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옹 윤치호의 일생을 담은 이야기
일러두기
이 글은 작가가 드리미학교 선택활동 <한국 근현대사 이야기>라는 수업에서 작성한 글임을 밝힙니다.
언제든지 토론 및 비판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글을 시작하며…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친일'이라는 단어는 쉽게 반감을 사는 단어이다. 친일과 매국을 동의어처럼 생각하거나 느끼는 경우도 흔하다. 보통의 사람들은 ‘친일파’라고 한다면 ‘이완용’ 같은 극단적인 친일파를 떠올린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는 이미지를 쉽게 떠올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이 구체적으로 친일파 인사들에는 어떠한 인물들이 있고, 그들이 어떠한 친일 활동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절대다수의 친일파들과 우리가 배우기로 ‘을사오적’과 같이 명확히 나라를 팔아먹은 사례와는 확연히 개별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친일파'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일반화시켜 판단하는 것이 우리나라 대다수 국민의 현실일 것이다. 저자의 요지는 친일과 매국이 같은 의미를 지닌 단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과연 ‘친일파는 매국노이다’라는 명제는 성립할 수 있는 명제인가? 이번 글에서 소개할 좌 옹(佐翁) 윤치호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생애 동안 기록한 ‘윤치호 일기’를 읽어본다면 그가 누구보다 조선민족을 사랑하고 조선을 위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그의 생애와 문명개화론에 입각한 그의 사상에 대해 다룰 것이다.
윤치호
윤치호의 유년기와 유학활동
그는 1865년에 태어나 16세까지 전통적인 유학교육을 받은 이후 개화 지향적 성향의 아버지 윤웅렬의 영향으로 문명개화론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이후 일본 유학을 통하여 개화지식의 확대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윤치호의 유학시절에 대한 이해는 곧 그의 친일사상의 배경이 되고, 그가 행했던 정치적 활동들에 대한 이해가 되기에 윤치호의 유학시절에 관한 이해를 빼놓고는 윤치호를 논하기가 어렵다. 윤치호는 그의 스승 어윤중이 신사유람단으로 가게 되자 수행원으로 합류하여 17살의 나이로 일본 유학의 길로 향한다. 그는 일본에서 근대학교인 도진샤에 입학하였고, 일본의 사상가, 교수, 정치가, 대학생 그리고 일반인 등과 많은 관계를 맺었다. 그는 이처럼 일본의 여러 지식인과의 대화와 그들의 저술들을 통하여서 개화지식의 확대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의 실상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된다. 2년 후 윤치호는 일본유학을 마치고 조선으로 귀국하게 된다. 그가 귀국을 결심한 동기를 ‘윤치호 일기’를 통해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가 조선의 문명개화에 대한 의욕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기에 그러한 이유로 귀국을 결심하였다고 추측된다.
하지만 문명개화의 꿈을 품고 귀국한 윤치호의 의욕과는 달리, 당시 조선의 상황은 윤치호의 개화사상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시기상조였다. 그 시기 기득권세력이었던 집권 수구당과의 이념충돌로 많은 어려움에 부딪히기 십상이었다. 윤치호는 수구 사대당 인사들에 대해서 자주독립과 개화자강을 무시하고, 청나라와 고종황제에게 아첨하기에 바쁜 사리사욕만을 탐하는 인사들이라고 비판하면서 집권 수구사대당을 자주와 개화를 방해하는 정적으로 여기게 된다. 그럼에도 윤치호는 조선의 문명개화를 위해 수구당과의 충돌을 피하고 타협을 통한 조화의 방법으로 온건한 개혁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런 그와는 반대로 급진적인 성향의 김옥균, 박영효 등은 집권 수구당이 있는 한 개화자강과 자주독립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만에 실패하는 삼일천하를 겪고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윤치호는 온건한 개화를 목표로 하여 갑신정변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 박영효 등과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갑신정변의 공모자로 간주되어 결국 1885년 상해로 망명유학의 길에 오르게 된다. 당시 윤치호의 나이는 21세였다.
그에게 있어서 청나라 유학은 원래부터 있었던 중국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더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일본유학 당시 경험했던 깨끗하고 청결한 도시와 가옥 그리고 백성들에 모습에 비해 청나라는 사람들의 몸가짐이 더럽고 음식이 불결하다고 생각하였으며, 낙후된 문화, 서양문명을 수용하지 않는 어리석은 ‘중화사상'을 가진 교만한 나라 등 평소에 가지고 있던 청나라에 대한 나쁜 인식을 확신으로 바꾸게 되었다. 다음은 윤치호가 청나라에 대해 자신의 일기에 묘사한 내용이다:
길 위에서 마구 오줌을 누어 더러운 냄새가 성안에 가득하다. 남녀노소는 그 등분에 따라 손톱에 장단이 있다. 가령 상등 귀인은 손톱의 길이가 5촌(寸), 그다음은 2촌 5푼(分), 그다음은 1촌 5푼이다. 늘 이를 닦지 않는다. 이에 덕지가 두 세촌(寸)이나 두터이 쌓여 있고 색깔은 황금과 같다. 입만 벌리면 더러운 냄새가 개똥과 같은데 다년간 이를 닦지 않는 것으로 귀한 것을 삼는다. 밤낮으로 일을 하여 자못 부지런한 듯하지만 그 조루(粗陋) 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 게으름을 또한 볼 수 있다. 인민들은 허풍떨기를 매우 좋아하고, 부문(浮文)을 크게 숭상하고, 떠들어대기를 좋아한다. 나라의 체면은 돌보지 않고 다만 푼전의 이익만을 찾는다. 음식은 정결하지 못하여 구역질이 나게 한다.
이러한 청나라 문화의 모습들이 미개하고 옛것에 집착하여 무기력한 후진국에 머물러 있는 고집스러운 국가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청나라에서 우수한 학생으로 학장과 교수들에게 눈도장을 받게 되었고, 그들의 후원으로 인해 미국의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1888년 윤치호는 미국에 도착한다. 윤치호는 미국의 발전된 문명과 산업과 선진문물에 감탄하였고 미국의 의회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크게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백인우월주의적인 관념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그로 인해 윤치호는 자신을 비롯한 아시아인, 흑인, 황인 등 유색인종에 대한 직접적인 인종차별에 대해 모욕감과 경멸감을 느낀다. 그가 미국에서 보고 느낀 문명의 발전은 그에게 더더욱 조선의 자화개강과 문명개화에 대한 의욕을 품게 하였다.
윤치호의 독립협회 활동
그가 유학생활을 끝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온 시기는 1895년이었다. 그는 조선으로 돌아온 뒤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지방의 관료가 되었고, 그가 유학시기 확립하였던 자신의 사상인 문명개화론을 앞세워 조선의 개화자강을 위해 힘쓰기 시작하였다. 윤치호는 독립협회에 가담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독립협회는 그가 가지고 있던 자유주의적 이념과 민족계몽운동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이념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사회정치 단체이다. 윤치호는 독립협회에서 주로 독립신문의 번역에 많은 가담을 하였고, 서재필이 국내 활동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그에게서 독립신문의 인수인계를 받기도 하였으며, 이후 독립신문의 주간으로 활약하였다. 윤치호의 주간 아래 독립신문은 격일 간지에서 일간지로 바뀌었고, 발행 부수도 획기적으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독립신문은 수구파 정부의 그릇된 정책을 비판하고 탐관오리들을 규탄하여 독립협회의 자주독립 개화자강운동을 적극 지원했음이 드러나 있다. 독립신문은 민족의 권익과 민중의 권리를 위해 힘써 글을 써 내려갔고, 독립신문의 창간자인 서재필 박사도 자신이 떠나간 후의 독립신문의 행보에 크게 만족하여 윤치호에게 앞으로도 계속해서 독립신문을 발전시켜 달라는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그 시기 독립협회는 명성황후시해사건과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고종에게 환궁을 요구하였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에 각종 사업권을 넘기고 있는 고종이 하루빨리 궁으로 돌아가 왕의 책임을 다하기를 요구하였다. 결국 고종은 1년 만에 다시 환궁하였고 독립협회를 비롯한 가신들의 요청으로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그 시기는 1897년이었다. 하지만 독립협회가 고종에게 주장하였던 입헌군주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윤치호는 독립협회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는 갑오개혁에 동참하였고, 노비 해방에 힘을 썼다. 그는 노비제도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제도인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서 이 미개한 제도를 하루빨리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며 연설하였고, 그의 동료들도 설득시켰다. 그는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898년 제3대 독립협회 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게 된다. 최초의 만민공동회는 러시아의 지속적인 이권침탈에 맞서기 위해 개최된 최초의 근대적인 민중집회이다. 그 결과로 러시아의 군사교련단과 재정고문 등이 철수하게 된다. 이처럼 만민공동회는 반러 투쟁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만민공동회를 눈여겨본 관료들도 이 집회에 함께 참여하게 되면서 관민공동회가 개최되었고, 이를 통해 독립협회는 1898년 10월에 열린 관민공동회에서 결의한 개혁안인 ‘헌의 6조'를 결의하게 된다. 헌의 6조의 내용이 황제권 약화에 집중된 만큼 이는 윤치호가 꿈꾸던 민주주의로 가는 첫걸음이었다. 고종도 이에 동의하는 듯 조칙 5조를 선언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독립협회의 활발하고 건설적인 활동에 위기감을 느낀 수구파는 독립협회를 견제하기 위해 이른바 ‘익명서 사건’을 벌인다. 이 익명서 사건은 독립협회가 황제가 없는 공화정 실시를 주장한다고 모함한 익명의 편지를 고종에게 전달한 사건이다. 독립협회는 이 사건으로 고종에 의해 해산되었다. 윤치호는 고종에게 아주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고, 그러한 자신의 심정을 일기에 담았다:
오늘 자 관보에는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헌의육조를 승인한 대신들을 해임한다는 소위 칙령이라는 것이 실렸다! 이런 사람이 바로 왕이다! 아무리 감언이설로 사람을 속이는 비겁자라도 대한제국의 대황제보다 더 야비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윤치호는 좌절하였고 조선의 자화개강과 부국강병의 꿈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윤치호의 애국계몽운동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침탈을 시작하였다. 일본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였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다. 윤치호는 이 시기 일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며 을사늑약을 체결한 대신들을 처벌하라는 상소문을 올린다. 하지만 그는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의 실력부족을 인식하고 모든 관료직을 내려놓고 진정한 독립의 길은 내치와 외교를 기본으로 한 국가자강에 있다고 생각하며 백성들의 실력양성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그는 지성인들의 실력양성을 위해 교육활동에 집중하였다. 그는 미국 남감리교의 캔들러(Warren A.Hendrix) 박사와의 상의하에 1906년 한영서원을 개설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한영서원은 농업, 목공 기술, 축산법, 염직물 등의 실업교육을 중심적으로 교육하여 직업훈련의 기본 원리 습득과 사회생활 적응 등을 가르쳤다. 한영서원 외에도 좌옹 윤치호는 배재학당의 교사, 대성학교의 교장, 대한 자강회 회장 등 근대적 중등교육과 개화자강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적극 가담한다.
윤치호는 일찍이 기독교청년회(YMCA)와도 관계를 맺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05년 이사로 선임되고, 이듬해 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을사조약 체결 이후 교육 활동뿐만 아니라 종교 활동에도 열심을 다하였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 선교의 일이 유교적인 조선사회의 결점들을 제거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기독교 활동은 교육 활동과 마찬가지로 개화를 이루는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또한 윤치호는 애국계몽단체들이 일제 통감부의 많은 압박으로 제한되고 통제되었던 까닭으로 안창호와 양기탁 등을 비롯한 인사들과 1907년 신민회를 조직하여 공화정 수립을 위한 민족운동을 벌이고자 하였다. 신민회는 민족운동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대성학교를 설립하였고, 출판 활동을 위한 대극서관과 자금 조달을 위한 자기 회사를 설립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일제는 식민통치에 걸림돌이 되는 민족운동세력을 뿌리 뽑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하였다. 이른바 105인 사건의 발발이다. 105인 사건은 신민회의 안명근의 독립 자금 모금 활동을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 모의로 날조하여 신민회 회원 105명을 집단으로 대거 체포한 사건이다. 윤치호는 105인 사건의 최고 주모자로 지목되어 3년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당하게 된다.
윤치호의 친일 활동
출소 이후 윤치호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조선의 독립을 외치던 윤치호는 조선과 일본의 내선일체를 위해 힘쓰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출소 후 매일신보 사장과의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후부터는 일본 여러 유지신사와 교제하여 일선 민족의 행복되는 일이던지 일선 양 민족의 동화에 대한 계획에는 어디까지나 참여하여 힘이 미치는 대로 몸을 아끼지 않고 힘써볼 생각이로다.
윤치호는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에 협력하겠다고 선언하며 친일적 성향을 가지게 된다. 그가 옥중에서 어떠한 경험을 하였고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여러 학자들은 국내에서의 개혁활동의 실패와 일제의 방해 탓에 굴복하게 되어 결국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에 현실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라는 해석을 내어놓는다. 하지만 그가 친일적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반민족 행위를 하거나 ‘매국노'적 행위를 하지는 않았다. 그는 일제의 무단통치에 대해 일제가 무력을 앞세워 조선의 국권을 강탈한 후 강제로 백성들에게 동화를 요구하는 차별을 시행하고 있다고 판단하며 분노하였다. 일제가 선전한 조선의 근대화는 일제와 일본 백성들의 득(得)만이 중요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 시기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로 인해 일제에 대한 강한 반발심을 품은 백성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고종황제의 승하 소식에 땅을 치며 울분을 토하였다. 민족 지도자들은 1919년 3월 1일에 비폭력적인 방법을 통한 독립선언을 계획하였고 윤치호에게도 협조를 부탁하였다. 하지만 윤치호는 이들과 생각을 달리하였다. 윤치호는 3.1 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자신의 일기에 저술하였다:
1. 조선의 독립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 상정되지 않을 것이다.
2. 유럽의 열강이나 미국은 조선의 독립이라는 대의명분을 지지해 일본의 심기를 건드릴만큼 어리석지 않다.
3. 가령 우리 조선인들에게 독립이 주어진다 해도 우리는 독립을 통해서 혜택을 얻을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일본은 1894년에 우리에게 독립을 주었다. 우리 조선인들은 그 기회를 어떻게 활용했는가?
4. 약소민족이 강한 민족과 함께 살아야만 할 때, 약소민족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강한 민족의 호의를 얻어내야만 한다.
5. 요즘 일어나는 학생들의 어리석은 소요는 조선에서의 무단통치를 연장시킬 뿐이다. 만약에 거리를 누비면서 만세를 외쳐서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다른 국가에 종속된 국가나 민족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6. 천도교 인사들 같은 음모꾼들에게 속지 말아야 한다.
윤치호는 3.1 운동에 대해 순진한 애국심에 기초한 무모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서구의 열강들이 조선의 독립을 지지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며, 국제 정치적으로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며 파리 강화회의 참석을 통한 독립에 대한 호소는 허울만 좋은 망상이라고 생각하였다. 윤치호는 이러한 감정에 의존한 대응보다는 현실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일제의 발달한 문명을 통해 배우며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조선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는 가령 조선에 독립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시기상조일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에 묘사되어 있는 3.1 운동은 너무나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활동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윤치호는 일찍이 3.1 운동의 한계점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균적 조선인은 10퍼센트의 이성과 90퍼센트의 감성으로 이뤄져 있다.” 윤치호가 자신의 일기에 쓴 말이다. 그는 이성적인 사람이었고,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일기에는 그의 이성적인 통찰들이 잘 드러나 있다:
농지를 사들여서 그 땅이 되살 수 없는 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걸 막는 사람은 그 땅을 팔아서 독립운동 자금을 대주는 사람보다 더 현명한 애국자다. 가난한 소년을 그의 아버지보다 더 똑똑하게 만들려고 학교에 보내는 사람은 정치적 소요를 일으키라고 학생들을 선동하는 사람보다 더 많이 봉사하는 사람이다. 오도(誤導)된 사람을 품위 있는 종교적 삶으로 인도하는 사람은 무지한 민중이 ‘만세’를 부르도록 만들어 감옥으로 밀어 넣는 이보다 조선민족에 훨씬 더 크게 기여하는 사람이다. 지금은 조선인이 배우며 기다릴 시기다.
윤치호는 조선이라는 약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만세를 외치는 일이 아니라, 현실에 순응하며 민족의 실력 양성에 힘쓰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는 반일감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요즈음 반일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 하지만 외국인을 증오하는 것 자체가 곧 미덕은 아니다. 개나 닭이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증오하기 전에 우리의 지적 경제적 수준을 적어도 그들 수준만큼 끌어올려야 한다. 우리가 성냥갑이나 인형 같은 사소한 물건을 사러 일본인 상점으로 달려가는 한, 증오는 우리에게 득이 되기보다는 실이 될 것이다.
그는 반일을 하기 전에 조선 민족의 지적 경제적 수준을 그들의 수준만큼 끌어올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윤치호는 조선민족의 삶이 개선되기를 한결같이 바랬다. 그러한 그가 생각한 가장 현실적인 길은 일선융화, 내선일체였다. 그의 일기에는 내선일체라는 단어가 자주 나타나고 있는데, 내선일체라는 단어를 "Oneness of Korea and Japan"이 아니라 대부분 “Unification of Japan and Korea”나 “Union of Japan and Korea”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윤치호가 가지고 있는 내선일체의 개념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한 국가의 동등한 일원이 되는 것을 바랐다. 그러한 면에서 그는 일제의 민족차별적인 정책에 대해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는 승진한 교사들 중 조선인의 비율이 약 10%밖에 안 되는 점, 지방행정을 맡는 지방자치단체의 심의회가 일본인에게 편중된 점 등을 문제 삼았다. 특히나 그는 창씨개명 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나는 이처럼 열광적으로 조선의 모든 것을 일본 것에 맞추어 순응하도록 강요하는 처사가 아주 부질없고 지혜롭지 못한 정책이라고 본다. 다양성이야말로 삶에서 양념 같은 것이다. 일본이 열망하는 대제국은 반드시 다민족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다민족 구성원들에게 모든 면에서 정확히 똑같아지라고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정책이 아닐 수 없다.
위와 같은 일기의 내용들을 본다면 윤치호는 누구보다 조선민족을 사랑한 친일파임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그는 조선인들이 기존의 문화와 민족성등을 유지한 채 일본이라는 다민족 대국가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윤치호는 조선이 일본의 스코틀랜드가 되기를 바랐다. 윤치호는 이를 위해서 반드시 상호존중과 차별 철폐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또한 그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적을 공유하며 동등한 군인으로서 함께 싸우면 조선인들의 권리를 더욱더 내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조선인들이 일제 군대에 입대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그는 조선인들 또한 현역 지원병 제도로 군대에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조선인 지원병들이 일제의 군대에 입대하는 것이 정식으로 결정되자 크게 기뻐하였다. 윤치호는 이 일을 발판 삼아 조선인과 일본인이 훗날 완전히 동등한 국가 구성원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득 품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일제는 군국주의의 광기에 휩쓸려 끊임없이 확장 전쟁을 이어나갔다. 결국 일제는 미국에까지 손을 대게 되었고, 미국은 원자폭탄으로 일제를 강력하게 보복하여 일제의 꼬리를 강제로 내렸다. 그렇게 대한제국에는 갑작스러운 해방이 찾아왔다.
해방 이후 윤치호
윤치호는 해방 이후 몹시 괴로운 삶을 이어나갔다. 자택에 괴한이 침입해 피습을 당하기도 하고, 외출 중 돌에 맞기도 하며 ‘친일파'라는 꼬리표 탓에 많은 사회적 규탄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친일파라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3개월 동안의 수감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가 사망 직전에 쓴 편지는 이승만과 김구 그리고 한국에 진주한 연합군 사령관에게 전해졌다. 그 내용에는 한국에서 당장 민주주의를 실천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과 공산주의는 위험하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또한 이른바 ‘친일파’는 극소수의 악질 분자를 제외하고는 대사령이라도 내려서 국민 총화로 신국가 건설에 이바지하게 할 것 등이 다음과 같이 저술되어 있다:
누군가에게 친일파라고 오명을 씌우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일본에 병합되었던 기간 동안 조선의 위상은 어땠는가? 독립적인 왕국이었는가? 아니다. 조선은 일본의 일부였고, 미국 등 세계 여왕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즉 조선인들은 좋든 싫든 일본인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식민으로서 조선을 살아야만 했던 우리들에게 일본 정권의 명령과 요구에 응하는 것 외에 어떤 대안이 있었겠는가? 우리의 아들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딸들을 공장에 보내야만 했는데, 무슨 수로 궁극주의자들의 명령과 요구를 거역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누군가가 일본의 식민으로서 한 일을 가지고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마치 자기들이 힘과 용맹성으로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구해내기라도 한 것처럼 어딜 가나 으스대며 다니는 자칭 구세주들의 꼴이 참으로 가관이다. 그들은 아둔하거나 수치심이 없는, 아마도 그 둘 다인 사람들인지라, 조선의 자유는 달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의 자유만큼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이른바 그 해방이란 단지 연합군 승리의 한 부분으로 우리에게 온 것뿐이다. 만일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더라면 허세와 자만에 찬 애국자들은 어떤 사람이 큰 지팡이로 일본을 내쫓을 때까지 계속해서 동방요배를 하고 한국 식민서설을 읊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허세와 자만에 찬 애국자들이 일본을 몰아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해방이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솔직히 시인하고 그 행운을 고맙게 여겨야 한다. 지정학적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민중의 무지와 당파 간의 불화 속에서는 우리 조선의 미래를 낙관할 수가 없다. 우리는 분열되지 말고 단결되어야 한다.
윤치호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해방에 조선은 아직 이러한 해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지만, 그의 나이는 80이 넘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렇게 편지를 쓰는 일 밖에는 없었다. 그는 대한제국을 이끌어갈 인사들에게 이렇게 마지막까지 조선인들의 안녕을 바라며 앞으로의 조선을 잘 이끌어 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는 이 편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뇌출혈로 사망하게 된다.
글을 마치며…
오늘날 윤치호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된다. 그의 생애와 사상을 종합하였을 때 그가 ‘친일파'였다는 사실에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반민족 행위자' 였는지는 다시 한번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의 일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조선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의 친일적 행위들은 모두 나름의 개인적 이유에서의 조선 민족을 위한 일이었다. 그가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전개할 당시에도 조선민족을 향한 애틋한 마음은 그의 일기에 시종일관 드러나있다. 그의 친일 활동은 당시의 현실적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조선민족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였다. 이처럼 윤치호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친일파'에 대한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이는 윤치호가 여느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는 달랐다는 말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쩌면 왜곡된 역사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선은 반세기동안 일제의 식민지로 살아왔다. 윤치호는 구한말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사를 생생하게 모두 경험한 사람이다. 그는 윗글 자신의 마지막 편지에 일제강점기의 조선에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누군가에게 친일파라고 오명을 씌우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일본에 병합되었던 기간 동안 조선의 위상은 어땠는가? 독립적인 왕국이었는가? 아니다. 조선은 일본의 일부였고, 미국 등 세계 여왕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즉 조선인들은 좋든 싫든 일본인이었다.
즉, 조선인은 반세기의 역사동안 좋든 싫은 일본인이었다는 것이다. 나라를 잃은 당대의 상황에서 과연 ‘친일파'를 무조건적인 ‘매국노'와 ‘반민족행위자'라고 일반화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평가인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 사료를 살펴보아도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본 정부의 관료나 군인이 되고자 하였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윤치호도 조선인의 일본 군인 지원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실제로 통계자료를 조금만 찾아보면 1938년부터 1943년까지의 조선인 지원병 평균 경쟁률은 45:1을 넘어설 정도로 굉장히 치열하였다. 이처럼 일본의 군인이 되고자 하였던 우리의 조상들은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일까? 나라를 빼앗긴 분노와 민족성을 잃어버린 아픔을 뒤로하고 오직 본인들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조선출신의 이등시민으로서 그들의 팔자를 뜯어고치기 위해 일본의 군인이 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조선인이기 이전에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삶을 치열하게 꾸려나가던 위대한 개인들이었다. 우리는 무작정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간 우리의 조상들에게 ‘친일파’라는 오명을 씌우는 오류를 범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윤치호와 같이 일제감점기를 살아가며 친일행위를 일삼았던 우리의 조상들을 모두 민족을 배반하고 적과 내통한 비겁한 ‘매국노'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바라볼 때 의로운 분노를 지닌 성인군자 독립운동가와 나라를 팔아먹고 의로운 동지들을 잡아넣은 매국노 친일파의 대립을 쉽게 떠올린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를 가지고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위험한 접근일지 모른다.
오늘날 객관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역사는 너무나 많은 개인들로부터 또 단체들로부터 주관적이고 편향적인 평가와 해석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제는 일제강점기와 친일파에 대한 재해석이 다시금 이루어져야 하며, 그 시기 우리 민족의 조상들에 대한 그리고 그들이 살아간 시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다.
참고 자료
원사료
「윤치호 일기」
「한 노인의 명상록」
단행본
좌 옹 윤치호문화사업회.「윤치호의 생애와 사상」. 서울: 을유문화사, 1998.
정기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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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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