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1
소년은 부뚜막에 걸터앉아 바삐 움직이는 엄마의 손을 보고 있다.
엄마는 검은 밥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하얀 밥 한 주걱을 퍼서 은색 밥주발에 담은 뒤
뚜껑으로 밥주발을 덮고 색 바랜 조그만 스티로폼 상자에 집어넣는다.
소년의 기억 속 가장 오래된 장면이다.
동네 어귀를 돌자 저만치 한 무더기의 아이들이 보인다.
고무신에 모래흙을 담아 기차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동네를 벗어나니 작은 산이 나타난다.
아이 손을 잡고 작은 산비탈을 오르는 엄마의 한쪽 손엔 스티로폼 상자가 들려있다.
정상 즈음에 오르자 커다란 건물이 나타났다.
'오~ 우리 교회보다 훨씬 크네, 뭐 하는 곳이지?'
호기심에 빠른 발걸음으로 엄마를 따라 들어간 소년은 다소 실망했다.
책장을 빼곡히 메운 책들이 벽을 둘러싼 모습, 심지어 교회보다 큰 공간에 그 책장들이 가득 들어찬 그 모습은
숨 막히는 답답함을 주기에 충분했다.
'에이 뭐야 우리 집이랑 비슷한 곳이네...'
까까 머리에 검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 중 몇몇은 엄마에게 인사를 한다.
안쪽으로 들어가서 사무실 문을 열자 그곳에 아버지가 앉아 계신다.
'아버진 여기서 뭘 하시는 걸까?'
평소 무뚝뚝한 아버지는 우리를 보고도 역시 별 반응이 없다.
"좀 늦었네"
겨우 꺼낸 한마디가 밥이 늦었다고 투정 부리시는 건가?
다른 사람들과는 대화도 잘하는데 유독 가족들에게 무덤덤한 이유가 뭔지 잠시 궁금해진다.
아버지에게 도시락을 건네주고 난 엄마는 별다른 대화 없이 소년의 손을 잡고 그
'교회보다 큰' 학교 도서관을 나선다.
비탈을 내려오며 소년은 생각한다.
'에이~아이들과 기차놀이나 할걸.. 여기 다시 안 올 거야..'
소년은 아마도 몰랐으리, 10년쯤 후에 본인이 이 학교에 입학하게 되리란걸.....
별로 좋지 않은 기분으로 비탈을 다 내려와 학교 밖으로 나와서 집으로 가는 길에
한 소녀와 마주쳤다.
커다란 검은 단추가 달린 재킷을 입고 문방구 앞 의자에 앉아있던 소녀는
이쪽을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날 보고 웃는 건가?'
물어볼 순 없었지만 어쨌든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동네에 다다랐을 때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엄마와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안방에 들어가서 혹시나 하고 다리가 달린 장롱처럼 생긴
텔레비전 문을 열어본다.
아무도 나올 시간이 아니다
' 왜 꼭 해 질 녘이 되어야 여기서 사람들이 나오지?'
할 수 없이 마루로 나가 책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커다란 책을 한 권 꺼낸다.
소년은 아직 글을 읽을 줄 모르지만 무겁고 커다란 책에 그림이 많다는 건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