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엔 밤에 잠을 잘 못 이뤘다. 이모네 집에 엄마 아빠가 나와 동생을 맡기고 간 적이 있는데, 이모, 이모부와 사촌 형 누나, 나와 내 동생이 안방에서 다 같이 잤다. 이모부는 코를 많이 고셨는데, 조금만 건드려도 와아아앙 소리를 내는 이상한 플라스틱 같은 걸로 만들어진 안방 베란다 문이 이모부의 코 고는 소리에 공명해 같이 울렸다. 근데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내 기억이 잘 못 되었나?
같은 공간에서 자는 주변 사람들의 코골이 소리에 잠을 못 이루는 이유에 대한 생각이 든다. 그것은 불규칙성에 있는 것 같다. 혹은 비일관성. 코를 고는 사람들은 대부분 규칙과 불규칙을 반복한다. 규칙적으로 쿠아아아앙...... 쿠아아아앙...... 하고 골다가 갑자기 멈추거나, 다른 패턴, 다른 소리를 낸다. 나는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 소리가, 이 패턴이 나와야 되는데.’ 기다리다, 긴장과 초조함속에 기다리다 잠은 달아나버린다. 만약 코 고는 사람이 꽤나 긴 시간 동안 일정 소리의 패턴을 반복한다면, 어쩌면 코 고는 소리는 너무 크지 않는 한 평화로운 바닷가의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소리처럼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안정시켜 줄 수도.
부모의 자녀에 대한 비일관적인 태도가 불안정애착을 형성할 수 있다고 배웠다.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태도가 일관적인 것이 차라리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좌우간 무언가 공통점이 있잖은가. 우리는 예측할 수 있는 상황에서 안정감을 느끼도록 진화했나.
악. 악에는 악의와 악함이 있나. 또 무엇이 있나. 음...... 악의엔 전염성과 중독성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갖게 되는 많은 이들을 하향평준화 시키고, 또 컴퓨터 하드디스크 차원의 개념에서 병목현상 비슷한 것에 빠지게 만든다. 우리를 정체시킨다.
<시지프 신화>에서 알베르 카뮈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굳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 그것은 철학의 근본적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그 외에 세계가 3차원인지 아닌지, 이성(理性)의 범주가 아홉 개인지 열두 개인지의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런 문제들은 장난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타당할까? 전제가 있지 않은가. 생은 한 번뿐이며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생이라는 것.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내세에 관한 허다한 논쟁들은 차치하고서라도, 근래에는 우리 우주가 시뮬레이션일 수도 있다는 말도 있던데...... 항상 이 책의 앞부분만 대충 읽고 말기를 반복했던지라 뭐 잘 모르겠지만.
글...... 이전에 나를 가르치셨던 선생님께선 이런 비슷한 말씀을 종종 하셨던 것 같다. 너무 오래돼서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글은 쓰지 않고는 못 배길 때 써지는 것이라는 비슷한 말. 동의한다. 글은 억지로 쓰려고 하면 수박 겉만 핥게 된다. 추상적이고 상투적인 글이 나온다. 그것은 내가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해 쓰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러게. 그런데 안다는 것을 알기 위해, 내가 모르는 것들을 모른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또한 잘 모르는 바로 그것들에 대해 알아가기 위해 글을 억지로 쓰는 것은 필요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글을 쓰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고통을 경감시키는 목적도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