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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 쿤데라 Apr 30. 2024

수라

지난 2주간 참 바빴다. 나 음대생 아닌데 나 전공자 아닌데...... 다시 조금씩 시작한 컴퓨터 게임은 내 삶을 잡아먹다가도, 현생이 바빠지니 뒷전으로 물러가버리고...... 이번 생에 게임은 할 만큼 했다고, 이제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건만. 다시금 다잡아야 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게임을 다시 시작했음에도 새로운 아이디를 만들지 않고 기생하고 있는 것, 작년 7월에 4개월 정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며 금연 이전에는 연초를 보루로 사 보관해 펴왔음에도 그런 습관만큼은 다시 들이지 않는 것은 비참한 내 헬라이프에서 그래도 아주 떠나오지는 않겠다는 나의 아슬아슬하게 벼랑 끝에 매달린 손가락 몇 개라고나 할까. 이러한 이야기와 뭐 어떠한 연관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성격은 아닌가 봐.', '나는 역마살이 껴있는 것 같아.' 등의 이야기를 하던 그녀가 지금 내게 비슷한 성격의 말들을 하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은 머리가 컸다. 그런 말을 하던 당신은 사실 그 무엇보다 머무를 곳이 필요했던 것, 생의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거점을 원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을까?


간접경험은 인류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속성 변화 역사의 어떤 경계에 있는 것 같다. 미디어라고 불리는 것이 발달하기 이전엔 간접경험은 아마 거의 한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 시간이 조금 지나서 책, 신문 등으로부터 이루어졌을 것이다. 지금은 영화, 드라마, 유튜브 뭐 그런 것들이 들어선 것 같은데 이게 좀 문제다.

우리는 직접 경험한 것들 만으로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부 온전히 해석할 수 없기 때문에 거의 자동적으로 간접경험을 이용한다. 그런데 스스로 생각해 보았을 때, 특히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내 삶과 대입하기 위해 자연스레 떠오르는 간접경험들은 나만 그런지 몰라도 왜 대부분 영화 혹은 드라마와 같은 영상 미디어 콘텐츠인 걸까. 뭐 사실 그 이유는 그리 궁금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접하는, 어릴 때부터 접해오는 그러한 영상 미디어 콘텐츠들이, 특히 인간의 심리에 관해서 얼마나 정확하냐 하는 것이다. 혹은 얼마나 진실에 가깝고, 호모 사피엔스 심리의 리얼리즘을 대변하느냐 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인류는 아직 현재 다수에게 자연스럽게 사용될 그러한 간접경험들의 출처가 될 만한 콘텐츠들을 그 사용자가 적어도 그것들을 이용함에 따라 정신적, 심리적으로 더 악화되지 않고 불행해질 만하지 않게 만들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럼 언젠가 인류가 더 발전함에 따라 그러한 수준에 도달하고, 또 그것을 넘어설 수 있을까? 그것을 넘어선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그러한 미디어 콘텐츠들이 만족할 만큼 꽤나 우리를 대변할 수 있게 될까? 그러한 수요가 언젠가는 더 증가할까? 우리가 원하는 많은 것들은 비현실적인 것들인데 말이다. 인류는 꿈을 꾸고 있다.

미디어 콘텐츠 기술 뭐 이런 게 발달하기 이전에는 평균적으로 직접경험을 활용하는 비율이 현재보다 높았으려나. 어쨌든 중세시대 사람들은 이러한 맥락에선 현대인들보단 평균적으로 조금 더 '현실적'이지 않았으려나.



어떠한 생각들이 떠오른다.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점점 더 많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이것들로 글을 쓰면 좋겠어!' 생각한다. 글을 쓰기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흘러간다. 몇 가지의 생각들을 붙잡고 글을 써본다. 다른 생각들은 붙잡지 못해 휘발되고 말았다. 그저 글을 쓰는 과정에서 다시 떠오르기를 바랄 뿐.


나의 친할아버지는 교장선생님이셨다. 글을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좋아하셨던 것 같다. 쓸 말들이 조금 더 있지만 이 부분에서는 줄이도록 하겠다. 나의 아빠는 <인물과 사상>이라는 시사 잡지에 글을 투고한 적이 있다. 한두 번 실렸던 것 같더라. 나 역시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유산. 우리는 대를 이어가며 어떠한 불멸을 꿈꾸고 있나. 우리란 무엇일까. 나는 표면적으로 영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피상적으로 인간에게는 모순이 있고, 사실 조금 더 들어가면 그런 것들이 모순이라고 불릴 수 있나 싶기도 하다.


눈물을 잘 흘리지 않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스스로를 잘 제어하는 편인 것 같은데, 나는 우는 것을 그리 곱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의 과시요, 웬만하면 히스테릭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눈물에는 흔히 말하는 카타르시스가 있고, 슬피 우는 사람들은 정도는 달라도 울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나르시시스틱 한 쾌락을 어느 정도 느낀다. 이것이 눈물의 목적이 되는 경우도 많다고 예상한다. 그러니 나는 좀 찜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져 나오는 울음이 있다. 그것은 내가 나를 제어하지 못한 것일까? 아빠는 나 때문에 꽤나 오래 슬펐다. 언젠가 엄마가 내게 말해주었다. 아빠는 그 언젠가 이후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고. 새벽 문득 잠에서 깨면 내가 이렇게 된 게, 우리가 이렇게 된 게 전부 꿈같다고.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무엇을 느꼈나. 생각은 여기서 가로막힌다. 그러니 눈물의 너머로, 가야 한다. 나에게 하는 말이다. 내게는 그게 좀 쉽지 않다.


내게 젊음은 참을 수 없는 오만과 우월감의 향연. 그런데 우월감의 다른 이름은 열등감이랬다. 이제 집중력이 다했다. 잠이 많은데 아마 약 때문이리라. 벌써 6년 가까이 먹고 있네. 내 주변에 이런 게 궁금한 사람이 있으려나.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식으로 무례하지는 않으리라. 이제는 집중력이 다했다. 정말. 글은 언제나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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