셸락, 자연이 만든 오래된 기록의 재료
들어가기에 앞서:
학명은 대개 이탤릭체(기울임체)로 작성하는 게 기본이다.
하지만 브런치는 이런 글자체가 지원이 안되기에 어쩔 수 없이
정자체로 모든 학명을 작성했다는 점 양해를 해주시길.
며칠 전 야마하 악기상 앞을 지나가다가,
매장 안에 걸린 바이올린들이 유난히 빛나 보였다.
그 순간 문득 셸락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바이올린을 배워보고 싶었던 어느 시절,
악기의 역사와 제작 방식을 찾아보다가 처음 마주한 이름이었다.
오래된 바이올린을 보면, 나무 결을 따라 고요하게 번지는 빛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마치 나무 자체가 오래된 숨을 품고 반짝이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그 광택은 단순한 왁스나 니스 같은 광택제에서 온 것이 아니다.
한때 사람들은 악기의 표면을 다듬기 위해,
나무의 수액이 작은 생물의 몸을 거쳐 가공된 물질을 사용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는 셸락이라고 부르는 재료다.
흥미롭게도 표면을 코팅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옻칠과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옻칠이 나무에서 직접 채취한 수액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셸락은 나무 수액이 곤충의 몸을 거쳐 가공된다는 차이가 있다.
셸락은 특정 나무에서 흘러나온 수액이 곤충의 몸을 지나며 변한 수지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숲에서 자라는 쿠숨나무(Schleichera oleosa)나
팔라스나무(Butea monosperma) 같은 숙주나무는 락 벌레가 살아가는 기반이 된다.
작은 곤충들은 나무의 수액을 빨아먹으며 몸 밖으로 끈적한 분비물을 남기고,
그 물질은 가지 위에서 서서히 굳어 얇은 껍질처럼 쌓인다.
사람들이 그 굳은 껍질을 긁어모아 정제하면 투명하고 단단한 셸락이 된다.
곤충은 단지 수액을 변형시키는 작은 매개자일 뿐이며,
재료의 출발점은 언제나 나무다.
악기 제작자들은 이 셸락을 오래도록 애용해 왔다.
나무의 결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더욱 깊고 선명하게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셸락을 얇게 바르고 말린 뒤 다시 문질러 광택을 내면,
나무가 품고 있던 색과 결이 살아난다.
그 광택은 과하게 인위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거칠게 남지도 않는다.
나무의 표면을 자연스럽게 감싸는, 시대를 거쳐 내려온 마감 방식이다.
흥미로운 건, 이 작은 재료가 악기를 넘어 전혀 예상치 못한 세계와 닿아 있다는 점이다.
셸락이라는 이름은 악기의 표면에서 끝나지 않고,
음악이 기록되던 또 다른 표면으로 이어진다.
운이 좋게도, 카페에서 사장님의 배려로 셀락으로 만든 오래된 레코드판을 손에 들고 돌려 본 적이 있다.
흠집이 많아 바늘이 튀기도 했지만, 그 거칠고 텁텁한 표면에서만 들리는 특유의 질감은
오히려 매력처럼 느껴졌다.
20세기 초반의 음악은 거의 모두 이 물질 위에 새겨졌다.
우리가 요즘 비닐 레코드판이라고 부르는 LP가 등장하기 훨씬 전,
세계 곳곳의 78회전 레코드는 사실상 셸락 디스크였다.
바이올린의 표면을 감싸던 그 물질이,
한때는 지구 곳곳의 음악을 담는 표면이기도 했던 것이다.
초기 레코드판은 셸락에 돌가루와 점토, 섬유를 섞어 찍어낸 두꺼운 디스크였고,
단단한 성질 때문에 한 면에 약 3분 정도밖에 담지 못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제한된 표면 위에 음악을 기록했고,
지금 들으면 잡음이 섞여 있음에도, 그 소리는 당시의 시간과 공기를 함께 머금은 기록처럼 느껴진다.
후에 플라스틱이 등장하고 LP가 보급되면서 셸락 레코드는 천천히 사라졌다.
하지만 음악을 담는 표면에서, 악기의 피부에서,
그리고 공예와 미술의 재료로서 셸락은 한 시대를 확실히 통과했다.
나무의 수액이 작은 곤충의 몸을 지나 태어난 물질이,
사람의 손을 거쳐 다시 문화가 되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멋지다.
생각해 보면 자연은 이렇게 여러 단계를 거쳐 무언가를 만든다.
나무가 만들어낸 수액을 곤충이 가공하고, 인간이 다시 그것을 광택으로,
기록 매체로, 혹은 예술의 표면으로 바꾼다.
셸락은 그 정교한 과정의 가장 정직한 흔적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손길이 닿기 전부터 준비된 재료가,
시간과 생물의 움직임을 통과하며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
한때 음악을 기록하던 표면도, 악기 표면의 광택도,
결국 나무가 흘린 수액과 작은 곤충이 남긴 흔적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인간도 그 흔적 위에 또 다른 흔적을 남기며 문화를 쌓아왔다.
그런 의미에서 셸락은 단순한 수지 이상의 존재다.
자연이 오랜 시간 동안 남겨 온 기록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