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금요일이니까 오늘은 파스타에 토르티야피자, 어때?”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도는지 눈이 번쩍 뜨인 영원이 적극적으로 메뉴를 제안했다.
오랜 자취생활에 요리를 곧잘 하는 영원은 비좁은 원룸 대신 모든 식기가 갖춰진 가인의 집 주방에서 요리하는 것을 은근히 즐겼다.
그런 영원의 취미는 대지 면적만도 200평쯤 되는 평창동 저택에서 홀로 거주하는 가인에게 사람 사는 냄새를 풍기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그나마 영원이 아니면 마치 홍보용으로 잘 꾸며놓은 모델하우스처럼 이상적이지만 어떤 향도 존재하지 않는 주방이었으니까.
한때 영원은 가인에게 집을 정리한 후 적당한 평수의 아파트 입주를 권유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가인은 남동생 서인이 언젠가는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 2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가인이었다.
“좋지. 그럼 장 봐서 곧장 집으로 가자.”
“오케이!”
대표실을 나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가히 애정 어린 눈빛은 아니었다. 가인과 영원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눈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가인의 수행비서, 나수현이었다.
**
영원이 주차장에 세워진 가인의 차량에 가인과 함께 탑승했다.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갈 거지?”
“그럴까? 너희 집 게스트룸 침대 진짜 좋긴 하더라. 눕자마자 잠이 그냥 쏟아져.”
온몸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영원에 가인이 웃었다.
평소 말 수도 적은 데다 좀처럼 웃지 않는 무표정한 가인이 유독 영원 앞에서는 봉인 해제되는 이유였다. 가인은 영원을 의지하고 또 믿고 있었다.
“내가 하나 사줄까? 생일 선물로.”
“선물? 너 잊었어?”
“뭘?”
“나 원룸에서 살잖아. 풀옵션이라 침대 바꾸는 것도 내 맘대로 안 되는 곳이라고요!”
“그러게 들어와서 살라니까 왜 계속 거절해?”
월세를 전전하는 영원에게 자신의 집에서 짐을 풀라고 한 건 가인의 오래된 제안이었다. 그런 가인의 배려를 영원은 한사코 거절했다.
“너한테 도움 받은 게 얼만데 내가 기생충도 아니고, 어떻게 달라붙어. 나 그 정도로 뻔뻔한 말종 아니거든! 네가 친구 하자는 거 너 부자라서 싫다고 내가 거절했었잖아. 기억 안 나?”
과거를 소환시킨 영원에 운전 중인 가인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노련한 일처리며 배려와 공감능력까지 뛰어난 영원을 지켜본 후, 가인은 친구로 지내자며 먼저 그녀에게 다가갔었다.
그러나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 속해 있는, 소위 ‘상류층’이라는 이유로 영원은 가인의 제안을 거절했었다.
녹록지 못한 환경에서 성장한 영원은 본인 힘으로 등록금을 마련해 대학을 가야 했을 만큼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영원이 평창동으로 이사할 당시, 가인은 영원에게 월세보증금을 빌려주기도 했었다. 자신으로 인한 불필요한 이사였기에 가인으로서는 당연한 처사였지만 한사코 거절하던 영원은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호의를 받아들였다.
“기억나. 그때 너, 나 되게 싫어했잖아.”
“어머! 어떻게 알았어? 나름 내색 안 한다고 신경 썼는데. 헤헤.”
그렇게 시작된 옛이야기에 마트로 향하는 두 사람의 대화는 끊임없었다.
**
요리사 버금가는 영원의 솜씨로 아라비아따, 알리오올리오 파스타와 함께 토마토, 시금치, 양파, 베이컨. 치즈 등이 올려진 토르티야피자가 식탁 위에 차려졌다.
근사한 요리와 더불어 와인을 꺼내든 가인이 가장 아끼는 잔에 와인을 따라 마주 앉은 영원과 잔을 부딪쳤다.
고급 레스토랑이 부럽지 않은, 가인에게는 최고의 저녁식사였다.
“나 실은…… 너한테 할 말 있어.”
한 시간쯤 흐른 후였다. 어느 정도 접시가 비워지고 일렁이던 잔 속 화이트 와인이 바닥을 보일 무렵 영원이 말했다.
“뭔데?”
“다음 달에 남자친구 들어와.”
잔뜩 부풀어있는 영원에 가인이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차분히 내려놓았다.
영원과 3년째 열애 중인 2살 연하 남자친구, 안도영에 관한 이야기였다. 현재 무역회사에 근무 중인 그는 1년간 해외로 파견근무를 나간 상태였다.
사람을 멀리했던 가인이 영원에게 마음을 열었을 때, 가인은 마치 전생에 친자매가 아니었나 싶을 만큼 그리웠던 가족을 만난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영원 또한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한 게 가인의 오산이었다. 여전히 챙겨주고 속 깊은 대화를 나누긴 하지만 남자친구가 생긴 영원은 완전히 달랐으니까.
안도영이 귀국한다는 소식에 잠시 침묵했던 가인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다시 와인 잔을 들었다.
“그렇게 좋아? 표정이 주체를 못 하네. 좋아가지고.”
“히히히. 솔직히 좋아! 너-무 좋아!”
“너 끔찍이 아껴주는 유일한 사람인데 왜 안 그렇겠어. 그럼 아주 들어오는 거야?”
“확실한 건 모르겠는데 일단 연말까지는 한국에 있을 거래.”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한지 영원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어쩐지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내내 콧노래를 흥얼거리더니 이유가 있었다.
“잘됐네. 귀국하면 이번에는 소개해 줄 거지?”
어느새 비워진 영원의 와인 잔에 가인이 와인을 따르며 물었다.
사실 가인은 영원의 남자친구 안도영을 만난 적이 없었다. 영원은 계속해서 자리를 마련하려 했지만 아직은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안도영이 거절했던 탓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그가 가인이 부담스러운 구체적인 이유를 밝힌 건 아니었다. 다만 이따금씩 언론에 오르내리는 가인의 대중성과 재력가라는 선입견이 부담으로 느껴진 게 아닐까 하는 추측 정도일 뿐.
어릴 적 부모를 따라 중국에서 거주한 안도영이 통하지 않는 언어와 문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평범하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은 영원을 통해 가인도 알고 있는 바였다.
5살에 건너가 13살이 되어서야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안도영은 대출을 받아 세탁소를 차린 부모님과 함께 한국에 정착하며 지금에 이르렀다고 했다.
“응. 도영이도 아마 너 좋아할 거야.”
“같이 저녁 먹으면 좋겠다. 너한테 계속 잘하라고 푸시도 좀 넣고.”
“너도 남자친구 있었으면 넷이 같이 보는 건데…….”
아쉬우면서도 미안한 듯 영원이 말끝을 흐렸다.
근 몇 년간 가인에게 셀 수 없는 선 자리와 소개팅이 들어왔다는 건 영원도 익히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호감이 있다며 접근하는 유명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대게는 가인의 재력을 보고 접근했지만 드물게 그녀 자체를 마음에 둔 꽤 괜찮은 상대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가인은 혹독한 외로움에서 탈출할 수 있는 그 많은 기회를 모조리 거절했다.
물론 그 가운데 몇몇 남자들과는 실제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가인은 늘 먼저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는 엄청난 시간낭비를 했다며 영원에게 화풀이를 하다 언젠가부터는 아예 약속을 잡지 않았다.
예민하다 싶을 만큼 사람을 경계하는 가인을 영원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미래유통 매각 전후로 연일 오르내렸던 가인의 기사는 그녀의 사생활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분별한 정보로 도배되었고 대중들은 마치 영화 트루먼 쇼를 보듯 그녀의 기사를 가십거리로 삼았으니까.
세상과 사람들에게 질려버린 가인이 등을 지고 그들을 멀리하려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물이었다.
다만 가인의 마음속, 강철 같이 닫힌 문이 행여 가족을 잃었던 참담한 과거 속에 여전히 머물러 있어서는 아닌지…… 영원은 그저 조심스레 짐작할 뿐이었다.
“너 지금 미안해하는 거야? 나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지 말고 너도 이제 좀 만나봐. 결혼 전제 없이 연애만 해도 되잖아.”
“나 비혼주의자 아니야. 단지…….”
“단지, 뭐?”
“그냥,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거지.”
“뭐? 하!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어이없는 웃음과 함께 황당한 표정을 보인 영원이 냉큼 와인을 마셨다.
“내가 왜?”
“만나지도 않는데 어떻게 너를 혼란스럽게 해. 어쩌다 우연히 자리가 있어도 네가 먼저 피하는데.”
“뭐…… 듣고 보니까 그것도 그러네.”
어느새 와인 병이 비워지자 살짝 술기운이 올라온 가인이 보기 드문 귀여운 웃음을 보였다.
“뭐, 앞날은 모르는 거니까. 누가 알아? 당장 다음 주라도 너한테 남자친구가 생길지. 아니, 나보다 먼저 결혼할지 누가 알겠어.”
“내가 결혼을 먼저 한다고? 너 취했네!”
양 볼이 발그레 진 영원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가인이 일어나 빈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
“난, 더 이상 네 인생이 그늘 속에서 시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
식사 후 거실에서 와인 한 병을 더 비운 두 사람이 각자의 방으로 발길을 돌리던 찰나였다.
게스트룸에 들어서기 전, 뜬금없이 진지한 영원에 가인이 되물었다.
“가족을 그리워하는 건 당연한데, 그렇다고 네 마음이 과거에만 머물러 있으면 현재의 소중한 것들을 많이 놓칠 수 있거든.”
“소중한, 것들?”
“매 순간 과거가 되어버리는 게 우리네 삶이잖아.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을 살아. 그래야 소중한 게 보이니까.”
“…….”
“아, 헛소리 하는 거 보니까 나 진짜 취했나 봐. 잘 자!”
살짝 눈시울이 붉어진 영원이 들키지 않으려는 듯 재빨리 방으로 들어갔다.
“난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야. 소중한 것들의 기준이 너와 다를 뿐이지.”
나지막이 속마음을 건넨 가인의 발걸음이 거실 창가로 향했다.
벽걸이 소등만 남겨둔 채 그녀가 거실 불을 끄자 잔잔한 무드등 사이로 보이는 낙엽 진 정원이 창가 가득 한눈에 들어왔다.
“다들 안 자고 뭐 해?”
창밖의 누군가에게 말을 건 가인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방으로 들어갔다.
마치 곧 거센 무언가가 휘몰아 칠 것만 같은…… 고요하고 차분한 폭풍전야의 밤이었다.