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9일~ 21일
25년 리디막다를 시작으로 연말에 컨텐츠를 많이 즐겨서 기록용으로 시작한다.
이 작품은 2000년대 일본 서브컬처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던 07th Expansion의 동인 게임이 원작이다. 원작자 용기사07은 당시 현직 공무원 신분으로 이 대작을 집필했다는 독특한 이력으로도 유명한데, 화려한 그래픽이나 시스템보다는 오로지 텍스트와 사운드, 그리고 치밀하게 짜인 복선만으로 독자들을 압도하며 하나의 사회 현상을 만들어냈다.
사실 예전에 원작 게임으로 이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는 끝까지 읽어내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사운드 노벨 특유의 엄청난 텍스트 양도 문제였지만, 루프물 특유의 일상적인 대화가 너무 길게 이어지다 보니 사건이 본격적으로 터지기 전까지 진도가 너무 더디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만화책판으로 다시 읽어보니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만화라는 매체 특유의 시각적인 연출과 압축된 대사 덕분에 그 방대한 이야기가 막힘없이 술술 넘어갔다. 원작의 핵심적인 공포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전개는 훨씬 스피디해져서 몰입감이 상당했다.
만화책판만의 독특한 점이라면 각 에피소드마다 작화가가 다르다는 것이다. 스즈라기 카린, 호죠 유토리 같은 작가들이 각 편의 분위기에 맞춰 작화를 담당했는데, 처음에는 그림체가 바뀌는 게 어색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장점이 되었다. 어떤 에피소드는 귀엽고 화사한 화풍으로 평화로운 일상을 강조하다가 순식간에 기괴한 공포로 전환되고, 어떤 에피소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중하고 거친 선으로 긴박함을 표현한다. 이런 시각적 다양성이 32권이라는 긴 호흡을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준 것 같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묘미는 역시 문제편과 해답편으로 나뉜 독특한 구조에 있다. 초반 4개의 문제편(오니카쿠시, 와타나가시, 타타리고로시, 히마츠부시)을 읽을 때는 그야말로 고구마를 수십 개는 먹은 듯한 답답함의 연속이다. 평화롭던 히나미자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연쇄 죽음, 그리고 믿었던 친구들이 하나둘 미쳐가거나 주인공을 궁지로 몰아넣는 과정은 심리적으로 상당한 압박감을 준다. 독자는 아무런 정보 없이 그 비극적인 루프에 갇혀 무력감을 느껴야만 한다.
하지만 해답편(메아카시, 츠미호로보시, 미나고로시, 마츠리바야시)에 진입하면서 이 분위기는 반전된다. 앞서 제시된 수수께끼들이 풀리는 과정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비극에 순응하던 인물들이 지난 루프의 기억을 조금씩 깨달으며 운명에 맞서 반격을 시작하는 지점에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대단하다. 억눌려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후반부의 전개는 왜 이 작품이 시대를 불문하고 명작으로 손꼽히는지 알게 해준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부분은 역시 국내 정발 상황이다. 본편에 해당하는 32권은 무사히 완결되었지만, 일본 현지에는 정발되지 못한 수많은 외전과 에피소드들이 존재한다. 전체 시리즈의 완벽한 구성을 보고 싶어 하는 팬 입장에서는 메인 스토리 외의 파편화된 이야기들을 국내판으로 전부 접할 수 없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또한 장르의 변화에 대해서도 개인적인 호불호가 갈린다. 초반부의 쓰르라미 울적에는 정말 숨이 막힐 듯한 스릴러이자 미스터리 공포물로서 완벽한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우정과 희망, 그리고 판타지적인 요소들이 강해지면서 소년 만화 같은 느낌으로 변모한다. 개인적으로는 초반부의 그 서늘하고 기괴한 미스터리 분위기가 끝까지 유지되었더라면 아마 장르적으로 훨씬 더 완벽한 명작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초반과 후반의 인상이 장르가 바뀌었다고 느껴질 정도로 차이가 크다 보니, 정통 스릴러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조금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르라미 울적에는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의심이 낳는 비극과 그것을 깨부수는 신뢰라는 테마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닌다. 게임의 느린 호흡에 지쳤던 사람이라도 이번 만화책판을 통한다면 히나미자와의 그 뜨겁고도 시린 여름을 훨씬 더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