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비 야 ' 인 상

스페인 여행 산문

by Dongsunlee



여 행


나는 이 여행을 떠나기 전 스페인이라는 나라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고 알아볼 기회도 생각해 볼 어떤 명분도 없었다.

그저 유럽의 한 나라로 월드컵 축구 소식이 있을 때나 흘려들을 정도의 관심 밖의 나라였다.


한낱 초등학생 수준의 콜럼버스, 남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지배했던 나라, 정열의 플라멩코 춤의 나라라는 정도로만 아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여행을 결정을 하고 여행지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아 유튜브, 티브이 여행 프로그램을 보며 스페인 여행에 대한 예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작된 내용들이 예고편 이상으로 상세히 다루어져 한편으로는 실제를 보기도 전에 김을 빼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다.


여행의 묘미는 무한의 기대를 갖고 시간과 비용, 때로는 고통까지도 감내하며 그 대상 앞에 나를 데려다 놓고 가려진 막을 걷어내 듯 활짝 열어젖히는 일종의 깜짝 이벤트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기대와 상상을 뛰어넘는 그 어떤 것으로 인해 잠자고 있던 원초적 감성이 깨어나면서 목구멍 깊은 데서부터 올라오는 신음 같은 탄성을 내 뱁트며, “아 –! 여기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맞는가?” 하며 새로움과 신기함에 감격하는 일 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살아 경이로운 이 순간을 내 두 눈으로 직시하고 경험함에 감사가 저절로 우러나와 메마르고 지루했던 일상에 여름 소나기와 같으리라.


사실 떠나는 것만이 여행의 전부라고 말할 수 없다.

준비하고 상상하고 기다리는 것 또한 여행의 한 부분이라 생각된다.

무엇을 가졌을 때보다 갖기 전 대상에 대해 더 집중하고 마음을 쓰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 일정을 머리에 떠올리고 관광지의 역사적 배경과 맛집, 날씨 등등을 검색하여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 옷가지와 준비물을 방 가득히 늘어놓고 점검함이 채바퀴와 같았던 일상에서 벗어나 색다른 사고대상과 풍경을 만들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던 가운데 어느새 하루하루가 지나 그날은 왔고 새벽같이 일어나 설레는 가슴을 안고 공항으로 달려간다.


예상은 했지만 꼭 이렇게 번잡한 공항수속을 꼭 해야 하나? 하며 씨알도 먹히지 않을 투정을 혼잣말로 내뱉어 공항 한 구석에 남기고 길고 지루한 검색대를 지나 비행기에 탑승한다.


계란 꾸러미와 같이 좁디좁은 이코노미 좌석에 앉아 시트벨트로 허리를 옥죄이며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를 되뇌며 몸과 마음을 에어플레인 모드로 전환시킨다.


세 비


엘에이에서 뉴욕을 경유해 13시간 만에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도착해 2박 3일의 관광을 마친 후 버스로 3시간 이동해 스페인의 세비야에 도착했다.


도심으로 들어서니 스페니쉬 억양이 강해 영어 단어 하나하나가 더 귀에 잘 들어오는 현지인 가이드의 세비야에 대한 안내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랜 승차 이동으로 지쳐져 있던 이들이 자세를 고추세우고 차창밖을 주시하며 처음으로 대하는 세비야의 도시풍경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카메라를 꺼내어 들고 가이드의 유적지에 대한 설명에 귀를 쫑긋 세우고 들으며 상기된 눈으로 스치는 풍경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지나치는 도시풍경은 여느 유럽도시와 같이 잘 보존되어 있어 미국의 현대화된 풍경과는 색달라 시간여행의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파란 하늘 밑 가로수 속으로 물살을 가르는 듯 도시를 관통하며 지날 때 만화경을 보듯 새로운 장면들이 펼쳐진다.

병풍처럼 둘러친 유럽고유 형태의 연 이은 건물들이 중세시대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고 그 밑으로 버섯모양의 군청색의 파라솔들이 자리해 테이블마다 삼삼오오 앉아 한가히 점심을 즐기고 있는 도시민들의 모습이 여유로 우면서도 이색적인 풍경으로 다가온다.




버스에서 내려 공원길을 걷는데 먼저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지금 걷고 있는 잘 포장된 도로였다.

흰색의 화강암과 검은색의 현무암을 일일이 손으로 다듬어 물결무늬 형태로 디자인된 길이 쭉 펼쳐져 있는데 걷는 이로 하여금 환대의 레드카펫을 걷는 듯 묘한 기분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목욕탕에 세라믹 타일을 깔아 방수와 배수를 관리했던 것처럼 가는 곳마다 구석구석 맨땅을 밟을 수 없을 정도로 차도와 인도, 광장마다 수천수만의 타일과 석자재로 도시전체를 덮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날은 오전에 약간의 비가 내려 박혀 있는 돌들이 유난히 반들거렸고 이런 도로에 익숙지 않은 우리로서는 미끄러질까 봐 조심하며 걸어야 했다.

군데군데 지면이 평탄치 않아 물이 고인 곳도 있었지만 신발에 진흙이 묻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광 장


세비아 광장으로 들어서니 붉은 적벽돌 건물이 우람하게 나타나 본격적인 관광에 들어서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반 원형의 구조로 중앙 본관을 중심에 두고 양편 날개 끝에는 높은 종탑형의 전망대가 발란스를 잡는 듯 세워져 있고 건물을 받치고 있는 백 여개의 아취형 기둥들이 부채를 펼친 듯, 위세를 과시하며 뽐내고 있었다.


해자와 같은 말굽형 운하 위에는 백 자기에 청색으로 문양을 그린 ‘아줄레호’식의 독특한 난간과 무지개형 다리를 오색 타일로 장식한 4개의 구름다리가 메인 광장을 이어주고 있었다.


아취형 기둥들이 군대 도열하듯 세워진 주랑 안으로 들어서니 석재와 목재, 그리고 세라믹 타일을 사용해 섬세하면서도 육중함의 조화를 이루며 스페인의 48개 주요 도시의 특징과 역사적 사건을 도형화해 벽화와 벤치를 꾸며 그 시대의 스페인을 홍보하는 듯했다


세비아 광장은 100여 년 전 스페인의 황금시대를 열 수 있게 도와준 미대륙 국가들과 함께 경제,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박람회를 위해 건축되었다고 하니 그들의 자부심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음이 충분히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스페인이 이 정도로 화려하고 부유했던 과거를 현재에 볼 수 있었던 것은 콜럼버스의 미대륙 발견으로 말미암아 남미에서 수거한 금과 은으로 번창의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 전후 사정을 알게 되니 박람회 개최 의도의 뒷면에는 그간 금과 은 등으로 재정 혜택을 얻었던 스페인 정부로서는 피식민국가에 대한 보답 차원의 위로와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 성 당


이어서 근거리에 위치한 이에 버금가는 세비야의 명물 세비야 대성당으로 이동했다.


스페인의 역사에 획을 긋는 사건이라면 ‘레콩키스타’가 있다. 번역하면 ‘재 정복’이다.

서기 710년부터 약 780년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의 ‘무어인’이 침공해 스페인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후 이를 되찾고자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2세’가 주도하여 주변 4개국의 카톨릭계의 나라가 연합해 스페인을 탈환하게 되는데 그 사건을 ‘레콩키스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때 영토 탈환뿐만 아니라 신앙의 재무장의 운동이 일어났고 그 일환으로 지금의 세비야 대성당 자리에 있던 이슬람 사원을 부수고 대성당을 세웠던 것이다.


그때 이 대성당을 지으면서 “ 우리는 후손이 우리에게 미쳤다고 생각할 만큼 장엄한 성당을 지을 것이다”라고 공헌하며 지은 세계에서 3번째로 크고 장엄한 성당이 바로 세비야 대성당인 것이다.


가톨릭 도시의 보편적 특징 중에 하나는 어떤 건물도 대성당의 첨탑보다는 높게 지울 수가 없다는 철칙을 준수하듯 멀리서도 세비야 대성당의 첨탑이 독보적으로 도시건물들 위로 솟아있어 얼마를 더가야 당도할지를 가늠하며 걸을 수 있었다.


이 길은 매주 미사를 드리러 지나는 길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길답게 양 옆으로 식당들이 줄지어 자리하고 있고 파라솔 밑 야외 테이블에는 때 늦은 식사와 음료를 즐기며 주고받는 대화의 유쾌한 소음이 골목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고 있었다.


진초록의 풍성한 나뭇잎 사이로 샛노란 오렌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가로수가 길 따라 심겨 있어 북적거리는 골목이 더욱 자연 친화적 싱그러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점차 내 시야에 들어온 대성당의 외형은 유럽의 보편적 대성당의 어둡고 복잡한 형태의 고딕 스타일과는 달리 대리석 고유의 밝은 재질 위에 아라베스크 아취 문양을 벽면에 도용했고 이슬람 모스크 사원의 ‘아잔’ (기도 시간)을 알리는 높은 ‘히랄다 ‘ 탑을 재건 시 대성당 종탑으로 변경시켜 현재에 이르렀다 한다. 스페인의 극적인 역사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대성당이었다.



어느 정도의 유명세를 들어 기대를 안고 성당 안으로 들어서니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람두리의 높게 치솟아 오른 대리석 기둥과 펼쳐진 야자수 잎사귀처럼 조각된 천정이 만나 공간이 주는 거리감과 웅장함이 나를 더욱 작아지게 만드는 것 같아 한참 동안 목을 졋치고 넋없이 쳐다보았다.



신앙을 대하는 첫 번째 태도는 신 앞에 ‘나는 작디작은 미물’이라는 생각으로부터 시작됨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하는 공간인 듯하다.


또 하나의 명소는 콜럼버스의 묘지가 성당 안에 있었다.

네 명의 왕이 관을 메고 있는 동상이 있는데 이 네 명의 왕들은 바로 스페인을 되찾고자 함께한 네 나라의 왕이라는 것이다.

이는 콜럼버스가 스페인에 끼친 영향이 지대했다는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 결과물을 보라는 듯 바로 건너편 벽 쪽에 근접시도를 가로막고 있는 검은 무쇠 철창 뒤로 벽면 전체가 어두움을 뚫고 황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대위에 예수님과 마리아상의 성경 이야기를 순금으로 부조해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바로 콜럼버스의 전리품처럼 보였다.


성당을 나오면서 그 시대의 사람들은 성당에 들어왔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미쳐, 나 라면 어땠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화려하고 거룩한 자태의 형상들, 거대, 웅장함을 자아내는 공간의 기세로 경건함과 동시에 두려움이 교차하면서 사랑과 자비의 예수님 보다는 바로 내 앞에 보이는 권위에 머리를 숙이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예나 지금이나 물질의 풍요나 전체적 종교화는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기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빠 에 야 ‘


새벽부터 먼 거리 버스 이동과 줄지은 관광에 쫓아다니다 보니 서서히 시장기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여행의 큰 축을 이루는 먹거리..

누구나 그렇듯이 무엇을 먹을까 해서 관광지 주변을 검색하고 기행 프로그램들을 찾아보며 생소한 이름과 색다른 식문화에 흥미를 갖게 됨은 여행이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나 역시 몇 가지 음식은 꼭 먹어보리라 마음먹었던 차에 이번 여행에 함께한 영호씨네 부부와 대성당에 오던 길 식당 간판에 ‘빠에야’가 적혀있는 것을 보고 다시 그 식당을 찾아갔다. 그렇지 않아도 나 역시 먹고 싶은 명단에 있는 메뉴였다.

'하몽' 빠에야' '문어요리' '타파스' 등이었다.

(‘빠에야’(Paella) 스페니쉬로 ‘ 철판’이라는 뜻이다. )


오기 전에 기행 다큐멘터리에서 ‘빠에야’ 전문식당을 소개하는 비디오를 보았다.

시골 농장에서 식당을 함께 경영하는데 날짜를 미리 정해놓고 그 시간에 맞추어 요리를 하면 예약된 수 십 명의 식객이 함께 와서 식사를 하는 특별한 식당이었다.

요리를 하는 주방은 커다란 아궁이가 여러 개 있고 불은 장작을 때서 열기를 조절하고 있었다.

우리네 가마솥 크기의 얇은 무쇠 팬 위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닭고기와 토끼고기를 토막 쳐 잘 볶은 후 콩과 야채를 데쳐 토마토소스를 넣고 물을 부어 한참 끓인 후 날 쌀을 그 위에 부어 쌀이 익을 때까지 불 조절을 하여 누룽지가 생길 정도로 익히는 시간이 꽤 걸리는 음식이었다.


그런 전통의 ‘빠에야’ 조리 비디오를 보았기에 한 시간도 안 되는 조리시간의 ‘빠에야’에 약간의 의문이 가긴 했다.

하여튼 ‘빠에야’와 작은 오징어 구이를 시켰다.


진홍색의 하우스 와인과 겉이 바삭하게 구워졌지만 속살이 부드럽고 쫄깃한 식전 빵이 나왔고 한 20여분이 지났을까 검은색 유니폼에 붉은 스카프를 목에 두른 주방장 같은 분이 손에는 두꺼운 장갑을 끼고 대형 피자 크기의 팬을 직접 들고 와 우리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보이는 첫인상은 꼭 우리네 식당에서 해물전골을 다 먹은 후 남은 국물에 몇 가지 양념을 더해 밥 볶아 마지막 식사를 장식하는 붉은 고추장 볶음밥 같았다.

왠지 오랜만에 한식을 대하는 듯해 갑자기 식욕이 상승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비디오에서 보았던 닭고기와 토끼고기가 들어간 전통 ‘빠에야’가 아닌 내용물을 해산물로 대체해 대형 새우와 조개와 꼴뚜기가 들어있어 더욱 내 입맛에 맞는 것 같아 처음 대하는 음식에 어떤 거부감이나 주저함 없이 한 숫깔 퍼서 입으로 가져갔다.


은근한 토마토소스향과 해산물 베이스로 끓여 간이 적절하게 베인 약간 질척한 볶음밥 같았다. 몇 숟갈을 그런대로 먹었는데 질감에 변화가 없어 지루한 감이 들어 먹는 동안 입 안에서 맴돌기도 했고 그나마 새우와 꼴뚜기가 있었으나 그 를 대체하지 못했던 것 같아 뒷맛이 개운치는 않았다.


문제는 밥이었다.

우리 한국사람은 밥으로 살아온 ‘밥 민족 ‘이다.

밥에 예민한 DNA가 우리에게는 있어서 그런지 설익은 밥을 먹는 기분이었다.

생 쌀을 넣고 꽤 오랜 시간을 뜸을 들여야 할 음식을 20여분 만에 나왔으니 우리에게는 대충 넘길 수 없는 음식이었다.


‘빠에야’를 노래 부르던 영호 씨도 다음에 또 먹겠냐고 물으니 고개를 저으며 웃는다.

묵은지를 기대했는데 겉절이가 나온 모양새이었던 것 같다.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고 전수되어 온 식문화는 맛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전통으로 이어져 온

음식과 함께 한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가 주 재료이고 레시피다.

그래서 단순한 음식이 아니고 대를 이어주는 밥상의 역사다.

한 번의 경험으로 전통음식을 단정 한다는 것은 여행객으로서는 무리였다.



훌 라 멩 코


오후 일정을 마치고 옵션으로 훌라멩고 공연을 보기 위해 훌라멩고 전문극장으로 갔다.

역사와 전통을 느낄 수 있는 극장 분위기와 공기가 기다려왔던 나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었다.


간단한 음료가 주어지고 곧이어 장내의 조명이 어두워지더니 ‘칸테’(노래)를 담당한 한 명의 남자와 두 명의 기타 연주자가 자리를 잡는다.


구슬픈 단조 가락으로 우리네 창 과 같이 단단하면서도 거친 긴 구음이 시작되자 이어서 높은 음의 쇳소리 기타 소리가 음률에 올라탄 듯 끼어들어와 송곳과 같이 뾰족한 목소리를 감싸면서 서서히 하모니를 이룬다.


넓은 무대의 한가운데 수많은 칼질로 닳아 생나무의 속살이 허옇게 드러난 칼도마 같은 곳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자 하얀 블라우스에 허리를 잘록하게 보이도록 두꺼운 벨트를 두르고, 힙의 볼륨을 여실히 드러내며, 겹겹이 핀 패랭이 꽃잎과 같은 긴 치마폭을 가진, 눈이 부실 정도로 야한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미녀가 흐르는 박자에 맞추어 어깨 높이에서 작은 동작의 손뼉을 치며 나타났다.


구음은 굴곡진 노래가사로 바뀌고 기타 반주는 더욱 빨라지고 쪽머리처럼 빗어 넘겨 얼굴의 표정이 확연히 드러나는 무용수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박수소리와 팔의 움직임이 점점 커지더니 온몸의 진동 파장이 허리 아래쪽으로 흘러내려가 붉은 치마폭이 물결치듯 출렁이면서 잦아든 노랫소리와 기타 반주소리를 대신하여 신발 굽의 탭소리가 선율을 주도하듯 방망이 질이 시작된다.



엇 박자가 간간이 들어간 탭소리가 점점 빨라지며 분위기를 고조시키더니 노랫소리와 기타의 반주는 덩달아 극을 향하여 달려가고 더 이상 박자를 쪼갤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니 몸체는 서있는 듯하나 발굽의 진동은 한계에 도전하려는 듯 달려가고 있었다. 한참을 올라가는 듯하다 다시 잦아들고 이에 줄다리기를 하듯 옥신각신 하더니 핏치의 꼭대기에 이르러 마지막 남은 모든 에너지를 다 쏫아내고

그녀의 의미심장한 눈빛과 꼭 다문 입술이 허공을 향해 불을 뿜는 듯하다 두 손을 니은자로 벌리며 움직임이 멈추니 소리도 멈춰 섰다.

이에 관람하던 관객들도 일제히 숨을 멈추니 공간이 진공상태가 된 것처럼 적막이 흐른다.


불빛 아래 홀로 동상처럼 서있던 그녀의 팔이 서서히 내려오니 어디선가. ‘ 올 레’! 하는 함성이 극장 안에 울려 퍼졌다.


(‘올레’는 훌라멩고 때와 투우 경기장에서 “참 잘했다 “는 환호로 사용되는데 이슬람의 ‘알라’에서 유래 됐다한다. )


온몸에 힘을 주고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 주시하던 나 역시 ‘ 올레’로 환호했다.

한마디로 ‘열정’ 그 자체였다.

그녀의 춤사위에서, 클라이맥스까지 달려가는 발 구름에서, 수천번의 공연을 했을 그녀가 땀이 범벅이 되도록 마지막 공연이라는 각오로 대하는 그녀의 진지한 태도에서 열정을 보았다.





성 금 요 일 행 진


은퇴를 하면서 변한 것 중의 하나는 날짜를 세는 감각이 무디어졌다는 것이다.

더 하여 여행을 떠나 오니 더욱더 요일에 대한 의식 없이 보내고 있었다.

세비야에서의 마지막날을 맞아 자유시간에 세비아 시내를 돌아보기로 하고 호텔을 나와 걷기 시작했다.


대로를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서니 갑자기 한 곳을 향해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개중에는 검은 가운에 검은 고깔 가면 쓴 사람이 있어 궁금증이 서서히 올라와 우리도 그 무리를 쫓아가기로 하고 뒤를 따랐다.

점점 사람의 숫자는 불어나 이제는 우리 마음대로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골목을 가득 메웠다.


무슨 일인가 해서 궁금해 옆에 있는 숙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프로세시온'(Procesion)이라며 '성금요일 종교행렬'이라는 것이다.



오늘이 '금요일'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을 기념하는 행사가 전 도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행사가 진행되는 골목 건물의 테라스는 붉은 천으로 장식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 비아 돌로로사’ 고난의 길을 재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행진하는 대열에는 어린아이, 군인, 고깔모자에 검은 십자가를 멘 사람들이 수천의 대열을 지어 고난에 동참하며 세비야 대성당으로 향해 가는 중이었다.


대열의 중앙에는 어깨에 십자가를 지고 무릎을 꿇은 예수님의 형상이 금박으로 꾸며진 상여와 같은 대 위에 올려져 있고 한참 뒤이어 금가운을 두른 마리아의 형상의 대를 수십 명이 어깨에 메고 행진하고 있었다.



대가 인파 사이를 뚫고 지날 때마다 검은 양복차림의 사람들이 오른손을 들어 성호를 그리며 기도를 드린다.

한 도시가 함께 신앙에 동참하여 전통과 문화를 이루는 모습이 새롭게 다가온다.


레콩키스타’의 사건으로 모스림과 유대교를 추방하고 가톨릭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역사와 그에 파생된 유물들과 사람들이었다.


내가 마주한 스페인은 현재의 나라라기보다는 과거의 나라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과거의 영광이 너무 커서 현재를 영위한다라고 할 정도로 과거에 집중된 느낌을 받으며 여행을 했다.


특히 이민자로서 민족의 전통과 종교적 계승의 힘이 헤이해 져있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종교는 전통과 그 나름대로의 생활양식을 낳고 문화를 창출한다는 것을 이번 여행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어찌 보면 형식이라 치부하며 종교행위를 소홀히 했음이 전통도 전수도 이루지 못한 것 같아 후회로 남는다.


세비야의 일정을 마치고 다음 여행지를 기대하며 또 짐을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