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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 쿤데라 Jun 28. 2024

무제

1년 전쯤 아빠에게 대충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 이제껏 내가 배워온 대로, 항상 꼭 건반을 힘 있게 손가락을 세워서 누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것들은 낭만주의나, 특히나 고전주의 음악들에서는 항상 해당되는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특히 인상주의 음악들을 연주할 때는 그것은 필수가 아닌 것 같다. 나는 아직 덜 배운 것이거나, 잘못 배운 것이었던 것 같고,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고.

피아노를 더 많이 치게 된 지금, 나는 또 다른 생각을 한다. 1년 전 나의 그러한 생각은 초보의 합리화, 애매한 연주자의 오만함 등이었다고. 손가락에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이전부터 힘이 있어야 여린 음들도 잘 낼 수 있다고 배우긴 했다. 나 뭐 돼?


언젠가 또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 발레리나들이 연습 하루를 쉬면 스스로가 알고, 이틀을 쉬면 스승이 알며, 사흘 나태하면 관중이, 모두가 안다고. 피아노도 비슷하다. 유산소운동할 때 쓰이는 체력 마냥 조금만 게을러져도 손이 굳어버린다. 그러나 또한 조금만 연습해도 다시 금방 회복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 3번을 나는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그럼에도 나는 또 얼마나 '제대로' 들었을까. 음악을 감상할 정신적 겨를이 없는 삶이다. 생에서 더 많은 것들을 줄여 나가야 하는 것일까.


은근 정신없이 살고 있는 요즈음 문득, 세상에는 고통과 절망이 있었지. 슬픔과 오해가 세상에 있었지. 잊고 있었나 보다. 무망한 시절을 지냈음에도 기질적으로 나는 웬만한 모든 것들을 잘 잊어버리는 사람인 걸까. 별생각 없이 근심 걱정 없이 잘 살고 있나. 문득 내 생에 이토록 평안한 나날들이 있었나, 지금이 내 숨이 다하는 날까지 중 가장 잔잔한 시절이면 어떡하나,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는 본질적으로 가벼운가?


외로움은 느끼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 얕고 근본적인 고독은 항상 있다. 끝까지 가면 차가운 것이 남아있는 것일까 인간의 생이란?



여승

백석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전판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우물을 나가니 또 다른 우물 안. 그것의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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