샛노란 금계국이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직원들이 금계국과 개망초를 꺾어 커다란 꽃다발을 만들었다. 직원들이 회화나무를 보고는 감탄을 했다.

“소장님. 저런 나무는 처음 봐요. 온통 노랗네요.”

“황금회화나무라고 한다네. 아내가 골랐는데, 포도랑 닮았지?”

“맞아요. 누가 봐도 포도나무네요.”

꽃다발을 회화나무 아래에 놓고 잠시 묵념을 했다. 회화나무와 금계국이 어우러지니 노랑으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우리는 나무 옆에 돗자리를 깔고 옹기종기 모여서 김밥을 먹었다. 포도가 있을 때 날이 좋으면 종종 사무실 베란다에서 김밥을 먹고는 했다.

인턴사원으로 이제 막 사무실에 들어온 막내에게 소팀장이 포도가 영업이사가 된 사연을 얘기해줬다.

포도는 붙임성이 좋은 고양이었다. 사무실로 집을 옮기고서 낯선 사람을 많이 만났지만 금방 곁을 주고 애교를 부렸다. 상담을 하러 온 예비 건축주들은 포도를 보고는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풀기도 했고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의 놀이 친구가 되 주기도 했다.

그런데 포도의 행동에 특이하고 놀라운 점이 있었다.

사무실에 오는 거의 모든 손님들에게 헤프다고 할 만큼 친한 척과 애교를 부리지만 회의 테이블로 올라와서까지 애교를 부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특이한 것은 알겠는데, 그게 왜 놀라운 건데요?”

막내가 소팀장의 얘기에 끼어들어 질문을 했다. 이야기의 흥을 깬 막내에게 눈을 흘기더니 소팀장이 이야기를 마저 이어갔다.


포도가 간혹 테이블로 올라오는 상황이 놀라운 이유는 그 날의 상담자와는 결국 설계계약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포도의 애교와 사랑스러운 눈빛에 상담자가 홀라당 넘어간 것인지 우리와 합이 잘 맞아 계약까지 이어질 만한 사람을 포도가 먼저 알아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포도의 적중률은 100%였다.

우린 어느 때부턴가 포도를 영업이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농담 반 진담 반의 마음이었다.

예비 건축주의 상담이 잡히는 날이면, 우리는 영업이사의 눈치를 봤다. 부디 테이블 위로 올라오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올라오는 때보다 안 올라오는 때가 훨씬 많았다.

뭐. 당연하지 않겠나. 상담하는 족족 계약이 되는 설계사무실이란 현실에 없으니까 말이다.

소팀장은 포도의 이런 특별하고 신기한 재능을 자기가 제일 먼저 알아챘다며,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막내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지만 모두가 동의하니 섣불리 얘기를 하지 못하다가 걱정스런 말투로 질문을 던졌다.

“소장님. 그러면 앞으로 계약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글쎄다. 포도가 없으니 앞으로 계약은 없는 건가? 하하하. 포도가 지금까지 잘 도와줘서 좋은 결과물이 많이 쌓였잖아. 그 힘으로 또 계약할 수 있겠지.”

“혹시 아니? 이 나무가 잘 살아 있는 게 테이블 위에 올라온 포도와 같은 행운이 될지.”

직원들과 추억이 될 만한 점심이었다. 그 추억 속에는 황금회화나무와 돗자리, 김밥이 등장할 것이고 그 중심에는 영업이사 포도가 자리할 것이다.

이제 사무실로 돌아가 여주집의 미팅을 준비해야 했다.

‘할머니(여주집의 건축주를 난 할머니라 불렀다)께서 포도를 많이 예뻐해 주셨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약속 시간 10분 전, 여주집의 건축주 부부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할아버지는 무거워 보이는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계셨고 할머니는 뒤에서 환하게 웃고 계셨다. 테이블에 앉으시며 할머니는 텃밭 얘기를 꺼내놓으셨다.

“이 양반이랑 텃밭에서 일하다 왔어요. 거기 오이고추가 얼마나 많이 열렸는지 소장님하고 여기 식구들 생각이 나서 저희 먹을 것만 남기고 다 따왔어요. 잘했죠?”

“아이구. 저 오이고추 정말 좋아하는데, 감사해요”

부부는 이제 막 교직에서 은퇴를 하신 선생님이셨다. 할아버지는 대학교에서 한학을 가르치셨고 할머니는 교감선생님이었다. 염색도 하지 않은 희끗한 머리와 개량한복이 잘 어울리는, 멋있게 나이 드신 노부부였다. 부부는 은퇴 이후의 꿈인 시골 살이를 위해 벌써 몇 년 전부터 준비를 해오고 있었다. 집 지을 땅을 알아보고 시골 살이를 먼저 체험해보겠다고 텃밭과 농막을 빌려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현업에 있을 때부터 오랜 기간 건축에 관련된 서적을 탐독하셨다. 꽤 많은 독서량으로 처음 상담할 때 나를 긴장시키셨는데, 건축에 대한 기술적 이해 때문이 아니라 건축을 대하는 관점 때문이었다. 보통의 예비 건축주의 경우는 목전의 목표 때문에라도 건축을 지식의 차원으로 접근하기 마련인데, 할머니는 조금 달랐다. 어떻게 지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 보다는 어떤 집에서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많으셨다.

계약 이후 첫 미팅 때 할머니가 그 고민에 대한 질문을 던지셨다. 그때 속으로 얼마나 당황을 했는지 모른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장님. 저는요. 영성 있는 집에서 살고 싶어요. 그런 집이 가능할까요?”

난 바로 답하지 못했다.

보통의 경우, 건축주의 바람은 필요한 공간이나 스타일에 한정된다. ‘방은 세 개가 있으면 좋겠어요.’ 라던가 ‘작아도 마당이 있고 텃밭도 가꿀 수 있으면 좋겠어요.’ 라거나 ‘주방과 거실은 하나로 연결되고 가급적 컸으면 좋겠어요.’ 이거나 ‘전 외관이 모던했으면 좋겠어요’ 이런 식이었다. 그러면 나는 다시 건축주에게 물었다.

“건축주께서는 집의 어떤 공간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할 거 같으세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건축주는 대부분 당황스러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집은 사람에게 살기위해 필요한 공간이지 행복감을 주는 공간이라고 여기며 살아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내가 묻기도 전에 치고 들어온 것이다. 당황한 것은 나였다.

할머니에게 다음 미팅 때 그 답을 드리겠노라 말씀드렸다.

그렇게 ‘영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도대체 ‘영성’이란 뭘까?

국어사전은 ‘신령스러운 품성이나 성질’로 설명하고 있는데, 집이 신당도 아니고 그건 아닌 듯싶었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기로 했다. 인문학자, 철학자들이 말하는 ‘영성’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인터넷이나 논문도 살펴보면서 나름의 윤곽을 그렸다. 개략적으로 파악한 ‘영성’에 대한 의미는 ‘온전한 삶의 방식’이자 ‘세상의 보편성과 인간이 일치되는 지점’이었다.

그렇다면 ‘영성이 있는 집’이란 ‘세상과 내가 합일되어 온전하게 살아가는 곳’이 된다. 본바탕 그대로 온전하게 산다는 건, 박제되어 산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계절이 변하고 나이를 먹는데, 어찌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변하되 스스로의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 중심은 그대로이지만 겉은 세월을 따라 삭아 가는 것이 사람이고 집의 온전함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세상과 내가 합일이 되는 곳’이란 의미를 집에 대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집에 대한 생각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평소에도 집은 작은 세상이라고 생각했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를 온전하게 유지시키는 세상이 내겐 집이었다.

이런 생각을 미팅 때 말씀드렸다.

그 때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내 마음과 같아요. 그러면 우리 집은 어떻게 될까요?”

라고 물으셨다.


“고졸한 멋을 가진 집이었으면 좋겠어요. 영성이란 것이 화려한 겉모습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형태적인 기교는 최대한 자제할 생각입니다. 알맹이만 두고 군더더기는 제거하려고 해요.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멋있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집이 닮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재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야 할 것 같네요.

두 분의 삶에 과하지 않은 집을 바라셨으니 집은 크지 않는 편이 좋겠죠. 세상을 담는 집이 꼭 커야 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집의 안팎을 구분하지 않고 전체를 내 집이라 인식하게 될 때 우주를 담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고 봐요. 그래서 안마당을 적극적으로 활용해볼 생각입니다.“


할머니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정말 기대가 되는 말씀인데, 머릿속으로 그려지지 않네요.” 라고 하셨다.

“당연하죠. 저도 아직 생각뿐인 걸요. 자~ 이제 같이 만들어보자구요.”


그렇게 해서 여주집의 설계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 미팅이었다. 모두 회의테이블에 앉아 평면도를 앞에 놓고 모니터에 띄어 놓은 모델링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봤다. 슬쩍 할머니의 표정을 살피니 예상대로 뭔가 아쉬운 표정이었다.

설명을 다 들은 할머니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평면도는 이제 제가 바라는 걸 다 담은 거 같아요. 제가 저만의 공간을 원했고 자식들이 왔을 때 머무를 곳도 원했고 나중에 증축할 수 있는 여지도 남겨달라고 부탁드렸는데, 별채를 두니까 한 번에 다 해결이 됐네요. 별채와 본채 사이의 공간은 할아버지가 원하는 탁구대를 놓을 수도 있을 것이고 필요하면 나중에 증축할 수 있는 공간도 되겠어요. 별채에서 할아버지한테 방해받지 않고 혼자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 신나는데요. 여기서 묵상하고 책을 읽는 모습을 상상하니 가구는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냥 앉은뱅이책상 하나만 있으면 될 거 같아요. 그래야 자식들이 왔을 때 넓게 쓸 수도 있겠구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작심한 듯 말씀을 이어갔다.

“평면을 보고 소장님 말씀을 들으니 소장님이 얘기했던 ‘고졸함’이 그려져요. ㄷ자 집에 둘러싸인 안마당을 보고 있으니 세상을 담았다는 말씀도 어렴풋이 이해가 가구요. 그런데 모델링은 제가 생각했던 거와 많이 다르네요. 너무 화려, 아니 요란해요. 나 멋지지? 하고 뽐내는 거 같기도 하구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직설적이죠?”

예상했던 당연한 반응이었다. 천팀장을 보니 의기양양했던 표정이 이내 풀이 죽은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솔직하게 말씀 하시는 게 할머니 매력인 걸요? 제가 거기에 푹 빠졌잖아요. 할머니께서 지적하신 부분은 저도 동감합니다. 제가 너무 쓸데없이 욕심을 부렸어요. 다시 ‘영성’, ‘고졸함’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다시 만져보겠습니다.”

“하하. 저도 이래서 소장님을 좋아하잖아요. 저희 얘기에 귀기울여주고 반영해주시고. 그런데 소장님, 별채 아이디어는 정말 기가 막힌 거 같아요. 저희는 생각도 못했던 건데, 역시 건축가는 다른가 봐요”

“제 경험에서 나온 겁니다. 저도 별채가 있는 집에서 살아봤거든요. 지금의 집 말고 전의 도곡리 집이요. 포도도 거기서 만났죠.”

아차 싶었다. 역시 할머니는 두리번거리시더니 이상하다는 듯 물으셨다.

“이상하네. 포도가 안 보이네요. 저희가 오면 먼저 테이블 위로 올라오던 녀석인데.”

“포도가 두 분을 많이 좋아했죠. 포도도 두 분을 많이 그리워할 거예요.”

“포도 어디 갔어요?”

“며칠 전에 고양이별로 갔네요. 갑자기 아팠다가, 갑자기 가버렸어요”

평소 말이 없으시던 할아버지가

“유별나게 소장님을 좋아하던 고양이었는데, 소장님이 상심이 크겠어요. 소장님이 말씀하실 때 테이블 위에서 뚫어져라 소장님을 바라보던 포도가 떠오르네요. 소장님 말을 알아듣는 거 아냐? 생각할 정도로 집중했는데, 그게 참 신기했어요. 포도가 없으니 많이 허전하시죠?”

“아직도 옆에 있는 거 같아요. 무심결에 포도야 하고 부르기도 하고요.”

눈물을 글썽이던 할머니가 물었다.

“그래서 포도는 어떻게 했어요?”

“저희 집 정원에 묻었어요. 그리고 위에 나무 하나를 심었습니다.”

“수목장을 하셨네. 잘 하셨어요.”


미팅은 자연스럽게 집 얘기에서 포도 이야기로 흘러갔다. 미팅에 참여하지 않았던 다른 직원들도 어느새 회의테이블로 모여 얘기를 거들었다. 소팀장이 이제와 털어놓는다며 포도와의 일화를 꺼내놓았다.

“제가 작년에 건축사 시험 준비한다고 저녁에 사무실에서 공부했잖아요. 그 때를 돌이켜보면 포도는 항상 소장님 책상위에 앉아있었던 거 같아요. 그러다 가끔 일어나서 다른 책상 위를 이리저리 넘어 다니는데, 천팀장 책상 위에서 포도가 하는 짓이 너무 웃긴 거예요. 책상 위에 있는 펜이며 스케일 같은 걸 밀어서 떨어뜨리는 데, 처음에는 그냥 심심해서 장난하나 싶었죠. 떨어진 걸 주워서 다시 올려놓으면, 또 떨어뜨리고 나중에는 그냥 포기하고 내버려뒀어요. 어느 날은 천팀장 책상 위에 있던 머그컵에 머리를 박고 물을 먹는 거예요. 머리통이 머그컵에 푹 들어가 있는 모습이 얼마나 웃기던지. 제가 그걸 본 이후로 제 자리의 컵은 퇴근할 때 치워버리잖아요. 어쨌든 소장님이 천팀장하고 일도 많이 하고 잘 챙겨주기도 하시구요. 포도가 질투가 많이 났었나 봐요.”

천팀장이 왜 이제야 얘기 하냐는 듯 소팀장에게 눈을 흘겼다.

“어쩐지 쓰던 펜이 자꾸 사라지더라니.”

한참을 웃으시던 할머니가 내게 말했다.

“소장님. 전 포도와 함께 보냈다는 별채 얘기가 궁금해요. 저도 제 별채에서 보내는 시간을 상상해보게 그 때 얘기 좀 들려주세요.”

“그럴까요? 포도와 제가 별채에서 어떤 사랑을 나눴는지 들어 보실래요?”

이야기가 길어질 듯했다.

아마 오늘도 함께 저녁을 먹게 되지 않을까 예상하며, 포도와의 추억을 되짚어 가기 시작했다.

keyword
이전 07화7. 첫 번째 환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