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첫 출근 날이다.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이십삼 년 동안 사회와 단절된 상태로 남편의 보호 아래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아침 햇살은 반갑기보다 걱정으로 인해 걷어버리고 싶었다. 어쨌거나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가야 한다는 비장한 마음이 들었다. 병동으로 들어서서 다른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탈의실을 안내받았다. 좁은 탈의실에 캐비닛이 빽빽했다. 캐비닛은 일인용으로 보이는데 그 좁은 캐비닛을 보통 2~3인씩 쓰고 있었다. 아무렇게 놓인 탁자에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앞으로 암울한 시간을 보내게 되겠다는 생각으로 설레는 마음은 접어두었다.
병동은 막 인계가 끝나 의사들의 회진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스테이션 안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동서남북 방향도 모르고 일도 모르는 상태라 그렇게 바쁘게 간호사들이 뛰어다니고 있어도 누구 하나 내게 뭘 하라고 시키는 일이 없었다. 의사들이 회진하는 동안은 전시상황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아무래도 잘못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근무시간이 끝났어도 교육을 받아야 했다. 교육은 자주 있었다. 교육에 수당이 딸려있어 힘들어도 다들 참가했고 수당을 포기하겠다고 해도 간호과에서는 문책이 내려졌다. 그러니 이래저래 교육은 빼먹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아침에 출근했는데 퇴근시간이 저녁이 되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기 위해 가운을 벗는데 다리가 구부려지지 않았다. 새 신발을 신고 종일 서 있다 보니 두 다리가 뻣뻣해졌기 때문이다. 천천히 옷을 갈아입고 병원 로비로 나왔다.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질질 끌며 병원 밖으로 나와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부터는 정상 출근이 시작되었다. 알람 소리에 눈은 떠있는데 몸은 소금에 절인 오징어같이 늘어졌다. 출근해서 일이 시작되면 그날 처치 계획이 있는 환자들의 약품을 싣고 병동 한 바퀴를 돌고 와야 했다. 익숙지 못한 손놀림에 시간이 많이 더디게 되어 일이 순조롭게 진행이 되지 않자 차지 간호사들의 핀잔을 많이 들었다. 어찌 보면 딸 또래의 직원들 사이에 엄마 같은 직원이 섞여 서로 적응하기가 힘들어 물과 기름처럼 떠다녔다. 일이 서툴다 보니 한번 갈 곳을 두세 번 가기도 하고 이 병실 저 병실 헛걸음을 많이 했다. 내 다리는 퇴근할 때마다 퉁퉁 붓고 발은 감각이 없어졌다. 새벽에 울리는 알람을 끄고 눈을 뜨면서 "오늘은 사표 쓰고 와야지" 하는 생각을 매일같이 하면서 일어났다.
아침마다 앓는 소리를 내며 출근해서 두 다리가 꺾이지 않고 신발을 갈아 신을 수없도록 퉁퉁 부은 채 질질 끌면서 퇴근했다. 그러면서 하루를 보내고 일주일이 가고 한 달 두 달 … 일 년이 되었다. 마음은 매일 사직서를 내고 있는데, 집으로 돌아오면 식구들의 해맑은 얼굴이 들고 있던 사직서를 휴지통에 구겨 넣게 되었다. 직장을 갖게 되면서 퇴직 후 막연한 불안감을 갖던 남편의 얼굴이 다소 펴지고, 가지고 있던 대출금을 다달이 갚았고, 늘 마이너스였던 살림에 내 통장 잔고가 마음을 넉넉하게 하여 애들에게 필요한 것을 손쉽게 결재했다. 이런 여유의 힘이 사직서보다 힘이 커서 고단한 직장 생활을 견딜 수 있게 했다. 그러는 동안 수없이 만지는 알코올 소독제가 양손의 지문을 깎아내고 피부가 갈라 터져 피가 맺힐 정도가 되었다. 손가락마다 붙인 반창고가 보기에도 흉해 환자들 앞에 나서기가 민망한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통증이 심하여 일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삼 년을 채우고 나니 자신에게 당당해졌다. 혹사시킨 내 몸의 휴식을 위해서 잠시 쉬기로 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니 아침 시간이 주는 여유가 처음 얼마간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가까운 공원을 천천히 걸어 아침 산책을 하며 마셔보는 공기는 또한 얼마 만인지 상쾌하기가 말할 수 없었다. 그동안 남편도 퇴직을 하고 개인택시를 매입하여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래도 삼 년 동안 새벽에 출근해서 야근이다, 연장근무다 하면서 받은 수입을 통해 남편의 새로운 일을 하는데 보탬이 되어 스스로에게 뿌듯했다. 남편은 퇴직 후에 이런저런 방황 없이 일을 갖게 되어 많이 좋아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쉬고 있지만 언제고 원할 때는 이력서를 들고 어느 병원이든 찾아갈 자신이 있어 삼 년을 견딘 힘이 내가 지닌 큰 자산으로 꼽았다.
남편도 개인택시를 이제 막 시작해서 몸으로 쓰는 노동은 아니라 해도 적응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현직에 있을 때는 점심시간이 되면 장교 식당을 찾아가 당연히 해결했던 식사를, "어디서 끼니를 해결할까" 고민하게 되었다. 배는 고프고 혼자 일반 식당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던 남편이 점심시간이 되면 "같이 밥 먹자"라고 종종 연락이 왔다. 새로운 일을 하면서 힘들었던 시간을 돌이켜보니 남편이 앞으로 겪어야 할 시간들이 만만치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의 시간을 위해 혹독한 대가를 치러 준비되었고 남편은 지금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세상 밖으로 나와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편이나 나나 피해 갈 수 없는 시간이었다.
남편은 현직에 있을 때보다 많은 시간을 일했다. 현직에 있을 때만큼의 수입을 기준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터였지만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았다. 때로 몇만 원을 받고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을 부러워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남편은 꼼꼼하고 성실해서 이른 아침 시골 할머니가 장에 가자면 찾아갔고 할아버지가 병원 가자면 쫓아갔고 안으로 들어올 때 계란 한 판, 쌀 한 자루 사다 달라면 싣고 갔다. 과거에 제복 입은 장교의 포지션이 이제 시골 택시 기사의 폼으로 바꿔가기 시작했다. 제복 입었던 남편의 모습이 어땠었는지 점점 흐려져가고 있었다.
집 앞에 도착한 남편이 나를 태우고 다니던 병원 근처 기사식당으로 갔다. 점심시간이 막 지나서인지 밖에 서있는 사람들에 비해 안에는 빈 테이블이 있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백반을 시켰더니 아주머니가 곧 한 상을 들고 왔다.
"먹자."
남편은 밥을 좋아했다. 둘 다 뜨거운 밥공기 뚜껑을 열어 남편은 밥을, 나는 국을 떠서 먹기 시작했다. 남편의 얼굴에 나의 힘들었던 시간이 투영되며 안쓰럽게 보였다. 흐르는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