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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근 May 11. 2024

재확인

 사랑하는 영화와 함께 잠드신 그를 추모합니다.

 최근 한 70대 노인의 고독사가 SNS에서 화재가 된 적 있었다. 고독사가 화재 되면 늘 그렇듯 그의 방사진도 공개되었다. 사진에는 뭔가 기묘함이 담겨있었다. 사람이 죽은 공간이라는 꺼림 찍한 감정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수많은 사진들. 거실과 작은 방하나, 혼자 살기에 적당한 그의 집은 꼼꼼하게 붙여진 온갖 종류의 영화 포스터로 도배되어 있었다. 정성스럽게 붙여진 사진들이 할아버지가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고 그 포스터들을 아꼈는지를 보여줬다. 그리고 켜져 있던 TV로 보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영화를 보다 죽은 것으로 추측이 되었고 그의 죽음에는 “70대 영화광의 쓸쓸한 엔딩”이라는 뻔한 제목이 달려 나왔다.

 흔하지 않은 광경에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관해 여러 가지 추측을 내놓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홀로 영화를 보다 숨을 거둔 그가 과연 행복했을까 하며 연민 어린 글을 써놓은 반면, 어떤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다 죽었느니 진짜 행복한 삶을 사셨다고 글을 남겼다. 또 다른 사람은 글쓴이가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을 공개했다는 비난 섞인 말 한마디 남겨 놓기도 했다. 하나의 죽음에 수백수천의 다른 시각들이 보이니 읽는 재미가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다시 할아버지의 방을 보았다. 글쓴이가 사진들을 “제단”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할아버지는 영화를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사진들이 너무 소중한 나머지 그는 방에 그 어떤 사람도 들이지 않았고 독거노인인데도 불구하고 복지 혜택도 거부했다고 한다. 이 사실까지 알고 나니 내게는 애인을 독차지하려는 여자처럼, 사랑해 마지못한 영화가 할아버지를 철저한 고독으로 내몰았던 것처럼 보였다.

 이 글을 읽으니 불연 듯 떠오르는 또 다른 기사가 있었다. 기사의 통계에 따르면 현 2030 세대 중 실제 연애 중인 사람들은 전체 미혼자 중 36% 에 지나지 않고 과반수이상이 싱글인 상태로 지낸다는 내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체 미혼자 인구 중 20%는 모태 솔로인 것으로 밝혀졌다.

 궁금해졌다.

 그래서 여태까지 모태 솔로인 내 지인들에게 싱글을 고집하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간단하게 ‘연애에 관심이 없다.’ ‘지금 일이 너무 바쁘다’ 혹은 ‘연애 말고도 재밌는 것들이 너무 많다.’ 등등 다양한 이유들이 나왔지만, 더 깊이 대화를 해보니 그중 몇몇은 타인에 대한 불신, 어렸을 적의 트라우마 같은 두려움이 숨어 있기도 했다. 두려움 때문이든, 그 어떤 이유 때문이던 이 사회의 ‘연애 기피’ 현상이 나에게는 할아버지의 죽음과 연관이 있어 보였다.      

  그 영화광 할아버지도 두려우셨던 게 아니었을까? 부정할 수 없이 그는 영화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 영화를 위해 모든 것이 단절되었다.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을 기회가 아예 없었을까? 분명히 있었을 텐데도 그는 그것을 마다하고 사랑하는 영화와 함께 영면에 드셨다. 왜였을까?

 누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떤 것에 노력했을 때 노력대비 가장 소득률이 좋지 않은 것이 인간과계라고. 최소의 투자로 최대 이익을 보는 게 미덕인 자본주의 세상에서 시간과 비용, 그리고 정신적 소모가 큰데 비에 보답받을 확률이 현저히 떨어지는 ‘인간관계나 사랑’따위는 예전만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처럼 할아버지도 엎치락뒤치락하며 힘과 시간을 쏟아야 하는 인간관계보다 그에게 영화는 버튼하나 누르면 즐거움을 주는 가성비 행복이었을 거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 행복 덕분에 사람과의 왕래란 없었고, 지원의 손길도 마다했다. 모든 가족들이 한자리에 삼삼오오 모이는 명절에도 아마 그는 오래된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집어 들어 홀로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연애하지 않기로 “결정한” 2030 젊은이들과 영화광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그와 같았을 적이 있을 것이다. 원하는 행복(혹은 상황에 따라서 목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있지만 그것을 얻지 못했을 때에 맛봐야 될 좌절감, 막연함, 불안감 때문에 내가 진심으로 바라던 것을 외면했던 적이. 그리고 인간의 감정 중 두려움만큼 강한 것도 없기에 나중에는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망각하고 말아 버린다.      


  나에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떤 감정을 느꼈을 것 같은지 묻는다면, 글쎄, 난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주장한 것에 비해 모순된 대답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가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았을 것이라 단정하고 싶진 않다. 마찬가지로 2030 청년들이 두려워서 연애를 시작하지 않는다고 단면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할아버지는 순수한 아이처럼 영화를 사랑하신 채로 행복하게 돌아가셨을 수도 있고, 수많은 싱글들도 연애 이 외의 것에서 진정한 행복 맞보며 살아가고 있을 수 있다.

 그저, 글을 보면서 다시 한번 스스로한테 타인들에게 재확인 차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정말 원해서 지금 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 지금으로도 진짜로 괜찮은지.


 하지만 만약 행복을 바라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위기라는 것이 수반되어야 한다면, 그 변화가 정말 스스로한테 가치 있는 것이라면, 남들이 뭐라고 하던 부디 가성비 따지지 말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에 소견 짧은 글을 남겨 본다.      












작가의 말


 분량조절 실패로 이번 주는 에세이로 대처합니다.

 분량조절 실패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작가 같은 기분이 들어 개인적으론 감사하네요. 허허

 다음 주부턴 개인적 사정으로 글의 길이가 조금 짧아지지 않을까 합니다.

 그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쓰겠습니다.

 저의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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