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마녀
무기력하다. 나는 너무나 무기력하다.
배불리 먹은 점심탓에 남아도는 기력으로 버튼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내 귀를 시끄럽게 하는 신부장의 잡설을 뒤로 한채로 나는 그것이 정말로 대단한 일인양 집중하는 척하며 도피했다.
'대체 이 회사의 미래와 신나라당이 무슨 상관이길레 저렇게 신나게 떠드는 걸까...'
신부장? 신나라당? 관련이 있는건가? 뭐라도 받아먹을게 있으신가 나 또한 쓸데 없는 생각에 빠져들며 동시에 눈 앞에 있는 버튼에 대한 열중은 더해져만 갔다.
이 버튼이 무엇인지 간단히 설명해볼까?
나도 배치 받은지 얼마 안되서 잘 모르지만 일단 버튼의 핵심은 바로 타이밍이다. 아주 정확한 타이밍, 이 타이밍이란 것은 매우 복잡하고 세심한 과정이라 무척이나 주의를 필요로 한다. 기계의 불빛이 정확히 붉은 기판을 가리킬때에 이 버튼을 누르면 아 제발 조용히 좀 해달라고요 부장님
이런, 실수 했다.
뭐 실수는 세심한 작업에서 언제나 따라오는 일이다. 짐짓 무시하던 부장님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아직도 뉴스에 열중하신 모양이다.
그래 뭐 이런 일이다.
아주 세심하고 복잡한 과정을 통한 엄정한 능력이 요구되는 구조의 말단자리, 나 정도까지 오면 실수를 하든 안 하든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는 위치, 그런 무기력한 일이 나의 일이다.
아아 그래 그래도 한번은 제대로 보여줘야지
다시 한번 심혈을 기울여서
이번에는 기판의 붉은색에 맞추면...그렇지!
"됐다!"
"아따, 깜짝이야!"
버튼이 완벽한 타이밍에 맞았을때
펑!
그것은 힘찬 소리와 함께 솟아오른다. 약간의 진동과 함께 오래된 슬레이트 지붕을 살짝씩 깎아가며 솟아오르는 그것은 바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구름이다.
무기력한 와중에도 이 순간만큼은 벅차오르게 된다.
처음에는 둥근 구의 형태로 솟아올라진 구름은 서서히 유선형으로 몸체를 바꿔가며 로켓처럼 밀어올려진다. 그러다 궤도에 오르면 푹하고 퍼지며 우리가 익히 아는 완벽한 형태의 구름이 된다. 접시같은 밑바닥 위로 만두 두세덩이를 올려놓은 듯한 구름이다.
구름의 종류도 외웠었는데 저건 뭐더라 그래 아마 x1653 뭐 그 언저리였던거 같은데... 정확한 것까진 말단인 내가 아직 알 필요는 없는 일이다.
아무튼 여러분이 보는 아름다운 구름들을 세상에 선사하는게 바로 내 손끝이다. 뭐랄까 이 정도의 보람은 아무리 무기력한 이 작업이라도 존재해도 되는거 아닐까?
구름은 이제는 무엇보다 중요한 거니까 말이지.
모두가 알다시피 부산은 2030년 엑스포 개최가 결정된 뒤로 완전히 다른 도시가 되어버렸다. 노인과 바다라는 옛말을 알고 있는가? 청년은 떠나가고 노인만 남은 이 도시에 드디어 희망이란게 생기기 시작했다.
경쟁상대였던 리야드가 본선에서 그렇게 힘없이 쓰러질줄 누가 알았을까. 돈이면 다되는 세상은 아니었나 보다.
당연히 엑스포에 있어서 구름은 가장 중요한 문제다.
전세계인이 방문할 이 도시의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되었고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부산은 구름 산업 특구로 지정되서 각종 세제혜택, 정부 지원 및 신종 구름들을 시험할 수 있는 테스트 베드의 지위도 얻게 되었다.
각지의 구름 공장들이 몰려듦과 동시에 기존에 있던 지역의 구름기업들도 정부지원에 힘입어 다시금 활기를 되찾았다.
가히 지금 부산은 구름계의 실리콘 벨리라고도 부를 수 있다!
실제로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언론들은 k-클라우드 벨리니 뭐니 유치한 이름들을 지어대고 있기도 하고 청년들에게도 다시 활기가 돌아왔다. 지역의 고급인력들도 이제 대거 연구직으로 뽑혀가기 시작했고 나같은 무기력 무일푼 잉여인력들에게도 길이 열렸다.
산업은 언제나 단순노동자를 필요로 하니까!
경력이 없어도 조건이 없어도 한달에 세번 정도는 올리브유로 만든 치킨을 식탁에 올릴 수 있다는 달콤한 전단들이 부산 전지역을 점령해가고 있었다.
대학가에도 이 유쾌한 열병은 전염되고 있었고 무경력 무조건 무일푼 무기력 가난한 인문대 철학과 학생인 나에게도 이 열병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전공을 살릴지 현실을 직시해야 할지 남북으로 갈린 치열한 전쟁터에서 고민하던 나에게 이 무기력하고 의미없는 일에 투신하는 것이 과연 고고한 나를 움직일 수 있었을까?
하지만 나의 상황은 그리 녹녹치 않은 것이었다. 여러분 전쟁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물러설 때 물러설줄 아는 것이다. 나는 치열한 싸움을 잠시 멈추고 내 눈 앞에 놓인 전단을 바라봤다.
6개월 정도만 해봐? 그래 이건 전쟁을 위한 군자금마련이다!
나는 지금 이것 저것 따질 수 없는 상황이야!
그렇게 나는 1달만에 무기력의 노예가 되어 눈앞에 놓인 버튼을 누르고 일용할양식을 얻어가는 것에 만족하는 삶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굴러떨어졌다? 맞는 표현인가? 이 안락한 천국을 감히 그렇게 표현해도 되는건가? 이런 불경한 녀석.
미안 소크라테스, 나는 배부른 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와 열을 맞춰서 질서정연하게 하늘을 수놓은 정갈한 구름들을 보며 이런 저런 쓸데 없는 생각을 하다보면 종이 울리듯 들리는 소리가 있다.
"6시!"
신부장의 입에서 나온 말 중 유일하게 들을만한 말이다.
오늘도 해피! 비바 부산! 비바 구름공장!
※
"...그래서 구름의 핵에 접근하는게 가장 중요한거야, 구름에는 각자 핵이 있거든 이 핵을 움직이는 동일성의 원리가 모든 구름에 적용된다는게 에피스테메 가설의 핵심이고 근데 그걸 반박하는게 바로 비ㅡ동일성 원리에 따라 추인되는 르포르 이론이야. 너 구름을 핥아 본적 있어? 구름의 맛을 보면 말이지 그게 동일성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고는 도저히 생각 될 수 없어. 입 안에 들어왔을때 느낌이 모두 다르거든 그걸 알고나면 그 다음은... 야, 너 듣고 있는거야?"
"으응..."
퇴근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받아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왜 온천천의 다리위에서 방황하고 있는가? 그건 그의 옆을 어느 순간부터 차지하고 있던 그녀에 힘 입은게 크다. 사실 그가 퇴근을 찬양하는 이유도 사실은 그녀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녀는 특징적인 검은 단발을 휘날리며 다시 한번 그에게 말을 건다.
"됐어. 안들을거면 치워. 조금은 내 말을 알아들을거라 생각해서 상대해줬더니,"
"아니 아냐! 듣고 있었어 정말로... 그러니까 저기.. 음 헤일리 프로젝트에 대한 거였지?"
"아 정말!"
그렇다. 그는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아까부터 그녀 눈밑의 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점이란건 신이 내려준 타투가 아닐까'
"...그래도 헤일리 프로젝트는 기억하고 있구나, 기특한걸!"
그래 역시 너도 관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라며 중얼거리는 그녀를 뒤로하고 그의 시선은 이번에는 그녀의 검은색 저지가 얼마나 그녀의 검은 단발과 어울리게 태어났는지에 대한 고찰로 향해가고 있었다.
이 어이없는 조합은 어쩌다 탄생하게 되었는가.
설명을 위해선 그의 입사 첫날로 돌아가야만 한다. 풍운산업은 부산의 토종 구름기업 중 하나로 서슬 퍼런 유신시대도 버텨온 산업의 역군으로 기어코 IMF도 버텨냈지만 어이없게도 희망차게 맞이한 새천년에 산업이 이렇게 기울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시대의 변화와 함께 커가는 부산에 더럽고 힘든 제조업은 맞지가 않는 옷이 되었고 산업의 역군, 챔피언은 쓸쓸히 신예들에게 자리를 내어줄 차례였다.
그랬던 것이 왠일, 이제는 뒤로 물러난 챔피언마저 불려나와야 할 정도로 업황은 활황을 맞이 한 것이다. 역시 엑스포, 엑스포 만세! 그러나 늙은 챔피언이 아무리 부랴부랴 유니폼을 챙겨봐도 이미 몸에 맞지 않게 되어 여기저기 군살이 튀어나온 그 모습은 흉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힘내 챔피언!
군살의 내용을 하나하나 들춰보자면 이른바 유신시대부터의 아름다운 전통,그 이름하야 부조리, 그리고 쓰러져가는 건물을 대충 때우고 힘겹게 산업부 기준을 맞춘 설비들, 등등...
세간의 청년들을 두려움에 떨게하며 도망치게 하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그 또한 처음 이 군살들을 마주한 순간 챔피언의 추한 몰골에 경악하며 도망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여하간 세상이 말하는 mz는 아니었다.
아니 사실 세상이 말하는 mz의 기준에 딱 들어맞는 그였으나 그래서 였을까? 면접에 임하기전 그는 부랴부랴 반mz전사의 탈에 얼굴을 구겨넣었고 규격이 맞지 않는 가면은 그의 눈을 반쯤은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 그에게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당당한 반mz전사로서 면접관 겸 이사님의 요즘 젊은이 답지 않구먼! 이라는 빛나는 찬사와 함께 챔피언의 뱃살로 기어들어가는 사태를 야기했다. 어쨌든 그가 행복하다면 된거겠지.
사건은 바로 이 뱃살 속에서 발생했다. 입사 첫날부터 그에게 부조리의 부메랑이 돌아온것이다. 풍운산업에는 유구한 전통이 있다. 그것은 신입, 즉 막내가 들어오면 가장 먼저 배정되는 일로...
"야 신입아, 니 구름의 마녀라고 들어봤나"
"예?"
신부장이 아직은 그에게 있어 조금의 권위를 가지고 있던 그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뚱딴지 같은 소리에 그의 가면 속에 잠들어있던 mz의 본성을 깨울뻔 했다.
첫날부터 이런 미친소리를 하는 회사라니. 무슨 소리지,모바일게임이라도 같이 하자는 얘기인가?
어리둥절하며 어쩔줄 몰라하는 그를 보며 신부장은 신입 기강 잡기에 성공했다는 듯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거는 진짜 업계에 있는 사람이면은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하는 얘기데이. 아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만 사람이 아무리 부족해도 조금은 상식이 있는 놈으로 뽑아야 될 거 아이가. 이거는 뭐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가 가르치야 하나?"
불평 섞인 말투와는 다르게 히죽히죽 웃는 입꼬리를 감출 수 없는 그는 명백히 인수인계할 신입에 기뻐하고 있었다.
요즘의 부산은 역시 사람 구하는게 제일 큰 일이니 말이다.
"니가 앞으로 똑똑히 기억해야 할 놈이데이. 신기산업에서 신입은 대대로 그 담당이야! 뭐 니는 그래 들었겠지. 그냥 마 여 앉아가 버튼만 꾹꾹 눌러대면 되는 일이라꼬.
근데 알제?
세상 일이 그리 쉽게 돌아가는게 사실은 없는 기라, 내는 이 회사라는게 일도 중요하지마는 그런거를 가르쳐주는게 그기 회사라고 생각한데이, 인생 말이다 인생.
그래 마 딴 말은 필요없고 니가 알아 둬야 할 꺼는 뭐냐, 이 마녀라꼬 하는게 괜히 마녀가 아니다. 진짜 악랄한 놈이데이, 말도 몬한다. 아 뭐 그거는 말하면 밤 새야 되니까네.
간단하게 말하께잉, 마 그래도 지금까지 한 말은 알아듣제? 이 정도도 이해 못하면은 앞으로 일 못한데이.
그래 그래 그러니까..."
7번정도 더 반복된 인생 설교 끝에 신부장의 말을 요약해 보자면 부산에 구름산업이 다시 부활한 이후로 명이 있으면 암이 있는법, 전설속으로 사라졌던 어둠의 집단이 다시 부활 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구름산업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괴롭혀대는 이름하야 환경 테러리스트들이었다.
이들은 공장 공장마다 줄기차게 쫓아다니면서 공장이 문을 닫을때까지 끝까지 쪼아대는 집념의 딱따구리들이다.
부산산업계의 암과도 같던 이들이 구름산업의 리뉴얼과 더불어 본인들도 새단장을 마치고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그래도 단순한 시위대에 불과했던 그들이 이제는 모습을 바꾸어 새로운 시대의 테러리스트들이 되어 돌아왔다.
한명 한명이 강력한 존재가 되어 돌아온 이들은 구름의 마녀, 온천천의 달마,사상의 미남 괴인,... 센스 하고는.
하여튼 아저씨 센스의 별명들과 함께 전설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 이 얘기를 할때 신부장이 가장 신나 있었던 것 같다. 이 아저씨 이런게 취미인건가?
그는 열을 올려대며 이들 중에 지역이름이 붙지 않고 그저 구름의 마녀라고 불리는 이 인물이 가장 위험한 녀석이며 최전선에 풍운산업이 있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깐 그래서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그러니까
부산에서 가장 위험한 테러리스트를 혼자서 막아서는 것이 내 첫 임무 라고요?
"네? 제가요?"
아뿔싸, mz스러움
"그럼 누가 하노? 이 나이에 내가 할까? 니는 아까부터 내 얘기를 뭘로 들었냐, 내가 계속 말했다이가, 회사라는게 단순히 일만하는게 아이고.."
이때부터였을까 그가 신부장의 이야기를 한귀로 흘려듣게 된것이.
※
"젠장! 젠장! 젠장!"
소크라테스를 포기한 대가가 이런것일줄 그는 진정 몰랐다. 새벽6시. 전장의 공기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분명 8시 출근은 보장해준다고 했으면서! 젠장!'
사실 출근시간이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는 애써 그쪽으로 신경을 돌리려 하고 있었다. 신부장의 천일야화 속에서 마녀의 이미지는 끝도 없이 부풀려져 그에게는 마치 중동의 모 테러단체의 수장보다도 무서운 사람이 되어있었다. 애초에 사람은 맞는건가? 알 수 없다!
방비대책으로 싸리빗 하나와 산업용 안전모를 내준 회사의 아량에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그였지만 거기에라도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또한 그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빗자루를 잡고 있는 그는 이 떨림이 추위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알지 못하며 떨림이 멈추기만을 기도하고 있었다.
과연 테러의 귀재는 어디로 침입할 것인가
밤새 머리를 굴려봤지만 범인이 어찌 천재의 머리를 이해하리오. 아무것도 할 수없다는 무력감 아래 하릴없이 맥주만 들이키며 오늘을 맞이한 그였다.
남아 있는 술기운이 그나마 그에게 조금의 용맹이라도 부여한 지금, 이 기운이 떨어지기 전에 마녀가 빨리 찾아왔으면 하는 바램뿐이었다.
새벽의 찬 공기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빠르게 술기운을 떨어뜨려갔고 그는 점점 더 불안해져갔다. 불안이 극에 달하면서 떨어져가는 술기운과 맞아떨어진 그 순간, 어이없게도 극에 달한 불안은 될대로 되라는 식의 극도의 안락함으로 그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장난치지 말라지.
입사 후 맡은 그럴듯한 첫 임무다. 철저한 반mz전사를 연기해온 그가 여기서 술기운에 못이겨 잠에 든다는 촌극을 선보이는건 용납될 수 없었다.
버텨야만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만한다. 지금 여기야말로 최전선이다. 최전선의 병사에게 나른함 따위는 사치다! 그러나 결연한 각오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개는 사정없이 위아래로 진자운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한번 고개가 젖혀질때마다 마치 눈꺼풀에 중력 계수가 한단계씩 올라가기라도 하듯이 그의 눈은 점차 감겨가고 있었다. '안돼...','안돼....'
그 또한 점점 더 감겨오는 눈꺼풀을 인지했지만 이겨내지 못한채로...서서히,서서히,그렇게, 하...이런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니 지금 뭐하노!“
'젠장! 젠장! 젠장! 젠장!'
맥주가 신의 선물이라는 말은 누가 했는가!
새벽6시... 30분!
고작 30분만에 그의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세상 그렇게 날렵한 사람인줄 몰랐던 신부장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처음 보는 장비들을 헤집고 있었고 아직 눈에 익지 않은 회사 사람들이 모두 한 사람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누가 회사를 망치고 있는지 모를 난장판의 끝자락에 검은 머리칼을 길다랗게 휘날리고 있던 마녀는 온통 검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래 마녀... 아니 그녀는 누가 뭐래도 빛나고 있었다. 검은 빛이지만 그래도!
산업전선의 유망한 테러리스트는 그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마녀,,, 아니 미녀? 아니 아니 그녀의 앳된 외모와는 다르게 한손에 꼭 쥐어진 커터칼은 충분히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신기산업의 산업전사들에게는 언뜻 언뜻 역부족으로 보일때도 있었다.
그는 잠시 정신을 놓으면 건장한 아저씨들의 연약한 소녀를 향한 집단린치의 현장으로보일 수 있는 참상을 넋놓고 바라보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젠장! 입사 첫날 처음으로 맡은 업무에서 그는 어이없게도 졸다가 일을 모조리 망쳐버렸다. 그는 현재 거의 그녀의 스파이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을 활약상을 보이는 중이다.
mz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단단히 무장한그가 맥주 두캔에 무너져 내리다니! 이거야 정말로 mz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의 지위 회복을 위해서는 단순히 일을 거드는 척으로는 안된다. 십수년을 단련해온 그 기술로 얼렁뚱땅 넘어가기에는 그가 벌여놓은 일이 너무나 커져버리고 말았다.
큰거 한방... 큰거 한방으로 모든 일을 만회해야 한다...
mz스러움의 극치로 향해가는 그의 사고회로는 점점 더 시야를 좁히고 그는 판단중지의 시점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사고가 이대로 멈춰버리기 전에 생각해내야 한다.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 어떡하지? 그 어떻게가 대체 뭐지?
생각해라 생각해라 생각해라 생각이란 뭐지? 생각은 인식. 인식이란 현상에서 출발하는것. 그리고... 그리고...현상에서 출발하면 본질로 다가갈수 있다...고마워요 후설, 그렇다면 지금 내 앞에 펼쳐진 현상은 뭐지? 내 의식은 어디로 지향하나.
내 의식이 온통 지향하고 있던 그녀의 길다란 검은머리가 내 눈에 들어온다.
그래 저거다!
나는 그게 천국으로 가는 동앗줄인양 뛰어올랐다.
미식축구 선수가 떠오른 공을 잡을때 그 덩치들속에서 뛰어오르는 공포를 이겨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가?
아무 생각도 안한다.
무아의 경지속에서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붙잡았고 순간 공중에 뜬 나는 이 곳이 천국이구나 하는 생각 속에 안도했다. 나의 첫 직장은 이 한순간에 달려 있다.
이 검은 동앗줄을 놓치는 순간 나는 지옥 불구덩이로 떨어지는거다. 손과 머리가 하나가 되어감을 느끼며 합일에 고양감을 느끼던 그때,
"비켜."
시크한 한마디와 함께 싹둑ㅡ 그녀는 고민도 않고 커터날을 반짝이며 머리를 잘라 버렸다.
아아 단발이 더 잘어울리는구나 어울려 어울려
나의 인생을 건 일생일대의 도약은 그 한마디와 함께 잘려나갔다. 내가 있던 곳은 저 공중의 천국 그리고 내가 잡고 있던건 방금까지 내미래와 함께 그녀와 나를 이어주던 동앗줄 그게 끊긴 나는 지금... 떨어진다.
끝도없이. 지옥으로.
젠장,젠장,젠장...신부장의 걱정스런 놀란 표정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감상하는 호사를 누리며 나의 의식은 꺼져갔다.
※
이게 사건의 전말이다. 싱겁다면 싱거운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독자 여러분 양해해주시게. 백면서생 이었던 나에게 첫 출근 첫 근무의 기억치고는 꽤나 임팩트 있는 사건이었으니.
이야기에서 전혀 해결되지 않은 부분들이 많으니 본편보다 긴 에필로그를 허락해준다면 주절이 주절이 떠들어보도록 하겠다.
먼저 어떻게 아무것도 못하고 민폐만 끼친 내가 아직도 풍운산업에 붙어있을 수 있었나하면 글쎄 mz스러움의 극치로 보였던 나의 행동이 회사 사람들에겐 오히려 이쁘게 보였나 보다.
신입이 뭐라도 해보려던게 기특했다고.
거기에 나는 실제로 말하자면 꽤나 크게 다치기도 했으니 나무라기엔 너무 큰 전장의 영광이긴하다.
두번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무능이 용기로 포장되서 그날의 사건을 덮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입은 상흔에 비해 사건이 너무 작은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신부장이 4번째쯤 인생설교를 늘어놓을때부터 듣기를 포기한 나의 잘못도 있었지만 풍운산업의 신입들에게 대대로 전해내려진 대테러 작전임무의 실상이란 뭐랄까 안내데스크의 친절한 상담역 정도되는 임무였던 것이었다.
구름의 마녀는 그 지치지않는 설교력 때문에 전설의 이름을 얻은 것이었고 대대로 신입은 출근 전에 나와 그녀의 푸념을 들어주며 서비스 미소를 유지하는게 주업무 였다는 것이다.
고작 그런 임무에 잠깐 졸았다고 내리 3주를 입원해있었으니 회사사람들이 이해 못해줄 일도 아니긴 하다.
그렇게 나는 회복되자마자 다시 이 우스운 대테러 임무에 투입되어서 지금도 여기 온천천 다리 위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것이다.
잠깐 퇴근했잖아 너, 시간 외 근무 아니냐고? 언제부터 그렇게 회사에 목숨을 바치는 산업의 역군이 되었느냐고?
취업을 위해 반mz전사의 탈을 쓰긴 했지만 mz의 최전선에서 부당한 업무에 맞서고 시간 외 수당을 챙겨야 할 임무를 잊은게 아니냐고?
내가 그날 풍운산업 산업전사들의 호의에 감명 받고 자랑스런 산업역군의 반열에 들어선것은 물론 아니다.
그 증거로 이렇게 성실히 퇴근 시간을 지켜 바로 이곳 온천천 다리위로 달려오지 않았는가. 그래 당연하게도 나는 지금 이걸 업무의 연장선상으로 여기고 있지 않다.
그날 이후 왠진 모르겠지만 단발을 유지하며 더더욱 나의 이상향에 가까워진 그녀와 대화하는 일은 못알아듣는 내용이 절반을 넘어서지만 무기력하고 따분한 나의 일상에 그나마의 스파이스로 작용하고 있었다. 신부장의 잡설을 듣는 것 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그래 그래 솔직하게 고백하겠다. 독자 여러분! 나는 그날 그녀에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게 풍운산업의 둔탁한 콘크리트 바닥과의 입맞춤으로 인한 진동현상을 사랑으로 착각한건지 첫 출근 첫 임무의 떨림에 착각한건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여전히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구름의 마녀에게 나는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어때 싱거운 이야기인가? 제조업 최전선의 전사와 환경 테러리스트의 사랑이라...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로군. 그녀의 설명이 구름산업의 아프리카에 대한 영향까지 흘러가는 동안 나는 시선을 그녀의 머리칼에 고정하고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단발이 잘 어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