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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감싸는 향기

홍당무의 어린 시절 이야기(1)

by 이수연

토끼야.

어디서부터 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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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세 살 때다.

반짝거리는 체리 세 개와 생일 케이크를 먹은 날이니까.

체리는 녹색, 노란색, 빨간색이었고 끈적끈적했고 달큼한 냄새가 났다.

어린 시절 기억은 정말 이상한 구석이 있다.

이런 알록달록한 기억과 함께 슬프고 무서운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잘 섞여 있으니까.


아기였던 여동생과 거실에서 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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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그랑!

그만 좀 해!

엄마 아빠는 부엌에서 자주 소리를 지르며 싸웠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우리 집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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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나보다 두 살 어렸다.

엄마는 우리가 울면, 꼭 동생만 안아 주었다.

동생: “엄마. 엄마!”

엄마:이리로 와,펌킨.안아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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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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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그 시절, 나를 안아 주는 한 사람이 있었다. 나나 할머니였다.

여섯 살 때 나는 할머니 집에 자주 맡겨졌고, 대부분의 기억 속에 다정한 나나가 있다.

나나: “이리 오렴.”

홍당무: “할머니.”


할머니의 옷깃과 목덜미에서는 병원 소독약 냄새가 났다.

주머니에서 하나씩 꺼내 주시던 레몬 사탕의 새콤달콤한 향기,

그 노랗고 투명한 빛과 할머니의 초록색 눈이 항상 나를 향해 따뜻하게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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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은 ‘수줍음’으로 기억된다.

왜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 많았을까? 그런 순간은 평소보다 시간이 더 느리게만 느껴졌다.

가뜩이나 빨간 내 얼굴은 부끄러워질 때면 더 새빨개지는 것 같았다.

어른들 눈을 피해 할머니의 청과물 가게 뒷방으로 숨어들었다.

바나나 익어 가는 냄새, 오래된 감자 냄새를 맡으며 혼자만의 상상 속으로 빠져들고는 했다.


엄마도 그 방에서 자주 통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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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혼할지도 몰라. 생각 중이야.”

나나: “애들 듣겠다. 다른 방에 가서 통화하지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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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어때서요? 애들도 이제 알아야 해요.”

나나: “홍당무는 일곱 살이야, 다 알아듣는 나이잖니. 그 애에게는 큰 충격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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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엄마랑 아빠가 곧 ‘이혼’할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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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당무: “엄마, 이혼이 뭐예요?”

엄마: 이혼? 이혼은 ‘결혼의 반대’야. 홍당무 네가 누군가를 정말로 좋아하면 그 사람과 ‘결혼’을 하고,

네가 정말로 그 사람을 미워하면 ‘이혼’을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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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단순하고 명쾌했다.

마치 딸기케이크나 초코케이크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것처럼, 어떤 책임감도 느껴지지 않는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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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함께 있어도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엄마 아빠는 대부분 너무 조용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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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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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아빠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면, 엄마는 매일 저녁 집을 나갔다.

두 분이 같이 있는 모습은 점점 볼 수 없게 됐다.

아빠는 집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집에서 나는 위스키 냄새와 담배 냄새가 점점 더 익숙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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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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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지만 나도 동생도 다 알 수 있었다.

엄마가 우리를 떠나고 있다는 것을.

동생과 나는 서로를 껴안고 엉엉 울었다. 엄마도 분명 알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 밤에 깨어 있었다는 것을, 울고 있었다는 것을.

우는 동생을 두고 창가로 뛰어갔다.

엄마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봐야만 했다.


엄마는 그 어두운 밤길 끝에서 한 번쯤은 내가 보고 싶어서 뒤돌아보았을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를 감싼 모든 것이 내 눈앞에서 흔들거리다가 갑자기 뒤섞여 버렸다.

태어나서 지낸 모든 밤 중 가장 무섭고 슬픈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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