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에게 자식에게 부를 지속하게 하는 법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김상국
며칠 전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인생 총량의 법칙』을 가지고 우스개를 한 적이 있었다. 무슨 심각한 얘기는 아니고 “평생 쉬는 숨, 먹는 음식, 마시는 술 그리고 평생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누구에게나 비슷하다.”는 바로 그런 말이다. 대화를 끝내고 난 다음에 ‘왜 그런 말이 생겼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물론 이런 말은 과학적인 얘기도 아니고, 명확한 통계가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구태여 말한다면 어떤 ‘경험법칙’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경험법칙이라고 하기에도 또 약간의 망설여짐이 있다. 어떻든 이런 총량의 법칙에는 두 가지 생각이 밑에 깔려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는 당연히 ‘경험적으로 볼 때 그런 것 같더라.’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평등해지고 싶은 인간의 마음(욕심)이 그런 말을 만들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잘 나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고, 행복하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잘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리고 나보다 더 나은 그들을 볼 때 부러워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어떤 우연한 기회에 좀 더 자세히 그 사람의 사정을 알게 되면 그 사람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픔과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이럴 때 우리는 “그래, 신은 모든 것을 주지는 않아.” 또는 “그래, 인생에는 총량의 법칙이 있는 거야. 그 사람이 젊었을 때 너무 행복했었잖아.” 라는 말을 하게 된다. 바로 그런 인간의 심정이 이런 말을 만든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런 경험을 한적이 있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말 중에 ‘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는 말이 있다. 미인은 오래 살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은 의외로 중국의 소동파라고 한다. 그가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도시 항주의 관리로 갔을 때 미모가 너무 뛰어난 여승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우윳빛 두 볼에 옻칠한 듯한 까만 머리,
쳐 놓은 발에 비치는 눈빛은 옥같이 빛나네.
흰옷으로 선녀의 옷을 지었지만,
타고난 아름다움 더럽힐까 연지 또한 거부하였네.
오(吳)나라의 사투리, 애교 섞인 목소리가 아이처럼 앳되지만,
마음 속 한없이 담긴 수심, 내가 알 수 없구나.
예로부터 미인들은 수명이 짧다는 말이 많은데(自古佳人多命薄),
닫힌 문밖 봄이 다하니, 버들꽃이 떨어지는구나.
(이 시의 해석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전해 받은 번역을 조금 수정하고 거의 그대로 썼다.)
소동파가 항주의 관리로 갔다고 하지만 사실 그의 처지는 귀양 가는 상황이었다. 녹봉도 거의 없었고, 중앙에서 밀려난 그에게 지방 관리들의 괄시도 심하였다. 그래서 당시 항주 사람들이 황폐한 땅이라고 농사도 짓지 않는 동쪽 언덕(동파, 東坡)을 개간하여 자기 스스로 먹을 양식을 마련하였다 (그래서 동파가 그의 호가 되었고, 돼지고기를 어떻게 더 맛있게 요리해 먹을까?를 고민하다가 만든 음식이 바로 그 유명한 동파육(東坡肉)이라는 요리다.)
아마 초창기 그의 고난한 항주살림이 어린 이 여승의 신세를 더욱 손쉽게 이해하게 만들었나 보다. “오(吳)나라의 사투리, 애교 섞인 목소리가 아이처럼 앳되지만,” 이라는 표현을 보면 그 여승과 상당한 대화도 나누었나 보다.
나도 ‘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는 말을 실감했던 경험이 있다. 사실 ‘예쁘다.’ ‘미인이다.’ ‘아름답다.’ 라는 말은 거의 구분 없이 쓰이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매우 다른 말이라고 생각한다. 어떻든 내가 본 여인들 중에서 “아, 이 여자 분은 정말 미인이다.”라는 느낌을 받은 사람이 세분 있었다. 그런데 한명은 자식이 마약중독으로 사망하였고, 한명은 본인이 일찍 사망하였다. 다른 한명은 그리 바람직한 직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때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신은 다 주시지는 않는가 보구나. 인생은 역시 공평한가보다.”
즉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복 또는 행복의 총량은 거의 비슷하지 않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행복하게 보이면서 잘 사는 사람도 많다. 내가 여기서 행복하다는 것은 ‘돈이 많은 것’을 얘기하는 것은 절대 아니니 오해 말기 바란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안빈락도(安貧樂道)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재산은 ‘남에게 돈을 빌리러 가지 않을 정도, 그리고 자식을 키우고, 가끔 편안한 마음으로 나들이를 갈 정도’면 돈 때문에 남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즉 그 이상의 돈을 가지고 있으면 더 좋지만, 행복 지수는 그 이상 가진 돈에 비례하여 커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목적은 사람마다 많이 다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세계를 지배한 알렉산더 대왕도 죽으면서 “나의 관 밖으로 나의 빈손을 나오게 만들어라.”는 전설이 있고, 우리나라의 막강했던 권력 소지자들이 “정치하지 마라. 너무 허무한 것이 정치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도 우리는 많이 들었었다.
그러나 이런 말을 수없이 들으면서도 돈을 많이 벌고 싶고, 권력을 잡고 싶은 것이 솔직한 우리 심정이다. 더욱이 종교가 멀어져 가고 있던 미국에서도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한 때는 대형교회가 나타났으며, 그들의 주장은 “신을 믿으라. 그러면 건강해지고 돈을 많이 벌 것이다.”라고 주장도 했다고 한다. 즉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성 중 강한 본성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런 본성을 만족시키면서도 행복해지는 법은 없을까? 인생총량의 법칙이 작용되지 않게 하는 법은 없을까?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나도 그렇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방법이 없을까?” 학문을 연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멋진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면 과거의 사례를 먼저 찾아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나도 찾아보았다.
부자 중에서 ① 본인과 가정도 행복하고 ② 부(富)가 자손들에게 까지 지속적으로 전달되며 ③ 사회적으로 존경까지 받는 사례가 없을까?
놀랍게도 그런 사례가 상당 수 존재하였다. 우선 미국 최고의 부자라는 강철왕 카네기, 석유왕 록펠러, 철도왕 벤더빌트가 좋은 예다. 그들은 엄청난 부자였고, 그 자손도 현재 부자이며,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사람들이다. 왜 그럴까? 단순한 두 개의 논리가 그 뒤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① 하나는 봉사(어렵게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다른 하나는 ② 자식에 대한 교육이었다.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그 많은 재산을 나를 위해서『만』 사용하지 않고, 사회를 위해서 거의 대부분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록펠러나 카네기 그리고 벤더빌트가 부를 축적해 가는 과정을 보면 잔인하기 짝이 없을 정도였다. 상대방의 석유채굴권을 사들이기 위해 록펠러는 그들이 생산한 석유를 철도를 통해 운송을 못하도록 벤더빌트를 설득하거나, 비싼 운송비를 물도록 하였다. 그래서 생산된 석유를 팔지 못하게 함으로써 아주 헐값에 경쟁자의 유전을 사들여 거의 92% 미국석유 생산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석유업자들이 자살을 하였다. 카네기나 벤더빌트도 거의 동일한 방법으로 경쟁자를 없애고, 독점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한결 같이 만년에 느끼는 것은 『행복하지 않고, 허무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벤더빌트는 “베풀고 살아라.”라는 어머니의 끊임 없는 교육이 생각이 나서, 록펠러는 가난한 모녀에게 우연히 베푼 온정 후에 가지게 된 마음속의 행복을 느끼고, 지금까지의 행동을 크게 바꿨다고 한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OOO 재단, OOO 대학교 등이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만년을 행복하게 보냈을 뿐만 아니라 ①오랜 수명 즉 장수(長壽)와 ②자식들의 번영 그리고 ③ 사회적 명성까지 얻었다. 현대에도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 같은 이들이 자기 재산의 90%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예를 구태여 외국에서 찾을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바로 조선의 거부 임상옥과 구례 거부 운조루 ‘他人能解’ 뒤주의 주인 그리고 그 유명한 경주의 최부자집이다.
임상옥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의주 출신이며, 그는 양반도 아닌 몰락한 중인(中人)으로서 관노(官奴) 출신이었다. 정말 하잘 것 없는 천민이었다. 그러나 뛰어난 재능으로 청나라와의 인삼 무역을 통해, 왕실과 버금가는 재물을 쌓았던 사람이다. 그는 1812년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뛰어난 공을 세워 오위장과 전라감영의 중군으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부를 쌓은 후에는 기민구제 등의 자선사업으로 곽산군수가 되었고, 1834년에는 의주 수재민을 구제한 공으로 종3품에 해당되는 구성부사에 까지 임명되었다. 장돌뱅이로 시작한 그가 종3품의 벼슬을 살았다는 것은 조선의 엄격한 신분사회를 생각할 때 정말 예외적인 삶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만년에도 그는 빈민구제와 시주(詩酒)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시를 잘 지었으며 일생 동안 지은 시를 추려 『적중일기(寂中日記)』 라는 책을 지었고, 그밖에 저서로 『가포집(稼圃集)』이 있다. 여기서 가포(稼圃)는 그의 호로서 ‘벼 농사 짓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소동파의 동파와 비슷한 뜻이라고 하겠다 (동파,東坡는 동쪽에 있는 언덕으로 동쪽에 있는 불모지 언덕을 개간하여 먹을 것을 소동파 스스로가 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상옥은 단순한 거부가 아니었다. 임상옥만큼 많은 명언을 남긴 사람도 많지 않다. 그가 평생을 통해 지켜나간 금과옥조 중 하나는 <상즉인(商卽人)>이다. ‘장사는 곧 사람이며 사람이 곧 장사’라는 말이다.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 즉 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윤이며, 신용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자산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여기서 중국의 상인들이 모시는 재신(財神)을 생각해 보자. 중국에서 재신은 누구일까? 여러분들이 대만이나 중국을 가면 거의 대부분의 상점에는 작은 단이 상점 중심의 높은 곳에 있고, 그 단에는 청룡언월도를 들고 있는 붉은 얼굴에 긴 수염을 가진 재신이 모셔져 있다. 누구일까? 그렇다 바로 미염공(美髥公) 관운장이다. 바로 삼국지에 나오는 그 관운장이다. 삼국지 어디를 봐도 관운장이 부자였다는 소리는 없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장사의 가장 기본을 의(義)로 본다. 즉 상인들 간에 그리고 고객들과도 의(義, 신용)를 지키는 것이 장사의 기본 도리(道理)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중국에서 충의(忠義)의 상징인 관우를 재신으로 모시는 것이다.
가포 임상옥 선생도 똑 같이 생각한 것이다. “장사는 곧 사람이다. 사람과의 믿음과 의리가 곧 장사의 생명이다.”라고 그는 갈파한 것이다.
여기에 비해서 가장 정 반대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장보고다. 해상왕 장보고도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로서 서해안의 중국 해적 떼들을 몰아내고 중국에 까지 이름을 떨친 자랑스러운 분이다. 다만 자신의 딸을 왕건의 부인으로까지 삼으면서 지나치게 권력을 탐하여 결국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타인능해(他人能解)’의 뜻은 『아무나 열 수 있다.』는 뜻이다. 쌀이 두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커다란 뒤주다. 사랑채 옆 부엌의 밖쪽 골목을 향하도록 입구가 되어있다. 손잡이를 돌리면 한되 정도의 쌀이 나와 끼니가 없는 마을 사람들이 쌀을 가져가 굶주림을 면할 수 있도록 한 배려다. 그리고 쌀뒤주의 문도 낮에는 닫아놓고 밤이 되면 열었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쌀을 나눠 줄 수도 있지만, 쌀을 얻어가는 사람들의 자존심을 생각하여 그렇게 배려하였다고 한다.
이런 마음을 가진 분들이 바로 우리의 선조들이다. 구례는 지리산 옆이다. 6.25 동란 시 빨치산 활동이 가장 극심했던 곳이 지리산이다. 그러나 운조루는 6.25의 동란이나, 그 후 빨치산 활동 때도 누구도 운조루를 해하지 않았다. 해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을 사람들이 순번을 지어 집 주위를 돌보았다고 한다.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부의 추구는 어느 한 순간의 승리는 가져다줄 수 있을지 몰라도 길게 이어지는 부, 자식의 만대까지 이어지는 부는 결코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부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서양과 동양 모든 나라에서 받아들여지는 공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인간만의 도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불교와 기독교 양 종교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고 있다. 남을 돕는 것은 자기 가정의 평화를 지키게 하고, 오래 살게 하는 것이라는 문구가 성경과 불경 모두에 쓰여 있다. 남에 대한 보시, 자애, 사랑은 인간의 도리일 뿐 아니라 신께도 인정하는 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은 나의 부가 어떻게 하면 자식들에게도 ‘지속적으로 전달’될까? 하는 문제다. 우리나라에도 “부자 삼대 못 간다.”라는 말이 있다. 서양에도 “과수원 이론(Orchard Theory)’이라는 말이 있다. 두 속담이 뜻하는 바는 동일하다. 과수원을 개척한 1대는 죽어라고 일만하고 변변한 수확을 얻지 못하고 죽는다. 2대는 과수원에서 수확하는 과실로 풍요롭게 살지만, 아버지가 힘들여서 일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소비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손자 3대는 태어날 때부터 과일이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할아버지가 고생한 것은 본 적도 없다. 결국 과수원을 돌보지 않고 따 먹기만 하다가 결국 과수원은 폐허가 된다는 스토리다.
우리 세대도 비슷한 것을 경험하였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누구나 가난하였다. 그러나 헝그리 정신을 바탕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래서 국가가 발전하면서 나도 상당한 부를 쌓게 되었다. 그런데 내 마음 속에 한 가지 아쉬운 기억이 남아있다. 어렸을 때의 가난과 고생이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식들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식을 지극히 사랑한다는 생각에서 ① 자식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 주려고 하였고, ② 그들이 애쓰는 것이 안쓰러워서 내가 모든 것을 대신해 주었다. 나는 자식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잘 해주었다. 그러나 일부 자식들은 연약하기 짝이 없고, 다 자라서도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부모 앞에 응석받이가 된다. 그러면 또 할 수 없이 도와준다. 그러나 나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걱정이 된다. “나 없이도 저애들이 이 어려운 세상풍파를 잘 헤쳐 나갈 수 있을까?”
(1) 로스차일드 가문의 자식교육
JP 모건과 함께 세계 가장 큰 금융의 손이라면 아마 로스차일드 가문일 것이다. 누가 더 막강한 지는 잘 모르겠다. 나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인도 잘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이 얼마나 부자인지를 외부에서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다 매우 큰 부자인 것은 확실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원래 골동품을 취급하는 사람이었다. 골동 동전을 왕에게 헌납하여 좋은 인상을 주고, 왕실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왕실 재정 관리인이 되었고, 영불 전쟁 시에는 영국왕실에 돈을 빌려주고, 빌려 준돈을 받는 대신 화폐발행권을 가짐으로써 어마어마한 부를 영구히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쌓을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FRB도 바로 그런 기관이다. 국가를 상대로 하는 장사가 어떻게 망할 수 있겠는가? 로스차일드는 금융의 천재 중의 천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유태인들의 자식 교육에 대한 몇가지 예를 소개하겠다.
우선 로스차일드는 이런 상상하기 어려운 부를 쌓는 과정에서 엄격한 몇몇 원칙하에 자식들을 교육하였다. ① 자식 별로 유럽 각국을 분할하고 파견하여 확실하게 형제간의 영역을 구분하여 주었다. ② 각 형제는 자기가 모은 정보를 반드시 공유하도록 하였다. ③ 한 형제가 어려움이 있을 때는 이유를 불문하고 그 형제가 어려움에서 빠져 나올 때까지 돕는다. ④ 형제간의 우애는 모든 것에 우선한다. ⑤ 중요한 경영 의사결정에는 형제 이외에는 누구도 (부인도) 참여시키지 않는다.
내가 읽은 얘기 중에는 하버드를 다니는 유대인 학생 얘기도 있었다. “나는 보스턴에서는 하버드 생이지만, 집에 오면 전당포 서기가 되어 손님을 직접 받는다.” 그리고 유대인 부모들은 식사시간을 통해 자식들과 끊임없이 얘기를 나눈다고 한다. 그날 회사 또는 사업장에서 있었던 일과 대처했던 방법 그리고 그 결과를 가능한 즐겁게 얘기한다고 한다. 그리고 식사 시간에는 절대로 나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또한 자식들에게 끊임없이 “부모의 부는 너의 부가 아니다. 네 것이 아니다. 너는 그것을 이어 받을 행운을 갖고 태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너는 너의 부를 쌓아라. 네가 홀로 쌓아도 좋고, 부모의 부 위에 쌓아도 좋다. 그러나 부모의 부를 증가시키지 못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이 이야기들에서 유대인들의 재산이 자손들에게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비결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하버드 생의 이야기에서처럼 자기 자식이라고 해서, 직급을 건너 뛰게 하지 않고, 현장에서부터 착실하게 커 나가도록 교육을 시킨다. 즉 자식을 철없는 왕자나 공주로 키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부모의 부는 부모의 부이고, 자식의 부가 아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시키고, 스스로 부를 쌓을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필요하면 도와주지만 절대로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 또한 부를 증가시키지 않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셋째; 자식이 어릴 때부터 착실하게 부를 쌓는 지식을 전달해주고, 상도 또는 상술을 밥상머리 교육으로 가르친다. 그리고 식사시간에는 가능한 모든 식구가 다 모이고, 그 자리에서는 비난이나 비평을 하지 않는다.
넷째; 형제간의 무한정한 우애를 강조하고, 형제간의 합심을 대단히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형제간의 재산 분할과 역할에 대해‘명확’하고‘공평’한 구분을‘미리’해 놓는다.
다섯째; 중요한 의사결정에는 형제 이외에는 다른 누구도 참여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위에서 나오는 얘기는 아니지만 다른 책에서 또는 내가 우연히 만난 세계적인 부자 또는 유명인사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이다. 교수직이라는 것이 대통령에서부터 최하층의 사람들까지도 만날 수 있는 직업이다. 그래서 나는 운 좋게 다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그들은 책을 정말 많이 읽고, 매우 유식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내가 명함을 주고나면 나는 잊었는데도, 꼭 년말 또는 크리스마스 때에 연하장을 보내거나, 우리 대화 중에 재미있었던 논점과 관계있는 자료를 보내 주기도 하였다. 내가 바쁠까? 아니면 비교가 안되게그들이 바쁠까? 정말 IMF 부총재나 짐 로저스가 자기 집으로 초청을 하였을 때는 당황스럽기 까지 하였다. 그런대 한가롭기 짝이 없는 나는 어떤 때는 그들의 년하장에 답신도 하지 않았다.
다시 우리나라 부자들에 대해 말해보자.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서양의 부자들과 비슷하게 자식들을 교육하고 있을까? 부모의 부를 자기의 부로 생각하고, 그것을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재산으로 생각하도록 우리가 자식들을 잘못 키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 본다. 또한 더욱 중요하게 자식들에게 ① 독서의 중요성을 얼마나 강조하였고, ② 지식의 중요성 그리고 ③ 인류애와 박애정신을 얼마나 가르쳤는지 모르겠다.
옛 속담을 인용하며 결론을 말할까 한다.
눈 속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이 자식이다.
그러나 부모가 해야 할 일은 그 귀한 자식이『내가 없어도, 이 세상 풍파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자식을 강건하게 키우는 것』, 그것이 바로 ‘부모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